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8. 묵은 땅을 갈 때
설교자 김기석
본문 렘4:1-4
설교일시 2005/5/1
오디오파일 s050430.mp3 [6257 KBytes]
목록

묵은 땅을 갈 때
렘4:1-4
(2005/5/1, 교회 설립기념 주일)

["이스라엘아, 정말로 네가 돌아오려거든, 어서 나에게로 돌아오너라. 나 주의 말이다. 내가 싫어하는 그 역겨운 우상들을 내가 보는 앞에서 버려라. 네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여라. 네가 '주님의 살아 계심을 두고' 진리와 공평과 정의로 서약하면, 세계 만민이 나 주를 찬양할 것이고, 나도 그들에게 복을 베풀 것이다." "참으로 나 주가 말한다.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 주민아, 가시덤불 속에 씨를 뿌리지 말아라. 묵은 땅을 갈아엎고서 씨를 뿌려라.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 주민아, 너희는 나 주가 원하는 할례를 받고, 너희 마음의 포피를 잘라 내어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의 악한 행실 때문에, 나의 분노가 불처럼 일어나서 너희를 태울 것이니, 아무도 끌 수 없을 것이다.]

●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
광야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느 곳에 가든 제일 먼저 한 일은 성막을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의 앞길을 인도했던 불기둥과 구름기둥처럼 성막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앞길이 막막했지만 그들은 성막을 보면서 "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구나" 확신을 갖곤 했습니다. 하지만 다윗 솔로몬 시대에 성전이 지어지면서 상황은 바뀌었습니다. 솔로몬은 지방 곳곳에 흩어져 있던 성소를 폐쇄하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예배를 집중시켰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자기들이 사는 곳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멀어도 예루살렘에 가야 했습니다. 성전 체제를 통해서 지역별로 흩어진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통일하고 싶었던 솔로몬은 꿈은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 신앙에는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아, 하나님이 저기에 계시는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이 '저기 저 곳에' 계신 분으로 경험되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에게 교회는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장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꼭 교회에 와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느 곳에나 계십니다. 우리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는 사람이 거룩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충만하게 만난 것은 성전이 아니라 광야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생활의 현장이었습니다. 저는 믿음이란 질척질척한 일상에 하늘의 빛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교회는 무엇입니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던 교우들이 함께 만나 하나님의 은총을 기리고, 각자에게 부여하신 하나님의 은사로써 서로를 섬기는 곳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소명을 받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전초기지입니다. 교회는 그런 의미에서 세속적인 세상을 하늘의 빛으로 밝힐 희망 발전소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역할을 잘 하고 있는지요?

아브라함은 복의 매개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의 존재 이유는 다른 이에게 복을 가져가는 데 있습니다. 이삭이 우물을 팔 때마다 생수가 솟구쳐 나왔습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 복을 가져갔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머무는 곳을 아름답게 만들어야 합니다. 악지(惡地)를 길지(吉地)로 바꾸려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내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악한 일을 포기하고, 선한 일에 열심을 내게 된다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던 소돔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상을 향해 들린 하나님의 진노의 팔을 붙들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 내게로 돌아오라
초기의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제사장 나라'로 세움을 입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건방진 자기 과시가 아니라, 자기들의 소명에 대한 고백이었습니다. 그것은 특권이 아니라 책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백성들을 위해 서야 하고, 백성들 앞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살리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결국 제사장 나라는 다른 이들을 복되게 하는 나라입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우리의 역사를 수난의 역사로 요약하면서, 이사야가 전하는 고난받는 종처럼 수난을 당한 백성만이 세상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세상의 온갖 모순이 집약된 나라이기에 "조개 속 보드라운 살 바늘에 찔린 듯한 상처에서 저도 몰래 남도 몰래 자라는 진주같은 꿈으로 잉태된 (평화의) 내일"(문익환)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불안합니다. 미국·중국·일본·러시아가 북한 붕괴 이후의 주도권을 놓고 치열하게 경합하고 있는 오늘 우리는 과연 어떤 역할을 해야 합니까? 누가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누가 누구를 편들고 안들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사활이 달린 문제입니다. 대체 이 시대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주전 6세기에 활동했던 예언자 예레미야를 통해 대답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사람들은 생의 위기를 만날 때마다, 이 일이 대체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나를 곰곰히 따져보곤 합니다. 이런 치열한 자기 반성이 없다면 사람 노릇하기 어렵습니다. 과녁에서 빗나간 화살의 비유를 가지고 죄를 설명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지혜가 돋보입니다. 내 삶이 언제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나 깊이 생각하다보면 떠오르는 게 있게 마련입니다. 깨달았으면 돌이켜야 합니다. 내닫던 길이 아깝다고 내처 가다가는 인생은 더욱 오리무중이 되고 맙니다. 돌이킴(metanoia)이 곧 회개입니다. 예언자는 이스라엘이 위기에 처한 까닭은 하나님을 등지고 떠난 데 있다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외칩니다. 굳이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생의 곤고함을 해결할 요량으로 다산과 풍요의 신들을 섬겼습니다. 이 일은 지금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축복의 이름으로 교회는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고, 하나님이 그런 풍요로운 삶을 가능케 하신다고 말합니다. 다산과 풍요는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우리를 참 삶으로 인도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풍요로운 가난이 더 많습니다. 이전보다 살림살이의 형편은 한결 나아졌지만 우리 마음은 더욱 쫓기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화를 나누기 위해 멈추어 서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 들어가 쉬지 못합니다. 풍요의 신에게 절하는 사람에게는 한가지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자유함입니다. 가진 것이 많은 데도 표정은 늘 어두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가난한 데도 얼굴이 해처럼 빛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누가 정말 부자일까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민족적인 위기 앞에서도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못했습니다. 모세는 위기에 처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것이 그의 힘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순간순간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외세에 의존해 민족의 문제를 풀려고 했습니다. 물론 외교력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어떤 외세도 의지할 만한 대상이 못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이익이 보장되지 않으면 등을 돌리고 맙니다. 애굽과의 동맹을 강화하는 것이 바벨론의 침공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그들의 판단은 틀렸습니다. 사람들은 인생의 어려운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자기 문제를 풀어줄 수 있는 유력한 사람을 찾습니다. 사람들이 연줄을 중시하는 심정을 저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마땅히 있어야 할 보편적인 정의가 희미하고, 법보다는 돈이나 권력이 더 큰 소리를 내는 세상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제쳐두고 지엽말단의 문제에만 마음을 팔다보면 우리 영혼이 시들고 맙니다. 얼굴에 뭐가 난다고 해서 자꾸 연고만 바르면 되겠습니까? 얼굴에 뭐가 나는 것은 장(腸)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지요? 그렇다면 자기 식생활과 삶의 습성을 돌아보는 게 옳습니다. 우리에게 닥쳐온 생의 위기는 그것이 질병의 고통이든, 실패의 경험이든, 관계의 파탄이든, 하나님께로 돌이키라는 하늘의 초대장입니다. 그 초대에 응할 만큼 우리가 성숙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에게 불행이란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들려지면 고통과 시련조차도 영혼을 밝히는 연료가 되기 때문입니다.

● 묵은 땅을 갈고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진실과 공평과 정의"를 놓지 않을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고,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도 복을 주십니다. 우리가 복의 매개자가 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사는 모습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아차리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실과 공평과 정의를 추구한다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초극하려는 노력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때로는 내키지 않는 일도 해야 합니다. 그게 삶이니까요. 주님은 두 가지 이미지를 통해 우리가 날마다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주십니다.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파종하지 말라."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봄이 되어 농군들의 일손이 바빠졌습니다. 정갈하게 갈아놓은 땅을 보면 마음이 푸근해집니다. 빨간 흙의 속살은 참 아름답습니다. 농군들은 겨우내 굳어있던 흙을 파헤쳐 파종을 준비합니다. 힘들다고 밭을 갈지 않고 씨를 뿌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농사일은 이렇듯 자명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습니까? 묵정밭으로 변해버린 마음 밭에는 이기심과 허위의식과 욕망의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그것을 갈아엎지 않고는 어떤 말씀의 씨앗이 그 속에 떨어진다 해도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날마다 말씀의 쟁깃날로 우리 마음을 갈아엎는 치열한 과정이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마음 가죽을 베는 일이기도 합니다. 밭가는 자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주님께서, 마음 밭을 가는 자들에게 기쁨을 주십니다. 그리고 진실과 공평과 정의의 열매를 맺게 해주십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이런 멋진 삶의 못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곳에서 자란 이들이 세상 도처에서 비바람을 견디면서 든든하게 자라 아름다운 결실을 맺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은 우리들이 생의 현장이어야 합니다. 일상의 삶은 예배의 시작이고, 한 몸 공동체를 이룬 이들이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는 예배의 절정입니다. 우리가 이런 예배의 리듬을 타고 살 때 주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이것은 확실한 약속입니다. 우리 교회에 속한 모든 이들이 예배를 통해 얻은 기쁨을 안고 나아가, 척박한 세상을 사랑과 진실로 갈아엎고 평화의 씨앗을 파종하는 이 숭고한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5년 05월 01일 15시 25분 54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