2005-9. 영혼의 장인(匠人)
설교자 김기석
본문 요1:35-42
설교일시 2005/2/27
오디오파일 s050227.mp3 [5388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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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장인(匠人)
요1:35-42
(2005/2/27)

[다음날 요한이 다시 자기 제자 두 사람과 같이 서 있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서 "보아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하고 말하였다. 그 두 제자는 요한이 하는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갔다.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너희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은 "랍비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랍비'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고 대답하시니, 그들이 따라가서, 예수께서 묵고 계시는 곳을 보고, 그 날을 그분과 함께 지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이다. 이 사람은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서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그런 다음에, 시몬을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로구나. 앞으로는 너를 게바라고 부르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게바'는 베드로라는 말이다)]

● 심지를 박아주는 분
한 생을 살아가는 데 가장 소중한 것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스승'을 만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스승을 만난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제가 말하는 스승은 어떤 기술이나 기능 혹은 지식을 가르치는 분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반듯하고 떳떳한 삶을 살도록 깨우쳐주고 이끌어주는 분입니다. 세상에는 똑똑한 사람도 많고, 아름다운 사람도 많고, 포부가 남다른 사람도 많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올바로 박히지 않으면 그의 지식이, 미모가 혹은 포부가 오히려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스승은 우리 속에 심지를 바르게 박아주는 그런 분입니다. 철학자이면서 작가인 이반 선생은 무위당 장일순 선생을 스승으로 모신 기쁨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좋은 어른이나 선생님을 만난 사람은 행복하다. 그런 분을 만나면 우리는 기름진 땅에 뿌리를 내린 나무처럼 부쩍 자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주 혹은 가끔이라도 찾아 뵙고 싶은 선생님이나 어른이 있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훨씬 풍요롭게 살 수 있는 게 사실 아닌가. 좋은 어른, 좋은 선생님. 어떤 사람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의 삶이나 행동에서 배울 바가 있는 사람을 우리는 좋은 선생님이나 어른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사람. 아, 나도 저 사람처럼 살고 싶다고 느껴지는 사람. 우리 영혼에 불을 당기는 사람. 절로 큰절을 하게 되는 사람. 그의 발 아래로 나를 내던질 수 있는 사람. 혹은 자기 이야기를 끝까지 귀기울여 듣고 적절한 충고의 말을 해줄 수 있는 사람. 그를 닮고 싶은 사람. 내게도 그런 분이 있었다.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의 곁에 있으면서도 아직 진정한 스승과 만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그들은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보면서 하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들은 마치 감전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뭔가 결정적인 순간이 자기 앞에 당도한 것을 알아차렸던 것이지요. 그들은 자기들의 삶이 운명적으로 예수님과 연결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라오는 그들을 보고 물으십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우리는 모두 이 물음 앞에 서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영혼의 평안입니까? 그렇다면 요가와 명상과 음악을 찾으면 됩니다. 물질적인 넉넉함입니까? 그렇다면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나 마이크로 소프트의 빌 게이츠를 카피하면 됩니다. 육신의 건강입니까? 그렇다면 유능한 의사 선생님을 찾아가 그의 지시를 따르면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구해야 할 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그 길로 인도할 스승입니다.

● 가장 절실한 질문
요한의 두 제자가 엉겁결에 대답했습니다.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과녁을 빗나간 대답처럼 보이지만, 이 대답은 나름대로의 절실함이 담겨있습니다. 이 질문은 나무 뒤에 숨은 아담을 찾아 나선 하나님의 질문과 형태상으로 유사합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아담에게 던져진 "네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은 그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벗어났다는 책망입니다. 하지만 "어디 계십니까?" 하는 이 두 제자의 질문에는 길을 찾아 애태우는 자들의 목마름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 대해서 불만입니다. '되고 싶은 나'와 '현실의 나'는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창동 감독이 만든 영화 <오아시스>에는 뇌성마비 장애인으로 나오는 여주인공이 지하철 안에서 정상인처럼 벌떡 일어나는 판타지 장면이 등장합니다. 많은 장애인들이 그 장면은 매우 현실적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더 나은 나의 모습을 마음에 그리게 마련입니다. 지금보다 조금 더 젊었을 때, 축구를 좋아하던 저는 꿈에 현란한 드리블로 많은 수비수들을 제치고 골을 넣는 꿈을 꾸곤 했습니다. 꿈을 꾸는 것만으로도 신이 났습니다. 제자들은 어쩌면 자기들에게 덧씌워진 제도의 올가미를 훌훌 벗어 던지고, 어느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자유의 세계를 꿈꾸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40일 금식 기도를 한 제 친구의 고백을 들었습니다. 4주까지는 설교를 했고, 5주차에 접어들면서부터는 공적인 활동을 접고 가벼운 산책만 했고, 그후의 며칠은 누워서 지냈다는 것입니다. 그 긴 시간 동안 무슨 소리를 들은 것도 없고, 무슨 영상을 본 것도 없는데, 극도로 쇠약해져서인지 어느 날 마치 유체이탈과 같은 현상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 그는 누워있는 자기를 밖에서 관찰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답니다. 한편으로는 '야, 내가 저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죽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지금까지 저 육체라는 껍데기를 위해 살았나' 하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 체험을 한 다음부터 그의 삶은 달라졌습니다. 별로 두려운 것도 없고, 집착할 것도 없게 된 것입니다. 그가 경험한 죽음은 그를 새로운 삶의 문으로 인도했습니다. 일종의 문지방을 넘는 체험인데요. 제자들은 예수라는 큰 인격 앞에서 자기들의 생에 결정적 변화가 시작되고 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어디 계십니까?" '주님이 머물고 계신 정신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 영혼을 밝히는 등불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지극히 간단합니다.

"와 보라."

삶의 정수는 말로 전해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만남을 통해서만 전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당신의 세계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그 두 제자는 그날 예수님과 함께 지냈습니다. 그 한 나절의 시간은 그들의 인생의 전환점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만나기 전까지 그들은 길을 찾는 사람이었으나, 예수님과 만난 후에는 그들은 그 길을 걷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목마른 대지에 단비가 내리듯 사람들을 대하고, 삶을 대하는 예수님의 태도와 말씀은 그들의 푸석거리는 영혼에 내리는 이슬방울이었습니다. 그분과 만난 사람은 다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친견한 사람은 누구나 변화되지 않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교회에 처음 나가면서 예수님을 머리로 이해하려고 할 때만 해도 예수님은 제게 참 멋진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을 존재 전체로 만났을 때 그는 제 영혼을 밝히는 등불이었습니다. 내 영혼에 불이 밝혀졌을 때 비로소 제가 어둠임을 알았습니다. 죄인임을 알았습니다. 그분과 만난 후 제가 경험해온 일의 의미를 알게 되었고, 미래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불안을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감싸안고 있음을 또렷이 믿기 때문입니다. 복음성가 가운데 제 마음을 강하게 울리는 곡이 있습니다.

주 내 맘에 오신 후에
주 날 인도하시네
주께 내 맘 드린 후에
더욱 섬길수록 더 귀한 주님
더욱 섬길수록 더 귀한 주님
더욱 사랑할수록 주 날 사랑해
매일 내 맘에 기쁨이 넘치네
더욱 섬길수록 더 귀한 주님

주님과 만난 사람은 이전처럼 살 수 없습니다. 그는 다른 북소리를 듣고 걷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돈을 얻기 위해 양심을 팔지 않습니다. 높아지기 위해 거짓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주류세계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을 하찮게 여기지 않습니다. 모두가 거룩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채우기보다는 비우고 나누는 일에서 더 큰 즐거움을 느낍니다.

● 영혼의 장인
주님의 곁에 머물면서 전혀 새로운 삶에 눈을 뜬 사람은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옷섶에 불이 붙은 사람이 길길이 뛰는 것처럼 영혼에 불이 붙은 사람이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 곁에 머물렀던 두 사람 가운데 하나인 안드레는 자기 형제인 시몬 베드로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그' 생명의 길을 찾았다는 말일 겁니다. 그의 증언은 짧았지만 강력했습니다. 그는 시몬을 예수님께로 인도합니다. 시몬을 유심히 바라보시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이 번역은 뭔가 원문을 뜻을 담기에 부족합니다. 독일어 성경은 이 구절을 매우 역동적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Du bist Simon der Sohn des Johannes; du sollst Kephas heissen.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여기까지는 사실에 대한 진술입니다. 하지만 다음 문장은 당위적 요청입니다. '너는 게바라 불리워야(만) 한다'. 예수님은 시몬의 깊은 곳에 있는 반석을 보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감추어져 있습니다. 마치 돌덩이 속에 숨겨진 옥과 같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꿰뚫어보고 계십니다. 이후에 주님은 시몬의 깊은 속에 숨겨진 게바 곧 '반석'을 끄집어내십니다. 장인匠人은 돌덩이 속에 숨은 옥을 결을 따라 다듬고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내고, 갈아서 광택을 내면서 제 빛깔을 드러냅니다. 그 과정에서 들이는 공과 품이 보통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들 속에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을 이끌어내는 영혼의 장인이십니다. 물론 그 과정은 편한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고난과 시련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결코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당신이 겪으신 고난을 통해 부활의 길을 닦으셨습니다. 베드로도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을 떠나지 않음으로써 반석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이미 우리 속에 있는 최고의 것을 꿰뚫어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삶의 모든 경험을 숫돌로 삼아 우리를 연마하고 계십니다. 이 믿음이 있기에 우리는 행복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지금 '와 보라'고 할만한 곳을 찾고 계십니다. 주님의 뜻을 온전히 드러낸 삶의 자리 말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그런 곳이 되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들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평화롭게 공존하고, 서로를 보살펴주려고 마음 쓰는 공동체, 죽임의 문화가 지배하고 있는 세상에서 살림의 문화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공동체, 평화 없는 세상에 평화의 씨앗을 심기 위해 땀흘리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주님께서 길을 찾는 이들을 향해 '청파교회로 가보라'고 말씀하시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꿈은 이루어지게 마련입니다. 이 꿈이 저의 꿈이 아니라, 주님의 꿈임을 믿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의 꿈이기를 소망합니다. 영혼의 장인이신 주님이 우리들 모두에게 깃든 부정적 생각과 이기적인 욕심과 모난 마음들을 벼려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5년 02월 27일 14시 01분 26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