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24. 지나침을 경계하라
설교자 김기석
본문 전7:15-18
설교일시 2005/6/12
오디오파일 s050612.mp3 [6683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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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침을 경계하라
전7:15-18
(2005/6/12)

[헛된 세월을 사는 동안에, 나는 두 가지를 다 보았다. 의롭게 살다가 망하는 의인이 있는가 하면, 악한 채로 오래 사는 악인도 있더라. 그러니 너무 의롭게 살지도 말고, 너무 슬기롭게 살지도 말아라. 왜 스스로를 망치려 하는가? 너무 악하게 살지도 말고, 너무 어리석게 살지도 말아라. 왜 제 명도 다 못 채우고, 죽으려고 하는가? 하나를 붙잡되, 다른 것도 놓치지 않는 것이 좋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극단을 피한다.]

● 알 수 없는 세상사
텔레비전 오락 프로그램 가운데 '당연하지'라는 코너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 마주 서서 차례로 질문을 던집니다. 질문에 대한 답은 무조건 '당연하지'입니다. '당연하지'라고 대답하지 못하면 지는 게임입니다. 그러니까 게임에서 이기려면 상대방에게 매우 곤란한 질문을 던져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까 서로 상대방의 외모나 성격적인 콤플렉스를 꼬집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를테면 "너 재수 없는 거 알지?" 하는 질문을 받고 "당연하지"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왜 이런 가학적인 게임을 즐기는지 정말 염려스럽습니다. 그런데 만일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이 없다면 삶이 참 고달플 겁니다. '당연하지'가 영어로는 'Of course'인데요. 세상은 이처럼 코스대로 가는 게 있어야 맘이 편합니다. 문제는 당연해야 할 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콩 심은 데 콩이 나는 게 당연한데, 사람 사는 세상에서는 팥이 나오기도 합니다. 착하게 살면 세상에서 존중받고 성공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그렇지가 않습니다. 못되게 살아도 잘 사는 이들이 많습니다. 당연함이 무너질 때 우리 삶은 황당해집니다.

해방 이후에 많은 친일파들이 재빨리 변신에 성공해 자유당 정부의 요직을 독차지하고, 그 덕분에 그들의 자제들은 사회의 상층부로 진출했습니다. 반면 정말 어렵게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은 설 땅을 잃고, 그들의 자제들은 가난을 대물림 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법적인 절차에 따라 공정하게 입찰에 뛰어들어 보아도, 은밀하게 뒷거래를 하는 사람들을 당해낼 도리가 없습니다. 밤을 새워 열심히 공부해 보아도 장학금은 훔쳐보기를 하는 사람들의 몫이 됩니다. 세상이 이처럼 코스대로 가지 않고 제멋대로 굴러가니까 사람들은 일탈행위를 하고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꿩 잡는 게 매라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성공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제게는 의문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행복할까요? 행복하다면 그냥 행복하라고 하지요 뭐. 하지만 그런 행복은 불행의 시작입니다. 일부러 딴지를 거는 게 아니라 그건 엄연한 사실입니다. 양심을 속이며 얻는 성공이나, 부당하게 얻는 이득은 올무가 되어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이지요. 마음에 떳떳함이 없는 사람은 자유인이 아닙니다. 잘못된 일을 저지르고도 마음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 만일 있다면, 우리는 그를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으니까 하나님께서 손을 보시겠지요. 당연해야 할 것이 당연하지 않은 세상에 낙심하여, 착한 사람의 길을 포기하려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보상을 기대하며 착하게 사는 사람은 아직 착한 사람이 아닙니다.

정말 착한 사람은 착한 것이 그냥 좋아서 착하게 삽니다. 착하게 사는 것 자체가 그의 기쁨인 것이지요. 히브리 말로 계명을 뜻하는 단어는 '미츠바'(mitzvah)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다양한 의미망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법, 또 그것을 지켜야 하는 인간의 의무, 그 의무를 완수하는 행위, 특히 자비와 사랑의 행위를 함께 지칭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미츠바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행하는 모든 행위를 뜻한다고 할까요? 히브리인들은 미츠바를 가진 사람이야말로 참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보상이 없다고 하여, 당장 열매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제 멋대로 사는 사람은 자기를 잃어버린 사람이고, 병든 사람입니다.

●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라
그런데 전도서 기자는 미츠바가 사라진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라"(Do not be over-virtuous)고 권고합니다. '지나친 의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자기에게 성실한 사람입니다. 그는 옳고 그름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깨끗합니다. 하지만 그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자신에게 부과한 성실성이라는 이미지에 얽매인 채 살기에 늘 긴장되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꾸짖고 탓하며 살다보니 그는 다른 이들을 돌아볼 여백이 없습니다. 맑은 물에는 고기가 살 수 없다지요? 그가 하는 말은 사사건건 지당한 말씀이고, 그의 행동은 나무랄 데 없지만, 그는 누군가의 품이 되어주지는 못합니다. 바리새인들이야말로 '지나친 의인들'입니다. 그들은 옳고 그름이라는 자기 기준을 가지고 사람들을 잽니다. 거기에는 여백이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긍휼과 자비의 자를 가지고 사람들과 대하셨습니다. 주님은 상대의 장점을 잴 때는 마음이 푼푼하시지만, 그들의 허물을 잴 때는 눈이 어두운 듯이 보이십니다.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들이 보기에는 너무 물렁물렁한 것으로 보였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마련한 그런 헐거운 틈 사이에서 생명이 뿌리를 내리고 든든하게 자라났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따라왔던 것은 그런 여백 때문이었을 겁니다.

살다보면 때로는 경계선 밖으로 걸어나가야 할 때도 있는 법입니다. <<사운드 오브 뮤직>>이라는 영화에서 수녀들은 유대인들을 탈출시키기 위해서 나찌의 군인들에게 선의의 거짓말을 합니다. 수녀들이 거짓말을 했다고 해서 그들의 경건이 깨진 것은 아닐 겁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기 위해 사람들을 위기에 빠뜨린다면 그것은 '지나침'의 잘못을 범한 것입니다. 지나치게 의로운 것도 문제이고, 지나치게 악한 것도 문제입니다.

● 우리에게는 어떤 무늬가?
그러면 지나침과 지나치지 않음의 경계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 경외입니다. 다소 모호한 듯하지만 그게 정답입니다. 판단하기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하고 그분의 뜻을 여쭙는 것이 중요합니다.

"너는 이것을 잡으며 저것을 놓지 마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18)="하나를 붙잡되, 다른 것도 놓치지 않는 것이 좋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극단을 피한다."(표준새번역)

우리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논리에 익숙합니다. 이것은 나눔의 논리이지요. 사람을 보아도 네 편 아니면 내 편으로 가릅니다. 국제관계도 그렇습니다. 네가 내 편이면 어떤 나라를 적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대개 강대국의 논리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것은 쌍을 이루고 있습니다.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빛과 어둠, 진보와 보수, 남자와 여자, 선과 악, 미와 추, 삶과 죽음…. 어느 한쪽을 배제한 다른 한쪽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극단을 피하게 마련입니다. 극단은 늘 사람과 세상에 상처를 입히기 때문입니다. 극단에 서게 되면 다른 이를 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깨끗하게 의롭게 살아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의 살 권리도 인정해야 합니다. 아니, 그의 장점을 찾아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틀린 것이 아닙니다. 질서와 혼돈이 뒤섞여 있는 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의 모습입니다.

밭에 곡식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것을 보고 종들이 달려와 주인에게 묻습니다. "그것을 뽑을까요?" 그러자 주인은 "그냥 놔 두라"고 합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이게 하나님의 사랑법입니다. 하나님이 무능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긋난 길로 나아간 사람들이 제 자리로 돌아올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노신의 글 가운데 <썩은 사과 먹는 법>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썩은 사과를 보면 아낌없이 내던져버립니다. 하지만 알뜰한 사람은 썩은 부분을 도려내고 성한 부분을 맛있게 먹습니다. 이게 살림의 손길입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다소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다 해서 그를 나쁜 사람 혹은 무능한 사람으로 규정하면 안 됩니다. 부족한 부분은 채워주면 되고, 잘못된 부분은 고쳐주면 됩니다. 그러면 그도 살고 나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죄인들로 규정해버린 사람들 속에서 주님은 하나님 나라를 보셨습니다. 이게 살림의 눈입니다.

"호랑이의 줄무늬는 밖에 있고, 인간의 줄무늬는 안에 있다!"는 라다크인들의 속담이 있습니다. 사람의 아름다움은 외적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아름다움에 있다는 말일 겁니다. 나와 다른 이를 품고 갈만한 여백이 있어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지리산 깊은 소에는 물고기가 살고 있습니다. 못 위로 허구한 날 비치는 소나무 그림자를 보고 제 몸의 무늬마저 그 그림자와 같게 만든 물고기(袈裟魚)입니다. 사시장철 낙락한 소나무의 기상을 닮은 그 고기를 삶아먹으면 병이 없어진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어떤 무늬가 새겨져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 속에도 하나님의 모습이 새겨져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은 지나침을 피하는 사람입니다. 흑백으로 가르는 데 익숙한 사람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것을 품안에 안을 줄 아는 넉넉한 사람입니다. 그런 마음이 있는 곳에서 생명이 살아납니다. 당연한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는 세상을 치유할 힘은 바로 그런 사랑과 믿음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날마다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힘겹더라도, 누군가를 품기 위해 마음을 여는 순간 예기치 않았던 생명의 힘이 우리에게 부여됩니다. 이게 바로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이런 멋진 일에 오늘부터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5년 06월 12일 15시 23분 04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