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7. 무엇을 보셨습니까?
설교자 김기석
본문 창 1:9-13
설교일시 2005/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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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보셨습니까?
창1:9-13
(2005/4/24)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하늘 아래에 있는 물은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은 드러나거라" 하시니, 그래도 되었다.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고 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고 하셨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땅은 푸른 움을 돋아나게 하여라. 씨를 맺는 식물과 씨 있는 열매를 맺는 나무가 그 종류대로 땅 위에서 돋아나게 하여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땅은 푸른 움을 돋아나게 하고, 씨를 맺는 식물을 그 종류대로 나게 하고, 씨 있는 열매를 맺는 나무를 그 종류대로 돋아나게 하였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사흗날이 지났다.]

● 곡우 무렵
지금 우리는 곡우穀雨 무렵을 지나고 있습니다. 건조주의보가 내린 상태이긴 하지만, 지금이야말로 일년 중 가장 생명력이 왕성한 시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봄날이 따뜻하여 만물이 저마다의 생명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물오른 나무들은 하루가 다르게 자랍니다. 교회 마당에 얼마 전에 심은 오가피나무에도 싹이 움텄고, 지난 겨울 개구쟁이들에게 가지를 꺾이는 수모를 겪었던 청매실나무에도 새싹이 나왔습니다. 생명의 저력이 참 놀랍습니다. 사람은 사는 게 힘들다고 투덜거리기도 하지만, 각종 식물들은 최악의 조건 속에서도 봄 햇살을 받으면 어김없이 각자의 모습으로 깨어납니다. 야산의 양지녘에 피어나는 키 작은 노랑제비꽃은 생강나무의 큰 키를 부러워하지 않고, 목련의 화려함에 눈을 흘기지 않습니다.

지난 월요일 모처럼 도봉산을 찾았습니다. 봄기운을 만끽하며 산에 머물다가 마당바위에서 성도원으로 내려오는 길을 택하여 내려왔습니다. 지천으로 피어있는 진달래가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아래로 내려올수록 화사하게 피어있는 진달래가 겹겹으로 저를 에워싸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저도 모르게 흥이 나 이영도님이 가사를 쓰고 한태근님이 곡을 붙이신 <진달래>라는 노래를 흥얼거렸습니다. "눈이 부시네 저기/난만히 멧등마다/그날 스러져간/젊음 같은 꽃사태가/맺혔던 한이 터지듯/여울여울 붉었네." 이 곡은 민주주의를 위해 산화한 4.19의 영령들을 기리며 만든 노래입니다. 나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진달래가 제 마음의 현을 울려 노래를 부르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날이 4월 18일이었습니다. 식물은 무심히 돋아나고 때가 되면 무심히 잎을 떨구지만, 유정한 사람은 그런 자연의 흐름에 무심할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할 수 있는 한 많은 것을 마음에 담으려고 세심하게 주위를 살피며 산을 내려왔습니다.

● 살아 있음의 신비에 무관심한 것이 죄의 뿌리
여러분은 이 봄에 무엇을 보셨습니까? 해야 할 많은 일들과 여러 가지 염려거리들이 뿌연 황사처럼 우리 시야를 가려 생명의 신비를 잊고 살지는 않습니까? 헬렌 켈러를 잘 아시지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삼중고에 시달리면서도 생의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전해준 분입니다. 그분의 수필 <사흘만 볼 수 있다면 Three Days to See>은 정말 우리가 얼마나 놀라운 세계에 살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삶이 무의미하고 권태롭다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바라보는 것들이 다 지루하고, 시시해서 스스로의 무게를 견딜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누구든 젊었을 때 며칠간만이라도 시력이나 청력을 잃어버리는 경험을 하는 것은 큰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라는 말로 시작되는 헬렌의 글은 '단 사흘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이라는 가정 아래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어느 날 방금 숲 속에서 산책하고 돌아온 친구에게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었더니 "뭐 특별한 건 없었어"라고 대답합니다. 헬렌은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보지 못하는 나는 촉감만으로도 나뭇잎 하나하나의 섬세한 균형을 느낄 수 있습니다…봄이면 혹시 동면에서 깨어나는 자연의 첫 징조, 새순이라도 만져질까 살며시 나뭇가지를 쓰다듬어 봅니다. 아주 재수가 좋으면 한껏 노래하는 새의 행복한 전율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헬렌은 손으로 느끼는 그 모든 것을 눈으로 볼 수 있으면 하는 갈망에 사로잡힌다고 말합니다. 촉감으로도 그렇게 큰 기쁨을 맛볼 수 있는데, 눈으로 보는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상상해보는 겁니다. 친구들의 얼굴을 보고 싶고, 찬란한 노을을 보고 싶습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 밤이 낮으로 변하는 기적의 시간도 지켜보고 싶습니다. 이런 느낌 아시겠지요? 단 며칠 동안만 일상적인 삶에서 격절된 곳에 있다가 돌아오면, 쉽게 말하지요, 구치소에 있다가 나오면 세상이 온통 달라 보입니다. 우리는 주변 세계에 너무나 익숙해져서 아무런 놀람도 없이 살아갑니다. 늘 얼굴을 맞대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이 기적임을 우리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신비도 감탄도 없이 우리는 서로를 울적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의 의미와 예배의 중요함을 이해하는 우리의 능력을 억압하는 분명한 방법이 있으니, 사물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살아 있음의 놀라운 신비에 무관심한 것이 죄의 뿌리다."(<<사람을 찾는 하느님>>, 46쪽)

무엇이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감사도 감격도 없습니다. 누가 나를 위해 밥을 짓고 빨래를 해주어도, 출근 시간/등교 시간에 늦지 않게 깨워주고 불편함이 없도록 세심하게 돌봐주어도 고마운 줄을 모릅니다. 이게 우리들의 질병입니다. 살아 있음의 신비에 무관심한 것이 죄의 뿌리랍니다. 놀람과 감사가 없이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음식을 앞에 놓고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것은 말씀으로 모든 것을 있게 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를 기억하는 행위입니다. 저는 식사 기도만 제대로 해도 우리 영성이 발전한다고 말하곤 합니다. 여러분은 한 덩이의 빵을 앞에 두고 식사하기 전에 눈을 감고 고개 숙여 기도하는 한 노인의 모습을 기억할 것입니다. 누구의 그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림 속의 노인은 붉은 수염이 길게 자라 있고, 식탁 위에는 성경과 안경이 놓여 있습니다.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그 식탁이 거룩하게 보이는 것은 진실한 감사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누가 믿음의 사람입니까? 음식을 먹고, 꽃의 향기를 맡고, 구름과 노을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찬미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경험하는 일들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 살아 있는 것은 다 거룩하다
창세기의 저자는 우리가 몸 붙여 살고 있는 세상이 하나님의 숨결로 가득 차 있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르자 혼돈은 물러가고 질서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빛과 어둠을 나누심으로 시간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을 나누시고는, 지면에 있던 물을 한곳으로 모아 바다라 칭하시고 뭍을 땅이라 하심으로써 공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사흗날에 이르자 혼돈은 완전히 극복되었고 창조된 우주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공간을 채우는 일을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의 첫 번째 작품은 땅에서 돋아나는 식물입니다. 그것은 이후에 오게 될 동물과 사람들의 먹을거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동물과 사람을 지으시기 전에 그들을 위해 밥상을 차리고 계십니다.

고대인들은 땅에서 식물이 돋아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땅을 신성한 것으로 여겨, 대지를 어머니에 빗대곤 했습니다(Mutter Erde). 대지는 하늘의 기운을 받아 생명을 품고 기르는 어머니였던 것입니다. 겨울이 되어 죽은 것 같았던 대지에 생명이 움트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경이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가나안 땅에 살던 사람들은 이런 생명의 재생을 '땅의 주인'인 바알 신의 은덕이라고 여겼습니다. 바알은 땅에 거센 홍수를 일으키는 얌과 싸워 이기고, 비옥한 대지의 생명력을 위협하고 황폐케 하는 가뭄의 신 모트(Mot)와 싸워 이김으로써 최고신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입니다. 농경민들에게 바알은 절기에 맞춰 대지를 적시는 비처럼 자애로운 물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신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땅의 주인인 바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애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수메르인들은 두무지 신화를 통해서 식물들의 생장과 조락을 설명합니다. 두무지는 모든 곡물 신들의 원형으로서 신들의 미움을 사 저승에 잡혀갑니다. 그러면 땅에는 겨울이 오고 모든 곡물과 식물이 사라지게 됩니다. 하지만 두무지가 무사히 이승으로 돌아오는 봄이 되면 땅도 다시 생명력을 회복하여 식물을 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경우이든 고대인들은 식물과 곡물이 생장하는 것은 신의 일로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농사를 짓기 전에 두무지 신의 소생을 비는 제사를 바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땅이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성경에서 땅은 어머니 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땅에게 당신의 창조의 능력을 위임하셨습니다. 땅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제 몸에서 식물이 돋아나게 합니다. 오늘 우리들이 보는 푸른 움과 온갖 풀, 그리고 나무들은 모두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먹을 것·마실 것·입을 것에 온통 마음을 빼앗긴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수고도 길쌈도 하지 않지만 솔로몬이 누리는 영광보다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라'는 단어는 '꿰뚫어 보라'는 뜻입니다. 그 아름다운 꽃의 색깔과 모양 그리고 향기 너머에 계시면서 그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신 생명의 하나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 하나님의 숨결이 닿지 않은 생명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살아있는 것은 다 거룩합니다.

● 우리가 흘리는 땀방울
생명을 품고 낳아 기르는 땅은 그런 의미에서 거룩합니다.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잠시 동안 이 땅에 몸 붙여 살다가 떠나가는 나그네일 뿐입니다. 가장 좋은 나그네는 그가 머물던 곳을 아름답게 가꾸다 가는 사람입니다. 잘 산다고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머무는 곳을 사람 살만한 곳으로 바꾸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까지 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우리가 머물던 곳을 더럽히지는 말아야 합니다. 어떤 분은 생태학적인 흔적을 가장 적게 남기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 말하더군요. 저는 오늘 기독교인들이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덕목은 절제라고 생각합니다. 덜 쓰고, 흔적을 덜 남기는 삶의 방식을 택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마땅한 책임입니다. 끝없는 인간의 탐욕은 하나님이 머무시는 땅을 식민지로 삼아 땅을 착취했습니다.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로 땅을 감싸고, 쓰레기로 뒤덮으면서 그것을 개발이고 발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질적으로는 넉넉해졌지만, 우리 영혼은 메말라 있습니다. 생에 대한 감사와 외경심도 잃었습니다. 자기들이 조상적부터 살아오던 땅을 팔라는 백인들의 요구를 받고 시애틀의 추장이 한 연설은 오늘의 우리에게 소중한 울림이 되어 다가옵니다.

우리는 땅의 일부분이며 땅은 우리의 일부분입니다. 향기로운 꽃은 우리의 자매요 …, 우리 선조들의 재(ashes)는 신성합니다. 그들의 무덤은 거룩한 땅이요, 마찬가지로 이 언덕들, 이 나무들, 땅의 이 부분도 우리에게는 신성합니다 … 공기는 아메리카 인디언에게 소중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가 같은 숨을 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동일한 하나님이십니다. 이 땅은 그분에게 소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땅을 경멸하거나, 남용하거나, 낭비하거나, 정복하거나, 약탈하거나, 사유화하거나, 파괴시킬 수 없습니다. 땅은 우리의 존경과 애정을 받아야할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 땅을 건강하고 온전하고 아름다운 상태로 물려주어야 합니다. 땅은 그들에게 생명의 근원과 토대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처럼, 땅은 그들에게 있어서도 하나님의 성례전과 기본적인 은총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꽃등을 켠 것처럼 환한 이 봄은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고개를 드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얼굴을 보십시오. 우리의 삶의 순간 순간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빛나고 있음을 보십시오. 그리고 이 땅을 아름답게 가꾸기 위해 땀을 흘리십시오. 우리가 흘리는 그런 땀방울은 하나님의 마음에 보석처럼 기억될 것입니다.

등 록 날 짜 2005년 04월 24일 12시 27분 50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