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3. 해가 막 돋은 때
설교자 김기석
본문 막 16:1-8
설교일시 2005/03/27
오디오파일 s050327.mp3 [3408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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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막 돋은 때
막16:1-8
(2005/3/27, 부활절)

[안식일이 지나니,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가서 예수께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그래서 이레의 첫날 새벽, 해가 막 돋을 때에, 무덤으로 갔다. 그들은 "누가 우리를 위하여 그 돌을 무덤 입구에서 굴려내 주겠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그런데 눈을 들어서 보니, 그 돌덩이는 이미 굴려져 있었다. 그 돌은 엄청나게 컸다. 그 여자들은 무덤 안으로 들어가서, 웬 젊은 남자가 흰옷을 입고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몹시 놀랐다. 그가 여자들에게 말하였다. "놀라지 마십시오. 그대들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나사렛 사람 예수를 찾고 있습니다만, 그는 살아나셨습니다.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그를 안장했던 곳입니다. 그러니 그대들은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십시오. 그는 그들보다 앞서서 갈릴리로 가십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들은 거기에서 그를 볼 것이라고 하십시오." 그들은 뛰쳐나와서, 무덤에서 도망하였다. 그들은 벌벌 떨며 넋을 잃었던 것이다. 그들은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못하였다.]

● 예기치 않은 소식
이레의 첫날 새벽, 해가 막 돋은 때에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세 여인이 예수님이 묻힌 무덤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였습니다. 친구들의 조사도 만장도 없이 볼품없이 돌무덤에 묻힌 예수님의 시신에 향료를 발라 드리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더는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없고, 온화하면서도 맑게 빛났던 그분의 눈빛을 바라볼 수 없고, 태산처럼 고요하게 앉아 계시던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슬픔이 여인들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로 내려앉았던 것입니다. 갑작스런 스승의 죽음에 당황한 제자들은 끈 떨어진 연처럼 절망의 나락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지만, 머리로 주님을 이해하고 따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세포 하나하나의 떨림으로 느꼈던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신이라도 곱게 수습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길을 가면서도 여인들은 깊은 침묵 속에 있었을 것입니다. 말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들은 심정으로 이미 하나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윽고 무덤이 가까웠을 때 한 여인이 말합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그 돌'을 무덤 어귀에서 굴려내 줄까요?" 주님에 대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은 이미 돌문을 넘어 예수님의 시신을 어루만지고 있지만, 무덤을 막은 그 무거운 돌문을 굴릴 육체적 힘이 그들에게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놀라운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 돌덩이는 '이미' 굴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여인들은 어리둥절해졌지만 주저치 않고 무덤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들은 웬 젊은 남자가 흰 옷을 입고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몹시 놀랐습니다. 그런데 그가 말했습니다.

놀라지 마시오. 그대들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나사렛 사람 예수를 찾고 있지만, 그는 살아나셨소.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소. 보시오, 그를 안장했던 곳이요. 그러니 그대들은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그는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니,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들은 거기에서 그를 볼 것이라고 하시오.(6-7)

여인들은 얼이 빠질 만큼 놀라서 무덤에서 뛰쳐나와 도망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의아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주님을 그렇게도 사랑했던 여인들이건만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에 왜 그렇게 놀라는지요? 그것은 전혀 예기치 못한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최초의 충격이 지나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서야 사람들은 부활이 환상이 아니라 현실임을 알았습니다.

십자가 처형이 주님의 삶에 대한 세상의 '아니요'(부정)였다면, 부활은 주님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예'(긍정)입니다. 일찍이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다"(55:8)고 하셨습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건축자들이 버린 돌처럼 버렸지만, 하나님은 그를 영원한 생명 나라의 주춧돌로 세우셨습니다. 절묘한 역전승입니다.

● 그 돌덩이는 이미 굴려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받들기 위해 자기를 버리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도 우리처럼 죽음의 현실을 피하고 싶었던 보통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눈물의 기도가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의 고독한 절규가 그것을 말해줍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의 쓴잔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셨습니다. 부활은 이런 고통과 고뇌와 죽음 이후에 오는 것입니다. 죽지 않고는 부활도 없습니다.

주님은 며칠 후면 부활할 것을 알고 십자가를 지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십자가의 비장함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통, 절대적인 고독,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께 당신의 영혼을 맡기는 그 과정은 연기가 아니라 현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부활의 소식은 예기치 않은 소식이고, 기쁜 소식이고,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소식입니다. 이제 우리는 압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살다가 어려운 일을 겪을 수도 있지만, 그 어려움이야말로 우리를 하나님의 가슴에 각인하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겪어내야 하는 고통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고통은 오히려 하나님과 우리의 결속을 굳게 해줍니다. 고통이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의 영적 자유를 빼앗아갈 수는 없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이미 승리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난감한 현실을 만납니다. 도무지 문제를 풀어갈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아 막막해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속에 사랑이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서 있다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돌덩이'는 이미 굴려졌습니다. 가까운 이들의 마음이 꽁꽁 얼어붙은 것 같아 울고 계십니까? 잊지 마십시오. 주님은 이미 그 문을 녹이셨습니다.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 때문에 낙심하고 계십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이미 그 문제를 풀고 계십니다. 우리가 사랑을 가지고, 용기를 가지고 문제에 직면하면 해결의 길이 보일 것입니다.

● 빛은 땀흘림의 대가
하나님의 사자는 우리에게 주님을 만날 곳이 어디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곳은 갈릴리입니다. 제자들과 주님이 함께 땀흘리던 곳, 사랑으로 사람들을 돌보던 곳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신학이라는 무덤을 찾아갑니다. 교리의 무덤을 찾아갑니다. 수백 억을 들여 화려하게 지은 교회를 찾아갑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 어디로 향하고 계실까요?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식사를 거르는 아이들과 노인들이 있는 곳, 가출청소년들과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는 쪽방촌, 전쟁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곳…바로 그곳이야말로 주님이 머무시는 곳이며, 우리가 주님을 만나 뵐 곳입니다.

지금 미국에서는 15년 동안 식물인간 상태에 있는 쉬아보(Schiavo)라는 여인에게 음식물을 공급했던 튜브를 제거하는 문제를 놓고 종교인들 사이의 논쟁이 뜨겁습니다. 논점은 '인위적인 영양공급을 음식으로 볼 것이냐 의약품으로 볼 것이냐'입니다. 저는 에 나온 그 기사를 보면서 묘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식물인간 상태로 살아온 한 사람의 생명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는 그 사람들이, 무고한 수많은 생명들을 죽이고 또 죽음으로 내모는 자국의 정치적 선택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물론 쉬아보 여인의 문제는 심각하게 다루어져야 합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또 다른 현실에 대해서도 눈을 감으면 안 됩니다.

부활의 빛이 온 누리에 비치고 있습니다. 부활의 해가 막 돋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일어나 일해야 할 차례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당신의 손과 발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아픔이 있는 모든 곳에 갈 수도 없고, 모든 일에 뛰어들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요구가 있을 때 응답할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곁에 살고 있는 이웃들의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한 걸음 더 그들 곁에 다가가고, 몸을 낮추어 그들의 심정을 헤아리고, 그들의 벗이 되려고 시간을 낼 수는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그곳에서 주님의 미소와 만나게 될 것입니다. 며칠 전 후배 목사로부터 부활절 카드를 받았습니다. 그 카드에는 이런 이야기가 담겨있었습니다.

어제 밤에 교회 앞에서 구두를 닦았습니다. 말 못하는 아저씨가 얼마나 땀나게 닦는지 시간을 재어보니 5분 30초, 손길도 1천 번 이상 가는 것 같아요. 2,500원이 아깝지 않아 3,000원을 드리고 왔습니다. 내가 남을 위해 5분 30초 동안, 저런 행복을 줄 수 있을까 하고 물어 봅니다. 광(光)은 땀흘림의 대가임을 눈앞에서 보았네요.

막 돋은 부활의 해가 더욱 밝게 빛나게 하기 위해서는 땀을 흘려야 합니다. 빛은 땀흘림의 대가이니 말입니다. 이 부활절에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에, 그리고 우리들 공동의 삶의 터에 부활의 빛이 환하게 비쳐들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5년 03월 29일 18시 50분 29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