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4. 지금은 우리가 인류
설교자 김기석
본문 약 1:22-27
설교일시 2005/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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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우리가 인류
약1:22-27
(2005/4/3)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저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얼굴을 거울 속으로 들여다보기만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모습을 보고 떠나가서 그것이 어떠한지를 곧 잊어버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완전한 율법 곧 자유를 주는 율법을 잘 살피고 끊임없이 그대로 사는 사람은, 율법을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가 행한 일에 복을 받을 것입니다. 누가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혀를 다스리지 않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신앙은 헛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 一以貫之
기독교 신앙의 알파와 오메가는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십자가가 죽음이라면 부활은 생명입니다. 결국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이 열렸음을 믿는 종교입니다. 주님께서 지셨던 십자가가 멸망당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얻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꿈을 자기의 꿈으로 삼은 사람들입니다. 맞지요? 꿈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늙는다는 것은 꿈을 잃어버린다는 말과 같습니다. 아무 것도 기대할 것도 없는 사람, 봄이 되어도 가슴이 설레지 않고, 가을이 되어도 마음이 쓸쓸하지 않은 사람, 그는 도사이거나 정신적인 늙은이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현실을 이겨낼 수 있는 것도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꿈은 우리 삶의 모든 경험을 하나로 꿰어주는 실입니다.

공자가 자공에게 물었습니다. "賜야, 너는 내가 많이 배우고 그것을 기억하는 자라고 여기느냐?" 그러자 자공은 "그렇습니다. 아닙니까?" 하고 반문합니다. 그러자 스승은 "아니다. 나는 하나의 이치로써 모든 사물을 꿰뚫은 것(一以貫之)"이라고 대답합니다(論語, 衛靈公 第二). 공자에게 있어서 그 하나의 이치는 '어짊'(仁)일 것입니다. 스승은 모르는 게 없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자기의 본분을 잃지 않고, 자기의 중심을 잃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에게 그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실현되는 세계에 대한 꿈이 예수님을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주님과 만난 사람들은 다 변화되었습니다. 병자가 낫고, 귀신 들린 사람이 온전케 되고, 자포자기적으로 살던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되찾았습니다. 봄 햇살에 만물이 깨어나듯이 예수님과 만난 사람들은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되살아났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그에게 안겨 준 것은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나라의 꿈에 대한 정지명령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꿈이 끝난 것처럼 보이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꿈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이 부활사건입니다.

● 들음과 행함 사이의 거리
기독교인은 예수님처럼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부활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꾸는 꿈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삶으로 하나님 나라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기 위해 땀흘려야 합니다. 야고보는 이것을 아주 간명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22)

신앙생활의 요체는 들음과 행함 사이의 거리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보면 너무 많은 정보에 휩싸여 살아갑니다. 텔레비전만 켜면 언제든 유명한 설교가들의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이전보다 더 맑고 따뜻해졌나요?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말씀은 손과 발의 언어로 번역될 때 살아있는 말씀이 됩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은 하인들에게 항아리 아구까지 채운 물을 "떠다가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요2:8)고 하셨습니다. 하인들이 그 말씀에 순종했을 때 그 잔칫집에는 기쁨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하인들의 순종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말씀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많이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 말씀이라도 정성스럽게 삶으로 번역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대개의 경우 우리의 귓전에만 맴돌다 사라지곤 합니다. 허비되는 말씀이 너무 많습니다. 말씀을 듣고도 손과 발의 언어로 번역하지 못하는 일을 두고서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23-4)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다. 거울을 보기 이전과 이후가 똑같다면 거울을 보는 보람이 무엇이겠습니까? 거울을 보고 이에 낀 고춧가루도 빼내고, 헝클어진 머리도 새로 빗고, 굳어진 표정도 부드럽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앙생활이란 이처럼 자기 변혁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 마음을 비춰보면서 부끄럽고 추한 일들을 조금씩 닦아나가는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말은 좀 덜하고 실행에는 민첩해야 하겠지요?

● 경건의 두 양상
26절이 말하는 '경건'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을 섬긴다'는 평범한 말로 바꿔 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첫째는 자기 혀에 단단히 재갈을 물리는 사람입니다. 그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기분 내키는 대로 말하지 않습니다. 살리는 말이 있고, 죽이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한다', '난 널 믿는다', '고맙다'는 말은 살리는 말이고, '난 네가 싫어', '네가 그렇지 뭐', '실망했다'는 말은 죽이는 말입니다. 성도의 말은 살리는 말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히브리인들은 다바르(Dabhar)라고 합니다. 다바르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창조의 에너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습니다. '땅은 채소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장황하지 않습니다. 성도의 말도 그러해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사람은 '자기 기만'에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 남이 나를 속이는 것도 문제이지만, 자기 스스로에게 속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우리는 종종 자기 행동에 도덕적인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끌어오기도 합니다. 운전자들이 흔히 하는 말로 내가 하면 차선 변경이고 남이 하면 끼어 들기라는 거지요. 어려운 이들을 돕지 않는 까닭은 그들에게 의존하는 버릇이 들까봐 그렇다고 말합니다. 사실은 그들의 삶에 연루되기 싫고, 누군가를 돕기 위해 감당할 불편함이 싫어서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자기 기만이야말로 영적인 발전의 걸림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맑고 투명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이 그를 거울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전에 영남 사람들은 "이원익은 속일 수는 있지만 차마 속이지 못하겠고(可欺而不忍欺), 유성룡은 속이고 싶어도 속일 수가 없다(欲欺而不可欺)"고 비교하여 말했다고 합니다. 그 앞에 서면 속이려고 마음먹었던 자체가 부끄러워지는 사람, 그래서 거울에 비추듯 깜짝 놀라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사람, 이런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사람답다고 하겠습니다. 가야 할 길이 참 멀지요? 하지만 그런 목표가 있기에 행복한 것도 사실입니다.

혀에 재갈을 물리고 자기 기만을 경계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내적 태도라면, 다른 이들과 섞여살아가는 삶에서는 경건이 어떻게 표현되어야 할까요? 야고보는 그것을 매우 세속적인 방식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27)

세속에 물들지 않아야 한다는 말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과 동일시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라는 명제가 성립됩니다. 섬김과 돌봄이 어떻게 일치될 수 있을까요? 재미있는 것은 '섬길 事'가 '일 事'와 같은 글자라는 사실입니다. 섬기면 섬기는 대상을 위해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이란 무엇입니까? 생명을 돌보는 일입니다. 연약해진 생명을 북돋워 일으키고, 일그러진 생명을 온전케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어려운 이들을 돕는 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일임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우리는 가끔 어려운 이들을 만나지만, 그들을 외면할 때가 많습니다. 그를 돕는 것이 '나'의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불편해지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잘 돌보지 않는 전문가들과 국가를 비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돌보고 사는 데 꼭 전문가가 필요한 것일까요? 문제는 도와줄 수단이 없는 것이 아니라, 도와줄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우리 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 돌봄과 섬김의 일치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책은 참 난해합니다. 누군지도 모르고, 언제 온다는 기약조차 없는 고도(Godot)를 기다리는 두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막연히 기다립니다. 기다림의 시간이 너무 지루해서 쓸데없는 말장난을 해보기도 하고, 신을 벗으려고 애를 써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나무에 목을 맬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느 순간 "살려달라"는 외침을 듣습니다. 앞을 못 보는 포조라는 인물의 외침인데, 그 소리를 듣고 두 사람 가운데 하나인 블라디미르는 고민을 하다가 에스트라공에게 말합니다.

공연한 얘기로 시간만 허비하겠다. (사이. 열띤 소리로) 자, 기회가 왔으니 그 동안에 무엇이든 하자. 우리 같은 놈들을 필요로 하는 일이 항상 있는 건 아니니까. 솔직히 지금 꼭 우리보고 해달라는 것도 아니잖아. 다른 놈들이라도 우리만큼은 해낼 수 있을 테니까. 우리보다 더 잘할 수도 있을걸. 방금 들은 살려달라는 소리는 인류 전체에게 한 말일 거야.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엔 우리들뿐이니 싫건 좋건 그 인간이 우리란 말이다. 그러니 너무 늦기 전에 그 기회를 이용해야 해. 불행히도 인간으로 태어난 바에야 이번 한 번만이라도 의젓하게 인간이란 종족의 대표가 돼보자는 거다.(베케트, 133쪽)

살려달라는 포조의 외침은 특정한 대상을 향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 대상은 동물이 아닌 사람일 테니까 인류를 향한 외침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것은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둘뿐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싫건 좋건 인류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이지요. 쓰러진 사람 앞에 그들은 인류의 대표로 서있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베케트가 암시하는 희망을 봅니다. 그는 삶의 무의미함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누군가를 돌보는 데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사람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누구를 돌보기 위해 땀을 흘리고 있을 때입니다. 진정한 경건은 돌봄으로 표현됩니다. 그런 돌봄이야말로 하나님에 대한 섬김이고요.

부활절 이후의 삶의 특색은 기쁨입니다. 진정한 기쁨은 내가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주는 데 있습니다. 이게 인간됨의 근본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는 인류의 대표로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부심을 가지고 누군가를 돌보며 살다보면 어느 결에 우리 속에 기쁨의 샘물이 흐르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봄날, 졸졸 흐르는 시냇물이 만물을 기르는 것처럼 우리 속에 흐르는 생명의 샘물로 세상을 살리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5년 04월 03일 13시 57분 5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