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21. 사람이 희망이다
설교자 김기석
본문 살후2:15-17
설교일시 2005/5/22
오디오파일
목록

사람이 희망이다
살후2:15-17
(2005/5/22)

[그러므로 형제 자매 여러분, 든든히 서서, 우리의 말이나 편지로 배운 전통을 굳게 지키십시오. 우리를 사랑하시고 은혜로 영원한 위로와 선한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여러분의 마음을 격려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세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 좋은 사람, 좋은 세상
어제는 24절후 중 소만小滿이었습니다. '작은 만족'이라고도 할 수 있겠고, '작은 가득 참'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보리 수확과 모내기를 끝낸 농부는 뿌듯함을 느낄 겁니다. 그런데 왜 대만족이 아니라 작은 만족일까요? 작은 만족이야말로 가장 좋은 상태이기 때문일 겁니다. 달은 차면 기울게 마련입니다. 보름달은 두루 원만하지만, 곧 이지러지게 되어 있습니다. 다소 덜 채워진 상태야말로 행복한 상태가 아닐까요? 배 터질 정도로 먹어야 행복하다는 사람도 있지만, 조금 모자란 듯 먹는 게 건강에도 유익하답니다. 모내기를 마친 논을 보셨습니까? 물에 잠길 듯 여린 모들의 자태가 안쓰럽지만, 농부들은 그 모를 흐뭇하게 바라봅니다. 농수산물 개방을 앞두고 근심이 많지만, 농군들의 마음에는 그래도 기쁨이 있습니다. 소박하지만 옹골진 소망이 있기에 지금은 '작은 만족'의 때입니다. 산에서 자라는 나무들을 생각해보십시오. 봄이 되어 산색이 조금씩 변화되다가 마침내 여린 잎들이 하나 둘 나오기 시작하면, 얼마 가지 않아 산은 온통 그 작고 여린 잎들로 가득 차게 됩니다. '작은 가득 참'을 뜻하면 소만은 아마 그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가 봅니다. 이 소만 절기에 행복하십니까?

우리는 좋은 세상에 살기를 소망합니다. 물도 깨끗하고, 공기도 깨끗하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따뜻한 표정을 짓고 사는 세상에 살고 싶습니다. 그런 세상 어디 없나요? 사람들이 서로를 깊이 신뢰하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어김없이 다가와 벗이 되어 주고, 기쁜 일이 있으면 사심 없이 함께 기뻐해주는 사람들이 사는 곳 말입니다. 새로운 국적법이 시행된다는 보도가 나가자, 많은 사람들이 국적을 포기하기 위해 장사진을 이루었습니다. 좀 속상하긴 하지만 저는 국적을 포기하는 사람들을 굳이 탓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 정도의 개방성은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이 나라에는 희망이 없다'는 말을 할 때는 화가 납니다. 그들의 이기심을 충족시킬만한 희망은 없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희망은 있습니다. 박노해 시인이 들려주는 한 여성 노동자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두 아이의 엄마였던 그 여인은 자기가 감옥에 와서 절실히 깨달은 것을 시인에게 말합니다.

"어디 좋은 세상이 저절로 오나요. 단번에 오나요. 우리 빼앗긴 게 한꺼번에 되찾아지나요. 설사 빼앗긴 돈과 권리는 되찾을 수 있을지라도 빼앗긴 삶과 인간성과 제 상한 영혼은 어디에서 찾을까요. 내가 먼저 좋은 사람으로 변하려는 노력 없이, 또 가난한 제 돈과 시간과 관심을 쪼개서 참여하고 보태려는 구체적인 실천 없이 좋은 미래를 어디에서 누구에게 바랄 수 있겠어요. 좋은 세상은 어찌 보면 우리 안에 이미 와 자라나고 있는 건데, 지금 나부터 그렇게 살면 되는 건데, 좋은 사람으로 살면서, 하루하루 생활 속에서 어깨를 맞대고 착실히 힘 모아나가면 사실 저들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데, 선생님, 저 이제 나가서는 잘 살겠습니다. 좋은 세상 함께 이루어가는 좋은 사람이 되도록 제 자신과도 싸우면서 그 힘을 보태겠습니다."(박노해, <<사람만이 희망이다>>, 8-9쪽)

그렇습니다. 내가 먼저 변하지 않고는 희망은 없습니다. 아니, 스스로를 변화시키려는 사람만이 희망을 말할 수 있습니다. 좋은 세상은 누가 거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힘을 합해 만들어가야 합니다.

● 변화
성경은 온통 하나님과 만나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을 만나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유랑하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모세도 호렙산 떨기나무 아래에서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청년 사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고난받는 자들의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성경의 인물들의 변화는 철저한 변화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변화를 경험합니까? 갈망하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문제임을 절감하고 나를 바꿔보려고 애쓰는 사람만이 세상을 아름답게 바꿀 수 있습니다. 얼굴은 성형수술을 통해 바꿀 수 있을지 몰라도, 마음은 하나님 앞에 가야 바뀝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마이다스 왕' 이야기는 모두가 다 잘 아실 겁니다. 디오니소스 신이 마이다스에게 무엇이든 소원을 말하면 다 들어주겠다고 합니다. 그는 어리석게도 무엇이든 자기의 손이 닿는 것은 다 황금이 되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마이다스가 '황금'을 택하자 디오니소스는 그가 더 좋은 선택을 하지 않은 것을 유감으로 생각했습니다. 신은 더 좋은 것을 주고 싶었지만, 사람은 그것을 택하지 않은 것이지요. 어쨌든 마이다스의 손이 닿는 모든 것은 약속대로 황금으로 변했습니다. 나뭇가지, 돌멩이…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사과를 따자 그것도 황금으로 변하고, 음식을 먹으려하자 그것도 황금으로 변하면서 문제가 생겼음을 알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사랑하는 딸을 품에 안자 그도 역시 딱딱하게 굳어버렸습니다. 졸지에 주어진 황금이 복이 아니라 재앙일 수 있음을 그는 여실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마이다스는 디오니소스에게 그 재앙으로부터 놓여나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러자 신은 말합니다. "팍톨로스 강에 가서 머리와 몸을 강물에 담그라. 그리고 네가 범한 과오와 그에 대한 벌을 씻어라."

우리의 팍톨로스 강은 어디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 우리의 더러워진 마음을 깨끗이 씻지 않고는 새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만나 속사람이 새로워진 사람은 세상을 아름답게 바꾸기 시작합니다.

● 생명의 춤사위
1738년 5월 24일, 35세의 영국 성공회 신부인 존 웨슬리는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런던의 올더스게이트가에서 열리는 모라비안 교도들의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그곳에서 어느 사람이 루터가 쓴 로마서 서문을 읽었습니다. 어느 순간 그의 마음이 뜨거워지더니,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죄를 용서해주셨다는 확신이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이 순간을 기념하여 웨슬리의 회심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가 주님과 만나 새 사람이 되었을 때, 그는 영국 사회를 변화시키는 변혁의 누룩이 되었습니다. 자성체가 쇠붙이를 끌어들이듯이, 꽃이 향기로서 벌과 나비를 끌어들이듯이, 주님의 영으로 거듭한 한 사람은 다른 피폐한 영혼들을 끌어들이게 마련입니다. 웨슬리의 주위로 몰려온 사람들은 누구나 다 변화되었습니다. 변화된 사람들이 이르는 곳마다 변화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앞다투어 배고픈 이들을 먹이고, 헐벗은 이들을 입히고, 외로운 이들의 가족이 되어 주고, 살맛을 잃은 이들에게 살맛을 되찾아주었습니다.

저는 초기 감리교인들의 그런 멋진 삶을 생각할 때마다 생명의 춤을 생각합니다. 감리교인들은 자기들이 추는 생명의 춤 속에 슬픔과 고통에 짓눌린 이들을 끌어들였고, 그 춤에 동참한 이들은 고통이 행복의 에너지로 바뀌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 행복은 생명을 춤을 추는 이들을 통하여 왔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하여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6)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또 우리의 영원한 위로가 되십니다. 우리가 지치고 낙심하여 눈앞이 캄캄할 때에도 소망의 해가 솟아오르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선한 일을 하면서 낙심하지 않도록 돌보아주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선한 일은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을 한마디로 생명을 돌보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조금만 불편하게 살기로 작정하면 됩니다. 조금 더 걷고, 조금 더 절약하고, 조금 더 오래 쓰면 됩니다. 누리고 싶은 것을 다 누리면서 생명을 돌볼 수는 없습니다. 조금씩 비워내야 합니다. 욕심을 줄이면 그 빈자리에는 평안과 기쁨이 깃들게 마련입니다. 생명을 돌보는 삶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생명의 감수성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할 수 있는 한 자주 자연과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영혼의 치료제를 자연 속에 숨겨두신 것이 아닌지요? 그리고 미지의 곳을 찾아가는 탐험가들이 GPS를 통해 자기 위치를 가늠하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우리 삶을 자꾸 세워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 혼탁한 세상의 탁류를 거슬러 오를 힘을 얻게 됩니다.

아름다운 미래는 눈물 없이는, 땀흘림 없이는 오지 않습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비밀스런 경륜을 알려주시고, 그 일에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은 우리가 자발적으로, 기쁜 마음으로 그 부름에 응답하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했던 이사야처럼,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시려는 주님의 계획에 주체적으로 동참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5년 05월 22일 16시 27분 0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