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5. 너무나 인간적인
설교자 김기석
본문 막 5:25-34
설교일시 2005/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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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인간적인
마가 5:25-34
(2005/4/10)

[그런데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아 온 여자가 있었다. 여러 의사에게 보이면서, 고생도 많이 하고, 재산도 다 없앴으나, 아무 효력이 없었고, 상태는 더 악화되었다. 이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서, 뒤에서 무리 가운데로 끼여 들어와서는, 예수의 옷에 손을 대었다. (그 여자는 "내가 그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나을 터인데!" 하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곧 출혈의 근원이 마르니, 그 여자는 몸이 나은 것을 느꼈다. 예수께서는 곧 자기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을 몸으로 느끼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아서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예수께 "무리가 선생님을 에워싸고 떠밀고 있는 데, 누가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십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렇게 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였다. 그 여자는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므로, 두려워하여 떨면서, 예수께로 나아와 엎드려서 사실대로 다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안심하고 가거라. 그리고 이 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하여라."]

● 영웅 만들기
가톨릭교회의 수장인 교황 요한 바오로Ⅱ세의 장례로 온 세상이 떠들썩한 한 주간이었습니다. 그는 "나는 행복합니다. 울지 말고 기도합시다"라고 말한 뒤, 순례자들이 모여 있는 성 바오로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창문 쪽을 응시한 뒤에 온 힘을 모아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아멘" 하고 말을 마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신문들은 앞다투어 "나는 행복합니다. 당신들도 행복하기를"이라는 말을 타이틀로 삼았습니다. 그가 했다는 마지막 말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파킨슨병으로 말미암은 호흡곤란과 패혈증까지 겹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는 사람이 한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거의 의식불명 속에 있었던 교황이 정말로 그런 말을 했을까 의구심이 든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는 교황의 주치의였던 레나토 부조네티 박사가 그의 마지막 순간에 대해 새로운 증언을 했습니다. 교황의 마지막 며칠간은 전혀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위중했고,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침묵을 강요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다만 "교황은 위대한 인간의 고결함으로 그 모든 고통을 참아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어느 쪽이 진실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는 우리 시대가 참 궁핍한 시대임을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와는 뭔가 다른 사람을 보고 싶어합니다. 오랜 성인 숭배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서양사람들은 더 한 것 같습니다. 교황의 시신을 보기 위해 수 백만 명의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을 보고 좀 놀랐습니다. 비판적인 언론들은 그것을 교황의 장례를 드라마틱하게 만든 바티칸의 작품이라고 말합니다. 진실이 무엇이든 분명한 사실은 합리성을 중시하는 현대인들도 어떤 신화적 표상에 집착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사람 속에는 세속적인 것들로는 채울 수 없는 허전함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은 숭배할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할리우드 영화는 영웅 만들기에 열심입니다. 영화 속에서 그려지는 영웅들은 초인적인 인내와 불굴의 용기로 역경을 극복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얻습니다.

그런데 종교는 그런 영웅 신화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무덤조차 없이 세상을 떠난 모세를 보십시오. 묻힐 곳이 없어 남의 무덤을 빌어 안장되었던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의 인물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탈속한 경지에서 유유자적하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죽음의 허구렁을 바라보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품었던 사람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감동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보여주는 초인적인 태도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처럼 인간적 고뇌를 겪으면서도 끝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기를 바치는 헌신 때문입니다. 제가 예수님을 좋아하는 것은 그분이 너무나 인간적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 기쁨을 넘어선 외경심
막스 에른스트라는 화가의 그림 중에는 <세 사람이 보는 앞에서 어린 예수를 징계하는 젊은 아낙>(Die Jungfrau z chtigt das Jesuskind vor drei Zeugen)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무엇 때문인지 몹시 화가 난 여인이 벌거벗은 아이를 무릎에 올려놓고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내리치려 하고 있습니다. 아이의 엉덩이에는 벌써 벌건 자국이 나 있습니다. 창 밖에 있는 세 사람은 짐짓 모른 척하며 다른 데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경건한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들었겠지만, 화가는 예수도 어린 시절이 있었고,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행착오를 겪으며 성장했음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보더라도 주님은 가련한 사람들을 보면 불쌍히 여기시고 때로는 눈물을 흘리기도 하셨습니다. 하지만 위선적인 사람에 대해서는 폭풍처럼 질타하셨고, 타락한 종교에 대해서는 사자처럼 무섭게 화를 내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당신을 향해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를 보면서 애절하게 기도하시는 주님의 모습은 또 얼마나 인간적입니까?

주님은 온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사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큰 일에만 매달려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에 소홀한 분이 아니셨습니다. 주님은 사람을 만나도 건성으로 만나시는 법이 없었습니다. 문제를 가지고 당신께 나온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양 여기셨습니다.

열 두 해나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병을 고쳐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해보았지만 그의 병은 깊어만 갔습니다. 재산도 물론 다 없애고 말았습니다. 도무지 희망이라고는 없었습니다. 죽지 못해 사는 치욕의 세월을 보내고 있던 여인에게 예수님은 한 가닥 희망이었습니다. 여인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기 위해 그의 집으로 가고 있던 예수님의 뒤로 다가가 가만히 주님의 옷자락을 만집니다. 그녀의 내면에 차 오른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이것은 경험적인 판단도 아니고, 이성적인 판단도 아닙니다. 직감적 판단일 뿐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인은 자기 내면에 차 오른 확신에 따라 행동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몸에 변화가 생긴 것을 즉시 깨달았습니다. 병 나은 기쁨도 컸겠지만, 여인이 느낀 것은 외경심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호렙산 떨기나무 앞에서 모세가 느꼈던 감정이었을 테고,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가 느꼈던 감정이었을 것입니다.

아무도 그곳에서 벌어진 사건을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오직 두 사람만은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발걸음을 멈추시고 사람들을 돌아보며 물으십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참 생뚱같은 말씀입니다. 온통 야이로의 딸의 병세에 마음을 빼앗겨 조급한 제자들의 말이 퉁명스럽습니다.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으냐 물으시나이까?" 하지만 주님은 그들의 바쁜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으시며 사람들을 가만히 둘러봅니다. 그러자 여인이 주님 앞에 나와 엎드립니다. 그리고 저간의 모든 사정을 주님께 아룁니다. 여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으신 주님은 여인에게 복을 빌어줍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찌어다.

주님은 여인을 '딸'이라고 다정하게 부르고 계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 관습을 넘어
첫째는 예수님께서 여인의 행동을 믿음으로 인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정결법을 중시하는 유대인들에게 여인의 행동은 매우 부정한 행동이었습니다. 율법은 몸에서 피가 흐르거나 고름이 흐르는 사람은 물론이고 그와 접촉하는 사물과 사람들은 다 부정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인의 행동은 예수님을 부정하게 만든 셈입니다. 만일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가 그런 일을 당했다면 그들은 불같이 화를 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에게 제의적 불결을 옮긴 여인의 모험적인 행동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계십니다. 주님께 중요한 것은 제의적 정결이 아니라, 고통받는 사람이 온전해지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관습의 울타리를 뛰어넘는 새로운 믿음의 본보기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중에 주님은 이미 죽은 야이로의 딸을 손을 잡아 일으키십니다. 시체를 만지면 안 된다는 제의적 금기를 깨뜨림으로써 생명의 기적을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도에 짓눌려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는 사람들의 숨구멍이 되어주셨고, 스스로 걸레가 되셔서 세상의 더러움을 닦아내셨습니다. 작년에 세상을 떠난 후배 목사는 십자가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너무 추상적으로, 혹은 교리적으로, 신학적으로만 생각한다. 십자가는 문자 속에, 신학 속에, 교리 속에 있지 않고 우리의 삶 속에 있어 우리가 언제든지 손에 쥐고 닦아야 하는 걸레인지도 모른다. 예수께서 자신의 생명을 다 바쳐 짊어지고 세상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신 십자가, 그것은 바로 오늘 내 손에 들려진 걸레이다.](채희동, <<걸레질하시는 예수>> 중에서)

둘째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여인을 향한 주님의 '구원 선언'입니다.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댐으로써 혈루가 멈추게 되었을 때, 성경은 그녀가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고 "그녀의 병이 나았다"고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여인이 주님 앞에 나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다 이야기했을 때 주님은 여인에게 구원을 선언하고 계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여인의 간절한 소망은 육체의 회복을 가져왔고, 예수님과의 대면은 구원을 가져왔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땅의 인력에 속절없이 끌려가기를 멈추었다는 뜻일 겁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의 유혹으로부터 해방된 사람이 된다는 것, 과거에 대한 집착에서 놓여나고,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에서 벗어나고, 매 순간 우리 가운데서 기적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산다는 것, 이보다 멋진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분'(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이십니다. 우리가 가까이 접근할 수도 없을 만큼 멀리 계신 분이 아닙니다. 금빛의 성의를 입고 至高의 자리에 앉아 계신 분이 아니라 지금 남모르는 고통과 번민으로 시달리는 사람들이 다가와 당신의 옷자락을 만지는 것을 '믿음'으로 여겨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과 만나려는 간절함이 있다면 우리는 생의 문제로부터 해방될 것이고, 구원의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화려한 성의를 입은 사람들 말고, 걸레를 들고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닦아내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야말로 주님이 계신 곳입니다. 너무나 소박하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 확신을 가지고 세상에 나아가 주님의 손과 발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5년 04월 10일 14시 01분 56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