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0. 투박함과 세련됨
설교자 김기석
본문 출20:22-26
설교일시 2005/3/6
오디오파일 s050306.mp3 [7184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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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박함과 세련됨
출20:22-26
(2005/3/6)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내가 하늘에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는 다 보았다. 너희는, 나 밖에 다른 신들을 섬기려고, 은이나 금으로 신들의 상을 만들지 못한다. 나에게 제물을 바치려거든, 너희는 흙으로 제단을 쌓고, 그 위에다 번제물과 화목제물로 너희의 양과 소를 바쳐라. 너희가 나의 이름을 기억하고 예배하도록 내가 정하여 준 곳이면 어디든지, 내가 가서 너희에게 복을 주겠다. 너희가 나에게 제물 바칠 제단을 돌로 쌓고자 할 때에는 다음은 돌을 써서는 안 된다. 너희가 돌에 정을 대면, 그 돌이 부정을 타게 된다. 너희는 제단에 층계를 놓아서는 안 된다. 그것을 밟고 올라설 때에, 너희의 알몸이 드러나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 신상을 만들지 말라
출애굽의 여정 가운데서 백성들이 꼭 지켜야 할 열 개의 계명을 주신 하나님은 다시 한번 강조하듯 "금이나 은으로 신상을 만들지 말라"고 지시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일단 눈에 보이는 것을 실체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달을 가리키면 사람들은 달이 아니라 손가락을 바라보기 일쑤입니다. 그러니까 신상은 하나님을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숨기는 역할을 할 수 있기에 신상 만들기는 엄격히 금지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신상을 만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신상을 만들지 말라는 말의 의미를 조금만 더 확장해 보면 오늘 우리들이 피해야 할 '신상 만들기'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은 이러저러한 분이라고 규정하고 싶어합니다. 全知全能이니 無所不在라는 말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런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 말을 알았다고 해서 하나님을 다 알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좋은 아마존 지도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아마존강을 알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아마존을 알기 위해서는 그곳에 가보아야 합니다. 지도는 그곳으로 우리를 안내할 수는 있지만, 지도 자체가 아마존일 수는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만났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체험을 다른 이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자기 경험을 말로 표현해봅니다. 하지만 말은 체험을 다 담을 수 없습니다. 용을 그리려다 뱀으로 마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말에 집착합니다. 기독교의 교리라는 것도 사실은 진리의 근사치일 뿐인데, 그게 전부인양 생각하고 그 교리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건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다 어리석은 일들입니다.

욥의 세 친구는 인과응보의 교리를 가지고 하나님의 통치를 설명하려 했습니다. 대개의 경우 세상일은 그 틀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틀을 가지고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 남겨진 부분입니다. 어떠한 신학적·신앙적 언술에도 여백이 필요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욥이 당한 고난을 인과응보의 틀로 풀려는 그들의 시도는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하나님은 그들을 준엄하게 꾸짖으십니다. 욥의 세 친구는 인과응보의 교리라는 신상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대학생들은 시험 때가 되면 '족보'라는 것을 돌리곤 합니다. 몇 해 전부터 그 과목 시험에 반드시 등장하는 문제들을 모아놓은 것입니다. 배짱 좋은 사람들은 그 족보를 가지고 시험 준비를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족보라는 것을 별로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참고 자료는 될 수 있지만, 모든 상황에 들어맞는 것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교수님이 그 날 아침 갑자기 영감을 받아서 전혀 다른 유형의 문제를 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교리'라는 것이 곧 족보와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 유용한 참고자료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에 대해 다 설명해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늘 새롭게 하나님과 만나야 합니다. 신상을 만드는 것은 하나님과의 열린 관계를 닫힌 관계로 만드는 일입니다. 제가 갈치를 좋아한다고 하면 교인들은 갈치만 대접합니다. 사실 저는 때로는 고등어를 먹고 싶은 데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늘 새롭게 만나고 싶어하시는데, 우리는 관습적으로만 하나님을 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기에 하나님은 신상을 만드는 것을 금하시는 것입니다.

●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신상을 만들지 말라'고 부정명령에 이어진 것은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는 긍정명령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 앞에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당연한 말이지요. 그런데 마땅한 것이 마땅한 것으로 지켜지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습관적으로 드립니다. 예배를 본다는 말이 그런 상황을 잘 표현해주는 것 같습니다. 구경꾼처럼 왔다 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사야는 그것을 '내 마당만 밟는 것'(1:12)이라 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요4:24)고 말합니다. 어떤 예배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일까요? 저는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는 명령 속에 그 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번제는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 온전히 돌려드린다는 뜻으로 바치는 제사입니다. 번제는 짐승의 가죽과 내장만 빼고 몽땅 불살라 바치는 것입니다. 번제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합니다. 그렇기에 번제는 온전한 헌신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몸은 교회에 있지만 마음은 온 세상을 헤매고 있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순서를 헤아리면서 남은 시간을 가늠합니다. 그들에게 가장 좋은 시간은 축도 시간입니다. 예배로부터 해방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몸과 마음을 온전히 바치지 않는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다. 소설가 중에 이외수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의 글쓰기는 매우 치열합니다. 그는 글쓰기의 고통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밤을 새워 글을 써본들 무슨 낙이 있으랴. 언제나 닿아오는 것은 절망뿐이다. 써놓고 다시 읽어보면 엿 같다는 생각만 든다. 마누라는 옆방에서 잘도 잔다. 백 매를 쓰고 천 매의 파지를 만든다. 그리고 다시 써놓은 백 매를 태워버린다. 울고 싶은 심정뿐이다. 기침을 한다. 목구멍에서 약간의 피비린내가 나고 있다. 어디까지 망가져 있는 것일까. 그러나 망가져도 좋으니 하나만 쓰게 해다오."

남과 소통하기 위해 쓰는 글도 이렇게 쓰는데,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것은 더욱 철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 바치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지식과 경험과 감성과 의지를 다 바치는 예배를 드리고 계십니까? 기도를 드릴 때 진정을 담아 드리십니까? 찬송을 부를 때 혼신의 힘을 다하여 부르십니까? 헌금을 바칠 때 정말 최선을 다하고 계십니까? 그런 진정과 정성이 없다면 우리는 예배를 통해 새 힘을 얻을 수도 없으며, 영혼이 고양되는 체험을 할 수도 없습니다.

백성들은 또한 화목의 제사를 바쳐야 합니다. 그것은 구원받은 것에 감격하여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드리는 제사입니다. 짐승의 몸 가운데서 가장 값진 부분으로 여기는 기름 조각을 번제단 위에서 하나님께 불살라 드리고, 제사장의 몫을 제외한 나머지 것은 화목제에 동참한 모든 이들이 성전 구역 내에서 나눠 먹는 것이 화목제의 과정입니다. 화목제에 동참한 이들은 하나님의 식탁에 참여한 자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그러니까 교우들과의 신실한 사귐을 포함합니다. 예배에는 함께 삶을 경축하는 사람들의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곁에 있는 이들이 괜스레 고맙고, 어떻게든 그들과 좋은 것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 우리는 제대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의 약속은 실현될 것입니다.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 소박함을 잃지 말라
그런데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는 단에 대한 규정입니다. 가급적이면 흙으로 쌓아야 합니다. 돌로 쌓아도 무방하지만 다듬은 돌로 쌓아서는 안 됩니다. 굳이 이런 지시를 내리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일단은 애굽에서의 종살이를 연상시키는 것들을 피하라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국가 사업에 동원되었던 하비루들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신전을 건립하고 피라미드를 만들고 국고성을 만드는 일에 동원되었을 것입니다. 정교하게 돌을 다듬고 그것을 쌓아올리는 일을 하면서 그들은 얼마나 많은 눈물과 땀과 피를 흘렸겠습니까? 저는 다듬은 돌로 제단을 쌓지 말라는 말을 하나님을 섬긴다는 미명하에 또 다시 백성들의 땀과 눈물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새겨보고 싶습니다. 지금도 많은 교회들이 화려한 교회를 짓느라고 막대한 돈을 들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크고 화려한 예배당이 예수의 정신과 양립할 수 있는 것인가요? 저는 다소 회의적입니다. 예수님이 오늘 여기에 오신다면 과연 그런 큰 교회당을 보시면서 자랑스러워하실까요? 차라리 소박하고 초라할망정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는 교회, 사회의 그늘진 곳을 밝히기 위해 땀흘리는 교회를 기뻐하시지 않겠습니까? 겉만 번지르르하지 실속이 없거나 오히려 세상의 추문거리가 되는 교회가 많습니다.

다듬은 돌로 제단을 쌓지 말라는 말은 또 다른 측면에서도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줍니다. 화려하고 값비싼 옷을 입으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곁에 쉽게 다가설 수가 없습니다. 멋지고 큰 교회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들어갈 엄두가 잘 나지 않습니다. 존 웨슬리 목사는 장엄한 의식이 중심이 되었기에 고-교회(high-church)라고 불리웠던 성공회를 박차고 나왔습니다. 고-교회에는 거칠고 투박한 사람들이 숨쉴 만한 여백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정교한 체계 밖에서 살 수 밖에 없는 땅의 사람들을 도외시하는 유대교의 세계를 박차고 나왔습니다. 그들을 품기 위해서 말입니다. 사람들은 무엇이든 도회적인 것이 세련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도회적이라는 것은 인공적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종교만큼은 인공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단순하고 소박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흑설탕보다는 하얗게 표백한 설탕을 좋아하고, 거칠거칠한 현미보다는 10분도로 깎은 백미를 좋아하고, 미끈하고 잘 생긴 채소와 과일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죽음에 가까운 것들입니다. 거칠고 투박하지만 흑설탕이, 현미가, 그리고 벌레 먹고 못 생긴 과일 속에 생명이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화려한 교회를 짓는 것도 아니고, 정교한 교리의 체계를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 정신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옛 사람은 말합니다.

"모름지기 속해야 할 곳이 있으니, 본래의 깨끗함을 드러내고, 타고난 본바탕을 지키고, 자기를 작게 하고, 욕심을 버리는 것이 그것이다. 故令有所屬, 見素抱樸, 少私寡欲"(노자, 도덕경 19장)

여기서 타고난 본성을 지키라는 말은 '포박抱樸'의 번역입니다. '안을 포'에 '통나무 박'자입니다. 사람들은 통나무를 다듬어서 그릇도 만들고 가구도 만듭니다. 하지만 그릇이나 가구보다 더 근원적인 것은 통나무 그 자체입니다. 거기에서 다른 것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것 없이는 그릇도 가구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의 바탕이 되는 그 근본 마음, 즉 예수 정신을 온 몸으로 안아야 비로소 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 정신은 거끌거끌합니다. 그래서 지혜롭다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습니다. 화려한 교회와 세련된 교회 생활이 투박한 예수 정신을 대치하고 있습니다. 다듬은 돌로 제단을 쌓는 일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사순절 순례 여행길에서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바로 그 투박한 예수 정신입니다. 어려운 사람들의 삶에 화육해 들어가 어김없이 그들에게 살맛을 되돌려주는 그 촌스러운 예수정신이야말로 생명의 길입니다. 우리 모두 그 투박한 예수 정신에 사로잡혀 신명난 삶을 살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5년 03월 06일 15시 40분 4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