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22. 우리의 피난처
설교자 김기석
본문 시46:1-11
설교일시 2005/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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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피난처
시46:1-11
(2005/5/29)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시며, 우리의 힘이시며, 어려운 고비마다 우리 곁에 계시는 구원자이시니, 땅이 흔들리고 산이 무너져 바다 속으로 빠져들어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물이 소리를 내면서 거품을 내뿜고 산들이 노하여서 뒤흔들려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 강이여! 그대의 줄기들이 하나님의 성을 즐겁게 하며, 가장 높으신 분의 거룩한 처소를 즐겁게 하는구나. 하나님이 그 성 안에 계시니, 그 성이 흔들리지 않는다. 동틀녘에 하나님이 도와주신다. 민족들이 으르렁거리고 왕국들이 흔들리는데, 주님이 한 번 호령하시면 땅이 녹는다. 만군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야곱의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시다. 땅을 황무지로 만드신 주님의 놀라운 능력을 와서 보아라. 땅 끝까지 전쟁을 그치게 하시고, 활을 부러뜨리고 창을 꺾고 방패를 불사르신다. 너희는 잠깐 손을 멈추고, 내가 하나님인 줄 알아라. 내가 뭇 나라로부터 높임을 받는다. 내가 이 땅에서 높임을 받는다. 만군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야곱의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시다.]

● 소박한 성스러움
사람은 자기의 생활방식을 바꾸는 순간 하나님도 바꾸어버린답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대로 생각한다고 말한 분도 계십니다. 서 있는 삶의 자리가 다르면 생각하는 방식도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입장의 동일함이 전제되지 않으면 이해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동차에 타고 있으면 보행자가 못마땅하고, 도로를 걷다보면 운전자들이 무례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부유한 사람들은 삶의 터전을 잃게 된 도시 빈민들의 시위가 과격하다고 말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을 백안시합니다. 이전에 비하면 우리는 정말 많은 것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행복을 더 깊이 체험하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물건이 지천으로 넘치면서, 감사와 감격이 사라졌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지 않아도 먹을 것이 많은데, 밥 한 끼를 앞에 두고 진정한 감사의 기도를 드리겠습니까? 권정생 선생님은 1960년대의 교회의 모습을 그리움으로 회상하고 있습니다.

내가 예배당 문간방에 살면서 새벽종을 울리던 때가 진짜 하나님을 만나는 귀한 시간이었는지 모른다. 특히 추운 겨울날 캄캄한 새벽에 종줄을 잡아당기며 유난히 빛나는 별빛을 바라보는 상쾌한 기분은 지금도 그리워진다. 1960년대만 해도 농촌교회의 새벽기도는 소박하고 아름다웠다. 전깃불도 없고 석유 램프불을 켜놓고 차가운 마룻바닥에 꿇어앉아 조용히 기도했던 기억은 성스럽기까지 했다.
교인들은 모두 가난하고 슬픈 사연들을 지니고 있어 가식없는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그 중에 6.25때 남편을 잃고 외딸 하나 데리고 살던 김 아무개 집사님의 찬송가 소리는 가슴이 미어지도록 애절했다. 새벽기도 시간이면 제일 늦게까지 남아서 부르던 <고요한 바다로> 찬송가는 그분의 전속곡이었다. 마지막 4절의

이 세상 고락간 주 뜻을 본받고
내 몸이 의지 없을 때 큰 믿음 줍소서.

하면서 흐느끼던 모습은 보는 사람들을 숙연하게 했다. 가난한 사람의 행복은 이렇게 욕심없는 기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새벽기도가 끝나 모두 돌아가고 아침 햇살이 창문으로 들어와 비출 때, 교회 안을 살펴보면 군데군데 마룻바닥에 눈물자국이 얼룩져 있고 그 눈물은 모두가 얼어 있었다.

가진 것 없지만,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주님의 뜻을 따라 살겠습니다. 때때로 끈 떨어진 연처럼 내 인생이 적막할 때 낙심하지 않도록 큰 믿음을 주십시오. 눈물을 흘리며 찬송을 부르시는 그 김집사님의 모습은 '성스러움'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분에게 하나님은 영원한 피난처이셨겠지요.

● 어지러운 세상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1)

시편 46편의 시인도 평탄한 삶을 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안으로는 근심이요, 밖으로는 환난(內憂外患)이었나 봅니다. 이방이 소란스럽게 떠들고, 나라와 나라가 전쟁을 벌이는 그 살벌한 현장에서 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인생의 경험을 표현할 마땅한 말을 찾을 길이 없어서인지 아주 장대한 그림 언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한번 머리 속에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땅이 변하고,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고, 바닷물이 흉포하게 넘실거리고, 그것이 넘쳐 산이 요동하고…. 이런 느낌 아시지요? 저는 비교적 평탄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이런 경험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전쟁을 경험한 세대들은 이런 상황이 머리 속에 그려지실 것 같네요. 하기야 지난 3-40년 세월 동안 우리가 살아온 나날만 돌아보아도 시인이 드러내려고 하는 정서를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이 기가 막힌 세월을 어떻게 살았나 싶어요. 한편으로는 먹고살기 위해 일해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시인이 경험한 것을 지금 우리도 겪고 있습니다. 사막은 늘어나고, 오존층도 파괴되고, 지구의 온난화가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남극과 북극의 빙하가 녹아내려 해수면이 높아지면서 낮은 지대에 사는 이들이 살 땅이 해마다 줄어들고 있습니다. 수많은 생물종들이 지구상에서 멸종되고 있습니다. 빈부의 격차는 나날이 늘어나고 있고, 인종과 문화적 갈등도 깊어만 갑니다. 테러와 폭정을 종식시킨다는 명분으로 미국은 전 세계에 공포를 수출하고 있습니다. 뉴욕 뉴스쿨대학 세계정책연구소(WPI)가 5월 25일에 펴낸 보고서는 미국이 겉으로는 폭정을 종식시킨다고 말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무기판매에 열을 올리고 있다고 고발합니다.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빌미로 '동맹국'에 판매하는 무기가 전세계 독재정권들의 버팀목이 되고 있다." 북미간의 갈등으로 한반도는 언제 화약고로 변할지 모르는 위태로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시편 46편의 시인의 노래를 애타게 부르게 됩니다.

"이방이 훤화하며 왕국이 동하였더니 저가 소리를 발하시매 땅이 녹았도다."(6)
"저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9)

이 말을 여러분은 어떻게 들으십니까? 역사를 자기 손아귀에 넣고 쥐락펴락하려는 이들의 시도가 헛된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까? 지난 금요일, 미국에 계신 박순희 권사님께서 전화를 하셨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권사님이 제게 조심스럽게 물으셨습니다. "여기서는 한반도 7월 위기설이 파다한데 거기는 괜찮은가요?" 낙관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상황인 것은 분명합니다.

● 풍파도 그치게 하는 사랑
하지만 저는 가장 심각한 위기의 상황 속에서 살았던 시인의 눈이 다른 곳을 가리키고 있음을 봅니다.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4-5)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질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질서도 있는 법입니다. 거대한 빙하가 바람 방향의 반대편으로 흘러갈 때가 있답니다. 그것은 해류의 움직임 때문이래요. 세상이 꼭 그런 것 같습니다. 세상일은 꼭 예측대로 흘러가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역사를 움직이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아도 지구는 지금 빠른 속도로 자전과 공전을 하고 있습니다. 눈으로 볼 수 없다고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이 여전히 살아계십니다. 이 시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성'은 물론 예루살렘입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싶으시지요? 하나님의 성은 어떤 특정한 지역을 일컫는 말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신 땅이 곧 '하나님의 성'이고 '예루살렘'인 것이지요.

하나님이 계신 곳에는 든든함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피난처이십니다. 시골 마을마다 있는 느티나무를 볼 때마다 '품이 참 넓구나' 하고 감탄합니다. 느티나무는 자기 곁에 다가오는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착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동네 사람이든 낯선 사람이든 누구나 받아들여 품어줍니다. 그 품이 참 넉넉합니다. 느티나무가 그런데 하나님은 더 하시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드러나신 하나님은 세상에 살면서 상처입은 사람들, 지친 사람들, 비틀거리는 사람들, 죄인까지도 다 받아주십니다. 도덕적인 잣대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당신께 나오는 사람은 그냥 다 품어주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피난처이십니다. 그 품에 안긴 사람은, 누구나 변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은 우리 마음의 응어리들을 풀어냅니다. 찬송가 418장을 부를 때마다 저는 감격합니다.

1. 하나님 사랑은 온전한 참 사랑 내 마음에 부어주시사 충만케 하소서
3. 그 사랑 앞에는 풍파도 그치며 어두운 밤도 환하니 그 힘이 크도다

풍파도 그치게 하는 사랑, 어두운 밤도 환하게 하는 사랑, 하나님은 그 사랑으로 우리를 대해주십니다.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은 이전의 그 사람일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옹색할 때는 다른 이에게 상처를 입히곤 했습니다. 받을 것만 셈하다가 가까운 사람들의 마음에 피를 흘리게 했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품에 안긴 사람은 너그러운 사람으로 변합니다. 큰 어려움 앞에서도 요동하지 않고, 조용히 그 문제에 직면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립니다.

● 한 장의 얇은 모포 같은 그대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10)

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께 마음을 집중하여 마음의 풍랑을 가라앉히라는 말입니다. 흔들리는 물에는 얼굴을 비춰볼 수 없습니다. 물이 잔잔해지면 거기에 내 얼굴을 비춰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롬8:28)고 했습니다. 우리 앞에 배송된 생의 재료가 다소 미흡해 보여도 하나님이 손을 대시면 멋진 작품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슬픔과 좌절, 질병과 고통, 오해와 갈등, 가난과 외로움…하나님은 어느 것 하나 쓸모 없다고 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곁을 떠나지만 않으면 됩니다.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기꺼이 누군가의 피난처가 되어줍니다. 시인 도종환은 <희망>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차디찬 겨울 감옥 마룻장 같은 세상에
오랫동안 그곳을 지켜온
한 장의 얇은 모포 같은 그대가 있어서
아직도 그대에게 쓰는 편지 멈추지 않는데

세상이 비록 겨울 감옥의 마룻장처럼 차가워도, 한 장의 얇은 모포일망정 시린 영혼을 덮어주는 마음이 있는 한 세상은 아직은 살만한 곳입니다. 세상을 살만한 곳이 되게 하자고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피난처가 되어 주신 것처럼, 우리도 누군가의 피난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일을 성심껏 감당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세상에서 떠도는 상처입은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복된 일에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5년 05월 29일 13시 36분 49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