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6. 순리대로 살라
설교자 김기석
본문 갈5:13-18
설교일시 2005/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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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리대로 살라
갈5:13-18
(2005/4/17)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한 마디 말씀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고 하면, 피차 멸망하고 말 터이니, 조심하십시오. 내가 또 말합니다. 여러분은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시는 대로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체의 욕망을 채우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이 바라시는 것은 육체를 거스릅니다. 이 둘이 서로 적대관계에 있으므로,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면, 율법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 생명의 본질
갈라디아서의 주제는 자유입니다. '자유'의 사전적 정의는 "남에게 구속을 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제 마음대로 행동함" 혹은 "남으로부터 규정·구속·강제·지배를 받지 않는 일"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만난 바울은 자신의 삶이 율법의 강제와 지배 속에서 살아온 삶이었음을 절감했습니다. 그는 그 율법 너머의 세계를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그는 율법조문이라는 좁은 세계에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그의 눈에서 비늘을 벗겨내시자 그의 눈앞에 전혀 새로운 세상이 열렸습니다. 무엇을 해도 늘 답답하기만 했던 가슴이 툭 터지는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늘 율법의 감시 아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살던 그가 이제는 새처럼 자유롭게 날아오르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과 만난 사람들은 다 이런 자유를 경험합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참 가슴 떨리는 말씀입니다.

진리 안에 있는 사람 이미 자유인이고, 또한 진실한 사람입니다. 진실은 참의 열매입니다. 참은 스스로 당당한 것이기에, 참된 사람은 아무 것도 거리낄 게 없습니다. 숨겨야 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영을 마음에 모신 사람은 자유인입니다. 그는 막힌 데 없이 시원합니다. 사소한 것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문제삼지 않습니다. 남과 자기를 비교하면서 으쓱거리지도 않고 움츠러들지도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는 곳에는 평화가 있습니다. 하지만 참다운 자유를 알지 못하는 이들이 있는 곳에는 다툼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구에 모여들어 썩은 생선을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는 <<갈매기의 꿈>>에 나오는 여느 갈매기들을 닮았습니다.

생명의 본질은 서로를 받쳐주고 일으켜주는 것입니다. 운동 경기를 보면서 우리가 감동하는 것은 치열한 경기를 치르면서도 넘어준 상대를 일으켜주는 모습 때문입니다. 여러 해 전에 일본의 유도선수 하나가 올림픽 결승에서 상대 선수의 부상부위를 끝끝내 공격하지 않아서 스포츠 정신의 정수를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결국 그는 경기에서 이겼지만, 그는 무엇보다도 무도인의 아름다움을 보여준 사람으로 존경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기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씁쓸한 것은 그것이 자기의 본질에 대한 배신이기 때문일 겁니다.

● 마르지 않는 샘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얻은 사람은 자기 좋을 대로 살지 않습니다. 그는 남을 배려합니다. 그는 아무 것에도 매이지 않지만, 다른 이들을 위해 자기 자유를 기꺼이 유보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자유는 사랑이라는 빛깔로 채색되어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9장에서 '종이 되는 자유'를 말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권면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힘이 없어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누군가의 뜻을 따라야 할 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굴욕감입니다. 하지만 사랑 때문에 스스로 종노릇할 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기쁨입니다. 칭얼대는 손자를 업어주기 위해 무릎을 굽히는 할머니는 굴욕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만해 한용운의 <복종服從>이라는 시를 들어보셨지요?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주님 안에서 누리는 자유의 본 모습입니다. 바울 사도는 율법 전체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는 말씀이 된다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613개로 분류합니다. 그 중에서 "∼ 하라"의 형태로 된 계명이 248개이고, "∼ 하지 말라"의 형태로 된 것이 365개입니다. 248이라는 수는 사람 몸을 이루고 있는 부분의 합이랍니다. 짐작하시겠지만 365는 일년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613개의 율법 조문은 하루하루 온몸과 마음을 다해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일찍이 주님도 율법의 정신을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는 말로 요약하셨습니다. 바울은 그 말씀을 가슴 깊이 받아들이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우리 속에 있는 사랑의 샘물이 말라 있다면 사랑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복음성가의 노랫말처럼 "사랑을 줄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은 없습니다. 저절로 되는 사랑이 가장 좋겠지만, 아직 거기에 이르지 못했다면 '하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노력하는 겁니다. 사랑의 샘물은 퍼내면 퍼낼수록 더욱 고이게 마련입니다. 무거운 짐을 싣고 험한 길을 달린 수레보다 세워둔 수레가 더 빨리 망가진다지요? 사랑도 훈련인 것입니다. 하지만 더욱 근본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의 샘에 우리 삶의 뿌리를 박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샘은 마르지 않는 샘입니다. 주님은 우리 속에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을 모신 사람은 하늘의 샘을 자기 속에 마련한 사람입니다.

● 순리를 따르는 삶
그러면 우리가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해야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꾸 네 편 내 편을 가릅니다. 편가르기에 익숙한 사람들은 순리를 따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학연·지연·혈연의 울타리를 치고 다른 이들의 접근을 막습니다. 그렇기에 그런 이들이 있는 곳에서는 늘 시끄러운 소리가 나게 마련입니다. '理'에 '順' 하는 것이 순리입니다. '리'는 본래 옥(玉)에 있는 자연스런 무늬의 결을 일컫는 거랍니다. 옥의 결은 엉킨 곳이 없이 자연의 모습대로 질서정연합니다. 순리대로 살면 무리가 없습니다.

사람이 순리대로 살지 못하는 까닭은 욕심 때문입니다. 남보다 더 가질 욕심, 남보다 앞설 욕심…이런 욕심이 사람들이 사는 마을을 어지럽게 만듭니다. 그들은 쓸 데 없는 분란을 일으킵니다. 바울 사도는 그런 이들을 가리켜 "육체의 소욕을 따르는 자"라고 말하면서,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좀 덜 가지면 어떻습니까? 남들보다 조금 늦게 가면 어떻습니까? 좀 느긋하게 생각하면 나도 편하고 남도 편해지는 데, 순리를 따르지 않으려는 사람들 때문에 공동체의 아름다움이 파괴됩니다. 순리를 따르는 사람은 품이 넓습니다.

제가 지난주에 신앙집회를 인도하러 갔던 화천제일교회의 최헌영 목사는 참 듬직한 사람입니다. 선후배들에게 두루 존경받는 목회자입니다. 무뚝뚝한 듯하지만, 정이 깊은 사람입니다. 그는 들떠있지 않아 사람들에게 안정감을 줍니다. 그의 차를 타고 우리 교회가 도왔던 부촌교회를 방문하는 중이었는데, 차창 밖으로 보이는 어느 마을을 가리키면서 "저기가 제 고향이에요" 하고 말했습니다. 물끄러미 그 마을을 바라보고 있는 데 최목사가 감회가 새로운 듯 짓궂었던 자기의 어린 시절을 회고했습니다. 가끔 미친 여자가 동네에 나타날 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때면 동네 꼬마들이 모두 몰려나와 돌을 던지거나 치마를 들추곤 했습니다. 그날도 짓궂은 짓을 하고 집으로 달려들어가 엄마에게 외쳤습니다. "엄마, 미친년이 왔어요." 어머니는 차분하게 어린 아들을 옆에 앉힌 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모가 오기로 했는데, 그 사람인가 보다. 가서 데리고 오너라." 이모가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어머니의 어조는 단호했습니다. 어린 악동은 죽기보다 싫었지만, 어머니의 진지한 표정에 밀려 징징 울면서 그 여자에게 다가가서 말했습니다. "엄마가 빨리 집으로 오래요!" 그 이모라는 여자를 집에 데려오자 어머니는 물을 데워 목욕을 시키고, 어머니의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혔습니다. 그리고 더운밥을 지어 먹였습니다. 어린 악동은 그 여자가 진짜 이모가 아니라는 사실을 진작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이 있은 후에는 미친 여자가 마을에 나타나도 감히 놀려댈 수 없었습니다. 품 넓은 어머니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자랐기에 최목사는 좋은 목사가 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 성령의 불꽃
몸에서 시궁창 냄새가 나는 사람을 동생이라 부르며, 그를 목욕시키고 옷을 갈아 입히고 식구들과 한 상에서 밥을 대접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저는 그것이야말로 '성령을 좇아 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마음이 되어 세상과 만나게 하십니다. 성령은 막혀 있는 것을 뚫어 통하게 만듭니다. 성령이 임하면 죄인도 원수도 친구로 변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마음이 넉넉해서 누구를 보아도 가파른 눈길로 보지 않습니다. 자기 척도로 사람을 재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사람을 등급 매기는 일도 없습니다. 그가 있는 곳에는 치유가 일어나고 화해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가 있는 곳에는 가식 없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그리고 성스러울 수 있는지를 삶으로 보여줍니다.

하지만 성령의 불꽃이 우리 속에서 활활 타오를 때도 있지만, 가물가물 꺼져 갈 때도 있습니다. 그때가 바로 신앙의 어둔 밤입니다. 믿음도 식어가고, 늘 하던 봉사활동도 신명이 나지 않고, 사람들도 예뻐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성령의 불꽃을 소멸시키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불씨를 잘 간직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던 옛 사람들처럼, 지극한 정성으로 마음을 지켜야 육체의 욕망에 끌려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독사나 전갈에게 물리면 해독제를 맞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해독제는 바로 뱀과 전갈의 독을 가지고 만드는 것입니다. 독으로써 독을 다스리는 것(以毒除毒)이지요. 삶이 힘겨울수록 성령의 불꽃을 꺼뜨리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정성을 다하다보면 삶의 고통은 봄눈 녹듯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하나되어 살아가도록 하는 성령의 능력이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 교회 위에 늘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5년 04월 17일 15시 37분 48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