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1. 엘리후의 하나님을 넘어
설교자 김기석
본문 욥 35:1-8
설교일시 2005/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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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후의 하나님을 넘어
욥35:1-8
(2005/3/13)

[엘리후가 다시 말을 이었다. 욥 어른은 '하나님께서도 나를 옳다고 하실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지만, 또 하나님께 "내가 죄를 짓는다고 하여, 그것이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라도 미칩니까? 또 제가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하여, 내가 얻는 이익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시는데, 그것도 옳지 못합니다. 이제 어른과 세 친구분들께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욥 어른은 하늘을 보시기 바랍니다. 구름이 얼마나 높이 있습니까? 비록 욥 어른께서 죄를 ㅣㅈ었다고 한들 하나님께 무슨 손해가 가며, 어른의 죄악이 크다고 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을 미치겠습니까? 또 욥 어른께서 의로운 일을 하셨다고 한들 하나님께 무슨 보탬이 되며, 하나님이 어른에게서 얻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욥 어른께서 죄를 지었다고 해도, 어른과 다름없는 사람에게나 손해를 입히며, 욥 어른께서 의로운 일을 했다고 해도, 그것은 다만 사람에게나 영향을 미칠 뿐입니다.]


요즘 저는 새벽기도회 시간에 욥기를 강해하고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욥을 모범적이고 순종적인 신앙인의 모범으로 그립니다만, 사실 그는 매우 끈질기고 때로는 저항적인 사람이기도 합니다. 욥의 세 친구들은 그가 겪는 고통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해석합니다. 고난이 닥쳐오기 전까지만 해도 욥의 생각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고난은 그를 전혀 다른 세계 앞에 세웠습니다. 이전까지 질서정연하던 세상은 갑자기 무질서한 곳이 되었고, 아름답던 세상은 갑자기 추한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부조리한 현실 앞에서, 그가 의지해왔던 삶의 터전은 속절없이 흔들렸습니다. 그는 자기 삶을 돌아봅니다.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흠 없이 살려고 애썼고, 어려움을 겪는 이웃들을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유한한 인생이기에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마음으로도 몸으로도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쓰나미처럼 예고도 없이 다가온 고난은 그의 삶의 모든 것을 휩쓸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죄를 회개하라고 다그쳤지만 그는 자기의 죄를 인정할 수 없었고, 자기에게 닥쳐온 현실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친구들은 욥의 교만을 질타합니다. 고난의 현실이야말로 그의 죄를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는 데도 욥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신학입니다. 이런 논리를 우리 현실에 적용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이주 노동자들, 세계 도처에서 고난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다 하나님께 죄를 지은 사람들이 되는 겁니다. 정말 그런 건가요?

● 공감의 여백이 없는 신학
욥이 세 친구들의 말을 수긍하지 않자, 엘리후라는 젊은이가 나서서 욥을 질타합니다. 그는 인간의 고통은 하나님의 징벌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을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훈계의 수단일 때도 있다고 말합니다.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가 믿는 하나님은 오류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희노애락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 분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가 하시는 일은 다 의롭다고 믿습니다. 대단한 믿음이고 확신입니다만, 뭔가 우리 속에 컬컬한 것이 가시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그의 신학에 인간의 아픔에 대한 공감의 여백이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욥 어른께서 죄를 지었다고 한들
하나님께 무슨 손해가 가며, 어른의 죄악이 크다고 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미치겠습니까?
또 욥 어른께서 의로운 일을 하셨다고 한들
하나님께 무슨 보탬이 되며,
하나님이 어른에게서 얻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6-7)

정말 그런 걸까요? 이런 하나님은 파스칼이 말하는 '철학자의 하나님'이 아닐까요? 원리로서의 하나님 말입니다. 하지만 성서의 하나님은 다릅니다. 인간의 희노애락에 깊이 연루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완결된 존재로서 아무의 영향도 받지 않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들의 기쁨과 슬픔에 주체적으로 동참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물론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인간의 잘못을 준엄하게 꾸짖고, 때로는 거듭되는 인간의 죄 때문에 넌더리를 내기도 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화를 내시다가도 '으이구, 이 불쌍한 것들' 하고 용서해버리시는 분이십니다.

은혜를 뜻하는 그리스어는 '카리스'(charis)인데, 그 뜻은 '기쁨을 주는 것', '친절', '호의' 등입니다. 은혜의 하나님은 호의를 가지고 우리를 대하시는 분이고, 그 때문에 우리 가슴 깊은 곳에 기쁨을 심어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기 위해 스스로 고통을 짊어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집을 나간 탕자를 기다리느라 애태우는 아버지이시고,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온 광야를 헤매다가 찾으면 어깨에 메고 즐거이 돌아오는 목자이십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만일 우리의 드러난 죄와 내밀한 죄를 다 헤아리시고, 거기에 상응하는 벌을 내리신다면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해찰'이라는 단어를 들어보셨습니까? '모든 물건을 이것저것 집적이어 해치는 짓'을 뜻하는 우리말입니다만, 이 말을 좀 쉽게 표현하자면 '한 눈 팔기'라 할 수 있습니다. 산에 올라가다가 계곡 위로 드리운 귀룽나무 그늘이 하도 좋아서 산에 오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그 아래 자리를 잡는 사람을 보고 우리는 '해찰궂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율법 조문에 매여 살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좀 해찰궂은 사람이었을 겁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율법 조문을 들여다보면서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을 가르는 일에 온통 정신을 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다른 세상을 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먹고사는 일이 제일 시급한 사람들에게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고 하시고, 들에 핀 이름 모를 꽃 한 송이에 눈길을 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눈길은 성경이나 탈무드, 미드라쉬를 살피기보다는 씨를 뿌리고 때가 되면 거두어들이는 농부, 고기 잡는 어부, 빵을 만드는 여인, 잃어버린 동전 한 닢을 찾으려고 온 집안을 비질하는 여인들에게 머물고 있습니다. 그 비근한 일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보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삶으로 드러내신 하나님은 손에 돋보기를 들고 누군가의 죄를 꼼꼼히 헤아리는 눈길 가파른 분이 아닙니다.

● 신앙은 진부한 일상 속에서 드러난다
가수 조영남 씨의 어머니는 남편이 중풍으로 자리에 눕자 조그만 집을 마련해 세를 주고, 월세를 받아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든 이 가운데는 가짜 꿀 만드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가끔 그분의 일을 도왔는데, 조청을 저어가며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 하고 찬송을 부르는 어머니가 하도 이상해 보여서 물었습니다.
"엄마는 동네에서 제일 유명한 권사가 어떻게 가짜 꿀 만드는 걸 십 년 동안이나 도와줄 수 있습니까? 맨날 주여주여 하면서……"
그러자 어머니는 숨도 안 쉬고 대답하더랍니다.
"안 그러면 방세가 안 나오잖아."

산다는 건 이렇게 처절한 거지요. 또 재미도 있고요. 우리 삶의 모든 선택에 도덕적인 판단의 잣대를 들이대면, 세상은 참 각박해지지 않을까요? 누가 와서 거짓말을 하면 더러는 알면서도 넘어가 주고, 연속극을 보다가 그 뻔한 이야기에 눈물도 찔끔 흘려보고…. 저는 참 그런 게 약해요. 자칫하면 엘리후처럼 되기 쉬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조영남 씨는 한 사람이 가장 인간답게 보일 때는 극히 보편적인 삶을 살면서도 그 삶이 향기를 품을 때라고 말합니다. 저는 일정 부분 그 말에 공감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다간 이들을 보면서 감동을 느낍니다. 나환자들을 위해 살다가 나환자가 되어 세상을 떠난 몰로카이 섬의 성자 다미앤의 삶이 그렇고, 죽음의 공포 앞에 떨고 있는 동료 죄수들을 대신해 아사(餓死)감옥에 들어가 생을 마친 맥시밀리언 콜베 신부의 생이 그렇고, 최근에 우리의 심금을 울린 최춘선 할아버지의 삶이 그렇습니다. 그런 이들의 생은 거울이 되어 우리를 비추어보게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의 삶이 드러내는 빛에 정신이 팔리다보면, 오늘 진부하기 이를 데 없는 일상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기독교인답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잊기 쉽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순백의 영혼을 가지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어둠과 빛이 혼재해 있고, 추한 욕망과 거룩한 욕망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느 쪽에 더 공을 들이는가가 우리의 생의 질을 결정하는 것이겠지요. 저는 신앙이란 가장 진부해 보이는 삶의 자리에서 드러나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길에서 마주치는 이웃들이나 낯선 사람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나 표정 속에 우리 영혼의 지향이 드러나는 것 아닐까요? 시장에서 만나는 상인들, 음식점의 종업원들, 더 가까이는 우리 가족들이나 직장 동료들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 혹은 우리가 몸 붙여 살고 있는 이 땅에 대한 우리의 태도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란 말입니다.

● 끙끙 앓는 하나님
엘리후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참 단순한 곳입니다. 선과 악이 분명하고, 미와 추가 분명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선한 사람이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악한 사람이 큰소리를 치기도 합니다. 또 선과 악이 두부 모 가르듯 분명하게 갈라지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세상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가지고 세상을 설명합니다. 밭에 난 가라지를 보면서 일꾼들이 주인에게 묻습니다. "우리가 가서 그것들을 뽑아 버릴까요?" 그러자 주인은 대답합니다. "아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가라지와 함께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이 조심스러움, 그리고 누구든지 함부로 대하지 않는 마음이 사랑입니다. 테러리스트들을 제거한다는 미명하에 무고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면서 더 큰 악을 막기 위해서는 그런 정도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이들의 말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말문을 막아버리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억울한 자가 다가가 억울함을 하소연할 수 있는 비빌 언덕이십니다. 세상살이에 지친 자가 찾아가 맘껏 울 수 있는 골방이십니다. 인간의 악다구니를 들으면서도 그의 아픔까지도 헤아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세상의 풍파가 가 닿을 수 없는 저 너머, 절대의 세계에 머물고 계신 분이 아니라 끝없이 우리의 삶 가운데로 개입해 들어오시는 분이십니다. 죄의 파도에 떠밀리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당신의 아들까지 이 세상에 보내신 분이십니다. 시인 최승호는 하나님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끙끙 앓는 하나님
누구보다도 당신이 불쌍합니다
우리가 암덩어리가 아니어야
당신 몸이 거뜬할 텐데

피둥피둥 회충떼처럼 불어나며
이리저리 힘차게 회오리치는
온몸이 혓바닥뿐인 벌건 욕망들
―<몸> 전문

느껴지십니까? 하나님은 욕망에 따라 춤을 추는 우리들 때문에 끙끙 앓고 계십니다. 우리가 앓을 병을 대신 앓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런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하나님의 아픔을 덜어드리기 위해 자기의 삶을 단정하게 바로 잡아가는 과정입니다. 이 사순절 순례의 기간 동안 우리를 위해 지금도 십자가를 지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만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5년 03월 13일 14시 06분 36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