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25. 말이 끊어진 자리
설교자 김기석
본문 욥38:1-11
설교일시 2005/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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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끊어진 자리
욥38:1-11
(2005/6/19)

[그때에 주께서 욥에게,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서 대답하셨다. "네가 누구이기에, 무지하고 헛된 말로 내 지혜를 의심하느냐? 이제 허리를 동이고 대장부답게 일어서서, 묻는 말에 대답해 보아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거기에 있기라도 하였느냐? 네가 그처럼 많이 알면, 내 물음에 대답해 보아라. 누가 이 땅을 설계하였는지, 너는 아느냐? 누가 그 위에 측량줄을 띄웠는지, 너는 아느냐? 무엇이 땅을 버티는 기둥을 잡고 있느냐? 누가 땅의 주춧돌을 놓았느냐? 그 날 새벽에 별들이 함께 노래하였고, 천사들은 모두 기쁨으로 소리를 질렀다. 바닷물이 땅 속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누가 문을 닫아 바다를 가두었느냐? 구름으로 바다를 덮고, 흑암으로 바다를 감싼 것은, 바로 나다. 바다가 넘지 못하게 금을 그어 놓고, 바다를 가두고 문 빗장을 지른 것은, 바로 나다. "여기까지는 와도 된다. 그러나 더 넘어서지는 말아라! 도도한 물결을 여기에서 멈추어라!" 하고 바다에게 명한 것이 바로 나다.]





● 여보, 이젠 죄짓지 맙시다
시인 김수영은 <어느날 古宮을 나오며>라는 시에서 너무나 작아진 우리의 모습을 자기의 모습에 투영해서 보여줍니다. 그는 자기가 독재자들의 잘못과 음탕함에 대해서 분개하지 못하고, 50원 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항의하거나 월남 파병에 반대하지 못하고, 땅주인이나 관료들에게는 반항을 하지 못하고 기껏 이십 원을 받으러 오는 야경꾼들을 증오하는 사람이 자기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탄하듯 말합니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정말 얼마큼 적으냐…” 이 시를 보면서 김수영이라는 사람의 용렬함을 멸시하는 사람은 자기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그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요?

우리는 너무 작아졌습니다. 마음은 옹색해지고, 전망은 협소해졌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 하고 살라고 권고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를 염려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게 바른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반대로 살고 있지 않은가요? 차지하고 사는 공간은 넓어졌고 누리고 사는 것도 많아졌지만, 우리 정신의 크기는 날이 갈수록 작아지는 것 같습니다. 요즘은 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면 아파트 값 이야기뿐입니다. 옛말에 치빙전렵 영인심발광 馳騁田獵 令人心發狂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냥에 미쳐 날뛰는 것이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말을 타고 달리다가도 영혼이 미처 따라오지 못할까봐 가끔 멈춰서곤 했다는 인디언들의 이야기가 새삼스럽게 떠오르는 요즘입니다.

제가 아는 어느 분이 아내와 네팔을 다녀왔습니다. 그는 페와 호수에서 뱃놀이를 하면서 바라본 히말라야 영봉(靈峰)에 반했다고 하더군요. 어느 순간 그는 호수 물결 위에 비친 그 영봉의 빙설(氷雪)이 은빛 비늘로 부서지며 소용돌이치는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옆에 있던 그의 아내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하더랍니다. “여보, 이젠 죄 짓지 맙시다!” 이야기 끝에 그는 “평생 가슴에 품고 갈 감동어린 풍경 한두 컷이 있다면 무거운 생이 한결 가벼워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누구라도 압도적인 크기 앞에 서면 자신의 유한함을 절감하기 않을 수 없습니다. 맑은 밤하늘의 별을 본다든지, 쉼 없이 출렁이는 바다 물결 앞에서 사람들은 말을 잊습니다. 더럽힐 수 없는 깨끗함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 너는 대체 누구냐?
우리는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벌어진 사건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밤새도록 애를 썼지만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시몬에게 주님은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자 많은 고기떼가 그물에 걸려들었습니다. 시몬은 그물을 건져놓고는, 즉시 예수의 무릎 앞에 엎드립니다.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눅5:9) 여기서 죄인이라는 말은 법적․도덕적 잘못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자기의 작음에 대한 자각이고, 하늘을 잊고 살아온 자기 삶에 대한 반성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현존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 앞에 서면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을 겪은 욥의 간절한 소망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겪는 부당한 현실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 납득할만한 설명을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깊은 침묵 가운데 계시던 하나님이 마침내 폭풍 가운데서 그에게 오셨습니다. 그리고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라고 욥을 책망합니다. 그리고는 그를 질문 앞에 세웁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거기에 있기라도 하였느냐?”
“누가 이 땅을 설계하였는지 너는 아느냐? 누가 그 위에 측량줄을 띄웠는지, 너는 아느냐?”
“무엇이 땅을 버티는 기둥을 잡고 있느냐?”
“바닷물이 땅 속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누가 문을 닫아 바다를 가두었느냐?”

유구무언입니다. 욥은 자기가 세계의 중심이 아님을, 그리고 자기의 작음을 절감합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던 그 세계가, 아니 너무 가까이 있어서 의식조차 하지 못했던 그 세계가, 그리고 그 세계의 조화로운 질서가 나의 노력과 무관하게 그곳에 있음을 그는 처음으로 자각했습니다. “왜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냐”고 비명을 질러대던 그에게 하나님은 그 큰 세계를 보여주시면서 “너는 대체 누구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때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말이 끊어진 자리, 바로 그곳이야말로 하나님의 신비와 만나는 곳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세상과 만나는 두 가지 방식
우리가 세상과 만나는 방식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나의 필요에 따라 조작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자연을 지배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둑을 쌓아서 강물의 흐름을 돌려놓기도 하고, 바다를 막아 육지로 만들기도 합니다. 유전자를 조작하여 농산물을 만들기도 하고, 생명 탄생의 과정에 개입하기도 합니다. 인간은 어둠 가운데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창조행위에 가까이 다가갔다고 자부합니다. “네가 신처럼 되리라”. 뱀이 사람을 유혹할 때 한 말입니다. 황우석 교수의 배아줄기세포연구는 많은 기대와 염려를 동시에 안겨주고 있습니다. 불치병을 앓고 있는 이들에게는 복음이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하지만 생명조작이 빚게 될지도 모르는 위험을 내다보는 사람들은 인간이 드디어 무저갱의 문을 열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세상을 지배와 조작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문제는 자만심입니다. 사람들의 심성은 거칠어지고, 폭력은 더욱 늘어나고 있습니다. 사람이 만들어내는 인위적인 세상에서 사람들은 외롭습니다. 오락거리는 늘어나고 있지만 깊은 결속감정은 오히려 줄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과 만나는 두 번째 방식은 자연과 세상을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아직 때가 덜 묻은 아이들에게 세계는 온통 신기한 것뿐입니다. 어느 신학자의 첫 딸이 시계보는 방법을 배우고 나서 어느날 엄마에게 달려와서 말하더랍니다. “엄마! 일곱시 오분 전이라니 얼마나 놀라운 일이야!” 아이들에게는 사소하고 범상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돌이켜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가리키는 것도 바로 이것이 아닐까요? 놀라고, 찬탄하고, 기뻐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사람은 그야말로 병든 인간입니다. 경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은 세상을 쓸모의 관점에서 보지 않습니다. 쓸모없어 보이는 것 들도 우리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것들이 많습니다. 어느 철학자는 세상에 있는 것들은 모두 ‘초월자의 암호’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는 말일 겁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더 알기 쉽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알 만한 일이 사람에게 환히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환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이 세상 창조 때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사람이 그 지으신 만물을 보고서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롬1:19-20)

● 세계의 이면
눈에 보이는 세계의 이면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다는 말입니다. 분주한 마음으로는 볼 수 없고, 욕망으로 벌개진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또 다른 세계 말입니다. 하지만 마음이 고요해진 사람의 눈에는 풀 한 포기도, 풀 위를 기어가는 달팽이 한 마리도 소중합니다. 그것은 저마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가지고 우리 앞에 오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눈을 가진 사람들은 풀 한 포기 속에 깃든 우주를 봅니다. 그 풀 한 포기를 만들기 위해 해와 달과 별, 그리고 바람과 비, 미생물과 벌레들이 함께 일했음을 보는 것입니다. 어느 시인은 유자차를 마시다가 문득 자기가 마시는 것이 “지난 여름 어느 날/아무도 몰래/어느 유자나무 위로/내려앉은 햇살”임을 자각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살면 외롭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가 만나는 모든 것들이 다 이웃이니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이처럼 거칠어진 것은 세상과 우리의 관계가 왜곡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자연과학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일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영혼이 살기 위해서는 경이의 마음으로 세상과 만나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경이로움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렸습니다. 경이로움에 대한 감각을 잃었다는 말은 하늘을 잃어버렸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경이로움이란 아무 것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마음입니다. 시편 139편의 시인은 어느 날 문득 자기가 있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를 붙들고 계시다는 사실을 경이롭게 자각합니다. 그래서 노래합니다.

“내가 이렇게 빚어진 것이 오묘하고 주님께서 하신 일이 놀라워, 이 모든 일로 내가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내 영혼은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압니다.”(시139:14)

삶이 힘겹다고 느껴질 때면 가끔은 한적한 곳을 찾아가 조용히 머물러 보십시오. 홀로인 것 같아서 외로울 때면, 자기 삶의 이유를 찾을 길이 없어서 낙심될 때면, 우리 앞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집중해보십시오. 세상에서 우리가 누리고 살고 있는 어떤 것도 당연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은총으로 충만한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말이 끊어진 자리에서 욥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신비 앞에서 말문이 막혔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42:3, 5)

놀라운 고백입니다. 말이 끊어진 자리야말로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는 자리일 수 있습니다. 앞만 보고 달려가던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영혼의 눈을 떠 세상을 바라보면,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세상을 환하게 밝히는 이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5년 06월 19일 14시 25분 09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