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9. 징검다리
설교자 김기석
본문 막7:9-13
설교일시 2005/5/8
오디오파일 s050508.mp3 [6777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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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다리
막7:9-13
(2005/5/8)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모세가 말하기를 '네 아버지와 네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너희는 말한다. 누구든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게서 받으실 것이 고르반(곧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되었습니다' 하고 말만 하면 그만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그 이상 아무 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 너희는 너희가 물려받은 전통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헛되게 하며, 또 이와 같은 일을 많이 한다.]

● 졸아붙은 젖가슴
어버이주일 아침, 이 땅의 모든 어버이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기를 빕니다. 부모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되새기는 오늘, 가슴에 꽃을 달아드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이들의 마음은 매우 쓸쓸합니다. 비오는 날이면 시냇가에 마련한 부모의 무덤이 물에 떠내려갈까 싶어 몹시 울었다는 우화속의 청개구리처럼, 부모님께 잘한 일보다는 못한 일들이 또렷이 떠올라 가슴이 아픕니다. 하지만 곁에 계시든 안 계시든 어머니 아버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우리 영혼은 따뜻해지고 맑아지는 느낌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품을 잃은 채 세상을 떠도는 고단함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부모님의 품에 안긴 채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그 품의 온기를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품은 피난처였고, 새로운 삶을 향한 전진기지였습니다. 어미 닭이 생각납니다. 하늘 높이 날아오른 솔개의 그림자가 마당에 비치면 한가롭게 흙을 헤치고 있던 어미 닭의 울음소리가 다급해집니다. 병아리들은 위기를 알아차리고는 황급히 어미의 품에 파고듭니다. 어느 것 하나 품 밖으로 벗어나는 일이 없습니다. 그 작은 날개 어디에 그렇게 큰 품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이 탓인가요? 소설가 이청준 선생은 어렸을 적 한 골목 이웃집에 사셨던 '섭섭이네 할머니'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여름이면 마당가 시원한 평상에 나앉아 어린 그에게 쉬임없이 부채질을 해주셨고, 겨울이면 따뜻한 방 아랫목께서 연신 이불깃을 단속해주시곤 했던 분입니다. 남편과 자식들을 차례로 잃고 고적하게 살고 계시던 그 할머니를 찾아뵈었을 때 이청준은 느닷없이 할머니의 모진 세월에 졸아붙은 젖가슴을 만져보고 싶어졌습니다. 할머니는 그의 실없는 어리광투에 허물없이 야윈 젖가슴을 내어주셨는데, 그것이 작가에게는 가장 슬프고 아름다운 기억이 되고 있습니다.

"할머니의 졸아붙은 젖가슴 끝에는 아직도 동글동글 작고 따뜻한 살주머니가 매달려 있었는데, 나는 그걸 한동안 가만가만 쥐어보며 당신이 미처 다 나눠주지 못한 자식들에 대한 사랑을 느꼈던가. 그것을 눈물 혹은 차마 다 마르지 못한 당신의 사랑의 씨앗주머니라 여기며 속으로 자신의 눈물을 삼켰던가."(이청준, <<야윈 젖가슴>>, 10쪽)

작가는 '섭섭이 할머니'의 야위고 늙은 젖가슴에서 어떤 삶의 감동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미와 추의 기준으로 바라볼 수 없는 세계입니다. 어머니 아버지 얼굴에 패인 깊은 주름과 흰 머리, 구부러진 손가락 마디를 보면서 추하다고 말할 자식은 없을 겁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합니다.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 징검다리
첫째, 우리는 그분들을 통해 이 세상에 왔기 때문입니다. 나의 '있음'은 그분들의 '계심'을 통해서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부모님은 싫든 좋든 우리 삶의 뿌리이십니다. 우리는 가지일 뿐입니다. 뿌리 덕분에 가지가 사는 것이지 가지 덕분에 뿌리가 사는 것은 아닙니다.

둘째, 부모님은 우리들의 스승이기 때문에 공경해야 합니다. 당신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계명을 주신 하나님은 부모들에게 그 계명을 후대에 가르치는 책임을 맡겨주셨습니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6:7). 여기서 말하는 '가르친다' 말은 '인상 지운다'는 뜻으로 읽어야 합니다. 부모는 자신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자식들을 가르칩니다. 말없는 가르침인 셈입니다. 또한 잘잘못을 가리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어긋난 길로 가지 않도록 해줍니다. 가족과 떨어져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하던 백광훈(白光勳, 1537-1582)이 해남의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노심초사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듣자니 너희가 자못 남을 업신여기는 태도가 있고, 또 남의 허물 말하기를 좋아한다 하더구나. 사람이 배우는 것은 다만 이러한 병통을 없애려 함인데, 이제 너희가 정말로 이와 같다면 비록 만 권의 글을 배워 곧장 과거에 급제한다 해도 그 사람을 어디에다 쓰겠느냐? 놀라고 절통하여 죽고만 싶구나. 이후로도 너희들이 이 같은 버릇을 딱 끊지 못하고 뭐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게 되면 맹세컨대 다시는 너희들을 보지 않겠다."

이런 부모의 훈도(薰陶)가 없다면 우리는 사람 구실을 하기 어렵습니다.

셋째, 부모는 우리를 세상과 이어주는 소중한 통로이고, 하나님에게 이르는 중요한 징검다리이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의 처음 네 계명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다루고 나머지 여섯 계명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다룹니다. 이 두 범주를 이어주고 있는 것이 부모를 공경하라는 다섯 번째 계명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먼저 부모 공경으로 구체화된 후에야 비로소 이웃에 대한 사랑과 책임으로 발전한다는 뜻이 아닐까요? 부모 공경은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이웃에 대한 사랑 사이에 있는 돌쩌귀인 셈입니다. 부모 공경을 통해 사람은 정당한 권위를 인정하는 겸손함을 배우게 됩니다.

● 빚진 존재임을 자각할 때
그러면 우리가 진심으로 부모님을 공경할 때는 언제입니까? 그것은 부모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입니다. 스스로 빚진 존재임을 깊이 자각할 때 사람은 사람다워집니다. 미당 서정주 선생은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바람이었다"고 했지만, 바울 사도는 "나의 나된 것은 주의 은혜"(고전15:10)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조금의 과장도 없는 진실일 겁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나'라는 존재는 주님의 은혜와 더불어 많은 이들의 수고와 희생과 돌봄의 결정체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부모님의 은덕은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가끔 솔로몬의 재판에 등장하는 한 어머니를 떠올리곤 합니다. 갓 태어난 아이를 부주의로 잃은 한 여인이 다른 여인의 자식을 자기 자식이라고 우기면서 사건이 벌어집니다. 네 자식이니 내 자식이니 하는 다툼 끝에 그들은 솔로몬 왕 앞에 서게 됩니다. 자초지종을 다 들은 왕은 아이를 반으로 갈라 공평하게 두 여인에게 나누어주라고 판결을 내립니다. 이 대목에서 성경은 한 여인에게 주목합니다.

"그 산 아들의 어미 되는 계집이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그녀의 자궁이 꿈틀거려서] 왕께 아뢰어 가로되 청컨대 내 주여 산 아들을 저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하되 한 계집은 말하기를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 하는지라"(왕상3:26)

이로써 누가 진짜 어머니인지가 드러났습니다. 여기서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라는 구절을 직역하면 "그녀의 자궁이 꿈틀거려서"입니다. 목숨을 걸고 낳은 아기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이 바로 이런 것이겠지요? 이 마음을 안다면 우리는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병들거나, 죽음을 앞둔 부모님이나 노인들을 위해 시간을 물질을 사용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돈이 없다면 모르겠으되 돈이 아까워서 부모를 위험 속에 방치한다면 그는 사람됨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병든 부모님은 짐이 아닙니다. 감당하기 힘들지라도 그분들의 존재야말로 '숨겨진 축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고 우리를 대하실 것입니다. 경건하다는 유대인들 가운데는 '고르반' 규정을 가지고 부모 부양의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고르반'이란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는 뜻인데, 구약에서는 하나님께 드린 제물을 가리키는 낱말이었습니다. 이것이 유대교에서 헌물을 드리겠다고 맹세하는 말의 첫 마디가 되었습니다. '고르반 되었다'고 선언함으로써 사람들은 자기 소유물의 유일한 상속자가 성전임을 세상 앞에 천명했습니다. 고르반 되었다고 선언함으로써 그 물건의 소유자는 자기가 죽을 때까지 그 물건에 대한 사용권을 갖지만 그가 죽는 순간 그 소유권은 성전에 귀속되고 맙니다. 소위 경건하다고 하는 이들 가운데는 고르반 규정을 악용해 부모 부양의 의무를 소홀히 하는 이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면서 사람들이 제정한 규정과 조문들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사람들이라고 꾸짖고 계십니다.

● 가장 큰 공경
그럼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부모님께 바칠 수 있는 가장 큰 공경은 무엇일까요? 연로하신 부모님이 다음 세대와 일체감을 느끼면서 살아가도록 배려하는 것이 아닐까요? 연세가 드신 어느 목사님께 은퇴 이후의 삶이 어떠시냐고 여쭙자, 몸이 쇠약해지는 것보다 더 큰 어려움은 정신적 공허감이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자신이 쓸모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생각이 연로하신 분들을 힘들게 합니다. "절망을 피하는 유일한 길은 자신이 목적이 되는 게 아니라 남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라지요? 행복이란 자신이 남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는 확신과 같은 것입니다. 연로하신 분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젊은 세대들은 부모님 세대의 경험으로부터 배우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의 지식에 접근하는 능력은 젊은 세대가 앞설지 모르지만, 다양한 관계의 그물망으로 이루어진 세상을 총체적으로 보는 눈은 역시 어른들이 낫습니다.

미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극작가로 평가받는 아서 밀러(Arthur Miller, 1915-2005)의 대표작 <<세일즈맨의 죽음 Death of a Salesman, 1949>>의 주인공 윌리 로우맨은 예순 세 살 된 세일즈맨입니다. 그에게는 상냥한 아내 린다가 있고, 두 아들까지 두었습니다. 월부로 집 한 채도 샀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세일즈맨으로 성공해 자기 사업을 해보고 싶다는 윌리의 꿈은 점점 희미해져갑니다. 회사에서 받는 성과급은 자꾸만 줄어들고, 결국 회사에서 일방적으로 해고당하고 맙니다. 희망의 상징이던 두 아들도 무능한 아버지에게 반항하며 빗나가기 시작합니다. 배반감·슬픔·피로·절망감으로 인해 그는 거의 정신착란에 이르게 됩니다. 그는 아들들에게 보험금이라도 남기기 위해 자동차를 과속으로 몰아 자살하고 맙니다. 하지만 그의 죽음으로 타게 된 보험금은 겨우 집의 마지막 월부금을 낼 수 있을 만한 액수였습니다. 아들들이 사회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아버지에게 등을 돌릴 때 린다는 말합니다.

"너희 아버지가 대단히 훌륭한 사람인 건 아니야. 윌리 로우맨은 큰돈을 번 일도 없고, 신문에 이름이 난 적도 없어. 하지만 네 아버지도 인간이야. 그러니까 소중히 대해 드려야 해. 늙은 개처럼 객사를 시켜서는 안 돼."

'섭섭이 할머니의 야윈 젖가슴'처럼 볼품없을지라도, 능력이 부족할지라도 부모님들은 우리들의 생명의 뿌리입니다. 그분들을 공경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공경할 수도 없습니다. 세상에 악한 부모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부모는 부모이기 때문에 선합니다. 어버이주일을 맞은 오늘 우리 모두 다시 한번 우리 생명의 뿌리인 부모님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회복하고, 더 근원적으로는 하늘 아버지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회복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5년 05월 08일 13시 36분 06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