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20. 보혜사
설교자 김기석
본문 요16:7-15
설교일시 2005/5/15
오디오파일 s050515.mp3 [6844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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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혜사
요16:7-15
(2005/5/15, 성령강림주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주겠다. 그가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실 것이다. 죄에 대하여 깨우친다고 함은 세상 사람들이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요, 의에 대하여 깨우친다고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고 너희가 나를 더 이상 못 볼 것이기 때문이요, 심판에 대하여 깨우친다고 함은 이 세상의 통치자가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직도,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지금은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듣는 것만 일러주실 것이요,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 또 그는 나를 영광되게 하실 것이다. 그가 나의 것을 받아서,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가지신 것은 다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성령이 나의 것을 받아서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옛사람의 찌꺼기
살다보면 혼자서 해결하기 어려운 일을 만날 때가 많습니다. 누군가 곁에서 친절하게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다고 친절하게 가르쳐주면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 물론 그가 사사건건 간섭하면서 감 놔라, 배 놔라 하면 곤란하겠지만요. 책을 통해서 수영도 배울 수 있고, 목공일도 배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스승이 필요한 것은 이 대목입니다. 스승은 모든 것을 가르치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딱 막혀 있는 부분을 툭 쳐서 열어주는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 볼링 동호회에 가입한 이가 말하더군요. 그래도 꽤 여러 해 동안 볼링을 해왔는데도 답보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었는데, 코치인 박순성 씨가 던지듯 들려준 한 두 마디가 눈을 뜨게 해주더라고 말입니다. 그런 거지요.

제齊나라의 환공桓公이 당상堂上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목수 윤편輪扁이 당하堂下에서 수레바퀴를 깍고 있다가 망치과 끌을 놓고 당상을 쳐다보며 환공에게 물었다.
"감히 한 말씀 여쭙겠습니다만 전하께서 읽고 계시는 책은 무슨 말을 쓴 책입니까?"
환공이 대답하였다. "성인聖人의 말씀이다."
"그 성인이 지금 살아 계십니까?"
"벌써 돌아가신 분이다."
"그렇다면 전하께서 읽고 계신 책은 옛사람의 찌꺼기군요."
환공이 말했다.
"내가 책을 읽고 있는데 목수 따위가 감히 시비를 건단 말이냐. 합당한 설명을 한다면 괜찮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윤편이 말했다.
"신은 신의 일로 미루어 말씀드리는 것입니다만, 수레바퀴를 깎을 때 많이 깎으면(축軸 즉 굴대가) 헐거워서 튼튼하지 못하고 덜 깎으면 빡빡하여 (굴대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더도 덜도 아닌 정확한 깎음은 손짐작으로 터득하고 마음으로 느낄 뿐 입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물론 더 깎고 덜 깎는) 그 중간에 정확한 치수가 있기는 있을 것입니다만, 신이 제 자식에게 그것을 말로 깨우쳐줄 수가 없고 제 자식 역시 신으로부터 그것을 전수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일흔 살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손수 수레를 깎고 있습니다. 옛사람도 그와 마찬가지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하께서 읽고 계시는 것은 옛사람들의 찌꺼기일 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莊子』, <天道 13節> 중에서)

또 다른 보혜사진정한 배움은 좋은 스승을 만나 스스로 터득攄得하는 것입니다. 터득이라 할 때의 터攄는 '펼친다'(spread)는 뜻입니다. 글자의 구성을 보면 손을 뜻하는 '재방변'과 '생각할 려慮' 자가 결합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터득이란 머리가 아니라 손으로 생각한다, 곧 몸으로 생각하여 깨우치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겠네요. 좋은 제자는 사사건건 스승의 지시만 기다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 나름대로 해나가다가 시행착오도 겪고, 그러다가 스승에게 따끔하게 꾸지람도 듣고 때로는 격려도 들으면서 성장해가야 합니다. 이런 삶의 스승이 요한복음에서는 바로 보혜사保惠師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이 떠나실 때가 다가왔음을 알리셨습니다. 뭔가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당신이 떠나가는 것이 그들에게 오히려 유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얼핏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만, 부모의 돌봄 속에서 아무런 불편없이 살아온 아이들이 매우 의타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을 생각해보면 될 것입니다. 여기서 이 논리를 더 밀고 나가지는 않겠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이 세상에 계신 동안에는 제자들이 독립적인 신앙인으로 서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떠나심이 야기하는 위기는 제자들에게 오히려 제 발로 설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홀로가 아닙니다. 주님은 보혜사 성령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사역을 보혜사라는 단어로 요약하고 있는데, 주님이 떠나신 후에 오실 성령을 그래서 '또 다른 보혜사'(14:16)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성령은 그러니까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주님 예수의 현존인 셈입니다. 예수님이 육체를 가지고 계실 때에는 시공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죽음을 넘어 부활하심으로써 주님은 시공의 제한을 넘어 우리를 도우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또 다른 보혜사이신 주님은 늘 우리 곁에 머무시면서 우리를 도우시고, 위로하시고, 권면하고 계십니다. 이 사실이 믿어지십니까?

보혜사, 그리스도의 현존
성령이 누구이시고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를 몇 가지로 정리해보겠습니다.
첫째, 보혜사 성령은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던 것을 먼저 바로잡아 주십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는 예수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 말은 자칫하면 배타적인 신앙을 조장하는 말로 오해되기 쉽습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자못 위협적인 선교 구호는 이런 말씀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를 믿는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구현하시고 가르치신 삶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결국은 도달해야 할 생의 목표라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또 주님께서 죽음을 통해 열어놓으신 그 길이야말로 영생에 이르는 길임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령은 그 길을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죄임을 깨우쳐주십니다. 보혜사 성령은 또한 의에 대하여 세상 사람들을 깨우쳐주십니다. 성령은 예수님이 비록 세상에서 버림을 받기는 했지만, 하나님이 그의 생을 품에 안으셨다는 사실을 일깨워줌으로써 누가 의로운 사람이었는지를 드러내줍니다. 또 성령은 세상의 통치자들이 기세좋게 주님께 죽음을 선고했지만, 그것은 자기의 발등을 찍는 행위였음을 드러낸다는 말입니다. 사실 그렇지요. 그들은 예수를 죽였지만 예수 정신을 죽일 수는 없었고, 예수 정신에 사로잡힌 이들은 민들레 홀씨처럼 세상 도처로 날아가 뿌리를 내렸습니다.

둘째, 성령은 우리와 '함께', 또 우리 '속에' 계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살도록 방향을 제시하시고 또 우리를 지켜주시는 분입니다. 유타 바우어라는 독일의 동화작가가 있습니다. 그의 동화 가운데 『할아버지의 천사』가 있습니다. 나이가 많아 자리에 누우신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어린 시절, 꼬마는 아침마다 광장을 가로질러 학교에 갔습니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천사 동상이 있었는데, 그는 한번도 그 동상을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학교 가느라 바빴고 가방도 무거웠기 때문입니다. 어떤 날은 버스에 치일 뻔 하고, 구덩이에 빠질 뻔 하기도 했습니다. 으슥한 곳을 지날 때도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에 아무 것도 무서운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어른이 되어갔습니다. 그렇다고 살기가 더 쉬워진 것 아니었습니다. 전쟁이 터졌고, 배고픔에 시달렸고 여러 가지 힘든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가정을 이루었고, 손자도 얻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생각해 보면 자신은 정말 멋진 인생을 살았다고 말합니다. 어찌 보면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작가인 유타 바우어는 직접 그린 그림을 통해 인생의 신비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그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천사가 그를 보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착한 일을 하도록 그를 격려한 것도 천사였습니다.

저는 이 동화를 가끔씩 꺼내 봅니다. 볼 때마다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성령은 이 동화에 나오는 천사처럼 우리 가까이 계시면서 우리를 보호하고, 격려하고, 이끌고 계십니다.

창조의 힘 그리고 일치의 힘
셋째, 성령은 우리의 신앙고백을 신앙실천으로 바꾸게 해주는 힘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아직 믿음이 아닙니다. 메뉴판을 보았다고 배고픔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아무리 좋은 아마존강 지도를 가져도 직접 그곳을 발로 밟아보지 않으면 아마존강을 알 수 없습니다. 일전에 텔레비전에서 아직 전기도 안 들어가는 강원도 오지마을을 소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곳 주민 가운데는 냉장고와 텔레비전을 가지고 있는 분도 계셨습니다. 도시에 살고 있는 자식들이 언젠가 전기가 들어오면 사용하시라며 보내준 것들입니다. 하지만 전기가 없는 이상 냉장고는 문짝이 든든한 궤짝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렇지요. 성령은 우리가 깨달은 바 하나님의 뜻을 삶으로 번역하도록 해주는 능력입니다.

넷째, 성령은 화해와 일치의 영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곳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담은 무너집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을 가르는 담, 남자와 여자를 가르는 담, 죄인과 의인을 가르는 담이 무너집니다. 성령은 이전에는 가파른 눈길로 서로를 바라보던 이들이 조금씩 다가서게 하고, 마침내 형제자매의 사랑으로 서로를 얼싸안게 해줍니다. 성령은 내가 먼저 다가가 화해의 손을 내밀도록 해줍니다. 성령은 그렇기에 용서의 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위로자
다섯째, 성령은 우리의 위로자이고, 시련 중에 함께 하시며 우리 삶을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만사형통을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16장 20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리니 세상이 기뻐하리라." 예수님 참 대책없이 솔직하시지요? 이래 가지고야 어디 사람들이 따르겠어요? 하지만 참 종교는 사람들에게서 고통을 없애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통을 극복할 힘을 주고, 또 그 고통을 기쁨으로 바꾸는 끈질김을 주는 것입니다.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보혜사 성령은 우리가 세상살이에 지쳐 낙심할 때,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여 속상할 때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도록 해주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위로자이십니다.

때때로 삶이 힘겹고 답답할 때마다, 누군가가 가까이 있으면서 그 문제를 함께 풀어주었으면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또 다른 보혜사'인 성령님이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 곁에 계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주님이신 동시에 우리의 스승이십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홀로가 아닙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49:15). 우리는 주님을 잊을지라도 주님은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이 믿음으로 진리의 길을 담대히 걸어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5년 05월 15일 13시 31분 56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