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26. 피흘림이 없는 땅
설교자 김기석
본문 창4:8-15
설교일시 2005/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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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흘림이 없는 땅
창4:8-15
(2005/6/26)

[가인이 아우 아벨에게 말하였다. “우리 들로 나가자.”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주께서 가인에게 물으셨다.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주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무슨 일을 저질렀느냐? 너의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는다. 이제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다. 땅이 그 입을 벌려서, 너의 아우의 피를 너의 손에서 받아 마셨다.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이제는 너에게 효력을 더는 나타내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 땅 위에서 쉬지도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될 것이다.” 가인이 주께 말씀드렸다. “이 형벌은 제가 짊어지기에 너무 무겁습니다. 오늘 이 땅에서 저를 쫓아내시니, 하나님을 뵙지도 못하고, 이 땅 위에서 쉬지도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일곱 갑절로 벌을 받을 것이다.” 주께서는 가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

● 하나님의 자유 앞에서
어제는 6.25전란이 발발한지 55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그 긴 세월 동안 우리는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눈 채 살아왔습니다. 인종적․문화적․언어적 동질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끄러운 역사입니다. 어제는 최전방 GP에서 벌어진 참극의 희생자들의 장례식이 열렸습니다. 텔레비전을 통해 그 광경을 보면서 20여년 전 제가 군목으로 있던 부대에서 벌어졌던 총기 사고로 아들을 잃은 어머니가 “악아, 엄마가 업어줄게”하며 영정을 등에 업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죽은 이들과 그 가족들의 고통도 고통이려니와 살아남은 병사들이 평생 동안 짊어지고 가야 할 악몽을 생각하면 기가 막힙니다. 분단상황은 이처럼 우리의 기억과 삶에 선명한 핏빛으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이번 주에 있었던 남북 장관급 회의는 그런 의미에서 아주 소중한 디딤돌 하나를 놓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통일까지의 길은 멀고도 험할 겁니다. 하지만 길이란 처음부터 있는 것이 아니고, 한 두 사람이 걷고, 또 그 뒤를 이어 다른 사람들이 걸어가면서 생기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렇기에 남북간의 교류와 협력의 증대는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남북 장관급 회담에서 합의한 12개항의 합의문이 얼마나 성실히 이행될 것인지는 아직 불분명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희망의 단초를 마련했습니다.

남북의 분단상황을 생각할 때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북한은 가인이고 남한은 아벨이라고 막바로 동일시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물론 6.25전란이 북한의 기습 남침에 의해 시작된 것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 당시에 북한이 가인의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더 깊은 뜻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 사이에 벌어진 형제간의 비극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유 때문에 벌어집니다. 하나님은 가인이 바치는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이 바치는 제물은 받으셨습니다. 이것을 두고 하나님이 곡식보다 고기를 더 좋아하신다고 말한다면 그건 코메디일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을까? 칼빈주의적인 전통에서는 그 이유를 가인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나중에 동생을 돌로 쳐죽인 것을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런 해석은 합리적이기는 하지만, 성경이 드러내려는 본래의 메시지를 약화시킨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성경은 오히려 하나님의 선택의 신비를 인간이 꿰뚫어 알 수 없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배하시는 세상에서 선과 악은 뒤얽혀 있습니다. 선한 자가 고통받고, 악한 자가 잘 되기도 합니다. 이게 적나라한 우리의 현실입니다. 욥이나 시편의 탄식시의 시인들이 직면했던 현실이 바로 이것입니다.

● 비극이 새겨진 땅
이런 현실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두 가지 선택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현실을 현실로서 받아들인 채 살아가는 길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현실의 질서를 전복하는 것입니다. 가인은 후자에 끌렸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의 속마음을 꿰뚫어보시면서 경고를 하십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7)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차별에 마음이 상한 가인은 그 소리를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그는 아벨을 들로 유인하여 쳐 죽이고 맙니다. 아벨이 무슨 죄가 있단 말입니까? 가인은 복수의 표적을 바꿨던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복수할 수 없으니까 자기보다 약한 동생을 표적으로 삼은 겁니다. 이게 사람입니다. 직장 상사에게 야단맞은 말단 직원은 화를 풀 길이 없으니까 집에 돌아와 괜히 아내에게 화를 내고, 기분이 나빠진 아내는 애꿎은 아이에게 화를 내고, 영문을 모른 채 야단을 맞은 아이가 지나가는 강아지를 걷어찬다지 않습니까? 폭력은 이처럼 악순환하게 마련입니다.

가인은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하나님의 물음에“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하고 대꾸합니다. 이것은 죄에 삼켜진 인간의 말입니다. 형제자매를 사랑으로 돌보는 것은 인간됨의 기본입니다. 그런 책임을 방기하는 것은 스스로를 비인간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한다”고, 그리고 억울한 피가 흐른 그 땅은 황폐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땅을 일구며 살았던 가인에게 그보다 더 큰 형벌은 없을 것입니다. 그는 이제 도망자 신세가 되어 생명력이 없는 땅을 경작해야 합니다. 무고하게 죽어간 자의 억울함이 신원되지 않은 땅은 황폐한 땅입니다. 저는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을 적셨던 동족들의 피를 기억합니다. 이땅 어디에도 억울한 피가 흐르지 않은 곳은 없습니다. 저는 시인 김종삼 님의 <民間人>이라는 시를 접했을 때 전율을 느꼈습니다.

1947년 봄
深夜
黃海道 海州의 바다
以南과 以北의 境界線 용당浦

사공은 조심 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嬰兒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水深을 모른다.

배에 탄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아기를 바다에 던져야 했던 어머니의 그 비통한 마음을 시인은 그렇게도 건조한 문체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일체의 감상이 배제되어 있기에 더욱 우리 가슴에 큰 울림이 되어 다가옵니다.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水深을 모른다”는 시구에서 독자들은 시인이 느끼는 아픔의 깊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특히나 이 시의 제목 <민간인>은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분단의 희생자들은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의 이웃들입니다.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이 땅 도처에 이런 비극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제 밥은 먹고 살만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정신 속에 새겨진 상처는 아물지 않고 있습니다.

● 폭력의 고리를 끊고
가인은 들이대듯 자신에게 육박해오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비로소 현실을 자각합니다. 그리고 두려움에 몸을 떱니다.
“나의 죄벌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찌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13-14)

사람은 이렇게도 약한 존재입니다. 그는 형제를 향해 무자비한 폭력을 가했지만, 자신에게 다가오는 위험을 내다보면서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그는 비로소 자기가 처한 상황의 심각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자비를 구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본문의 본래의 메시지에 접근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가 겪어야 할 고통을 면제해주시지는 않지만, 가인에게 표를 주어서 그의 살 권리를 인정해주십니다. 참 이상하지요?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불순종으로 인하여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린 가인의 보호자를 자처하고 계십니다. 죄 지은 자조차 부둥켜 안고 가려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당신을 조롱하는 사람들과 처형한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빌었습니다. 예수님은 더할 수 없는 사랑의 힘으로 폭력의 고리를 끊으셨습니다. 미움을 미움으로 갚지 않고, 사랑으로 미움을 이기신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가인이 악인이었다는 사실을 증언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 이야기는 나와 남을 비교하면서 서로의 차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음이 얼마나 파괴적일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죄 지은 사람의 살 권리도 인정해주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언제든 불러만 주면 기꺼이 달려나올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는 죄와 아름다운 삶의 가능성이 함께 웅크리고 있습니다. 누구를 자주 호출하느냐가 우리 인생을 결정합니다. 요한서신의 저자는 말합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3:14)

형제 사랑과 영생을 이렇게 분명하게 연결시킨 구절은 다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누가 믿음의 사람입니까? 죄 지은 형제를 용서하고, 나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용납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믿음이 좋아보이지만 더욱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잘못된 믿음입니다. 다양성을 수용하려는 열린 마음, 그리고 다른 이들을 내 뜻대로 장악하려는 마음을 억제하는 능력이야말로 믿음의 척도입니다.

● 씨 뿌리는 사람
이제 이 땅에서 다시는 무고한 생명들이 죽임을 당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들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자를 내쫓아야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즐기는 컴퓨터 게임들의 폭력성은 알게 모르게 우리 마음을 거칠게 만들고 있습니다. 간접적일망정 우리가 경험하는 폭력은 우리에게서 부드러움을 제거해버리고, 친절과 자비심에 무감각한 사람이 되게 만듭니다. 이게 무서운 겁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폭력에 젖어드는 것입니다. 사랑하며 살기에도 짧은 세상인데, 우리는 너무 거칠어졌습니다. 진부하고 상투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우리는 사랑 노래를 계속 불러야 합니다. 친절과 이웃에 대한 배려를 말해야 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치 않으면 죄가 문에 엎드리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사람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이루자고 주님은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만나는 이들의 가슴에 평화의 씨앗을 심고, 우리가 사는 세상에 생명의 씨앗을 심는 일보다 거룩한 일은 없을 겁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씨 뿌리는 사람>이라는 그림이 생각납니다. 지평선 끝에서는 해를 중심으로 금빛 화살이 사방으로 퍼져가고 있습니다. 농부는 씨앗 주머니를 한 손에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는 씨를 뿌리면서, 해를 등진 채 넓은 들판을 힘차게 걸어갑니다. 들판은 파란색 바다인양 일렁입니다. 저는 이 그림을 볼 때마다 가슴이 뜁니다. 우리가 일상속에서 심는 작고 소박한 평화의 씨가 생명 세상의 토대가 됩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설레게 합니다. 우리 모두 저 고흐의 농부처럼 씩씩하게 역사의 들판에 평화와 생명의 씨앗을 심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5년 06월 26일 16시 01분 57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