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27. 실상을 보는 눈
설교자 김기석
본문 마7:1-5
설교일시 2005/7/3
오디오파일 s050703.mp3 [6481 KBytes]
목록





















실상을 보는 눈
마7:1-5
(2005/7/3)

[너희가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심판하지 말아라. 너희가 남을 심판하는 그 심판으로 하나님께서 너희를 심판하실 것이요, 너희가 되질하여 주는 그 되로 너희에게 되어서 주실 것이다. 어찌하여 너는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남에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줄 테니 가만히 있거라' 하고 말할 수 있겠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그 때에 눈이 잘 보여서, 남의 눈에서 티를 빼 줄 수 있을 것이다.]

● 바라본다는 것
며칠 전 신문 가십란에 재미있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도둑들 몇이 어느 집 별장을 털었습니다. 귀금속을 다 훔치고 나오면서 보니까 허름해 보이는 가방에 골프채가 들어있더래요. 그것도 돈이 되겠다싶어 들고 나왔답니다. 그들은 그 골프채를 125만원 받고 팔았는데, 그것은 타이거 우즈가 메이저 대회에 연속으로 우승한 것을 기념하여 만든 기념 골프채로 수억 원을 호가하는 것이었답니다. 기사 제목이 뭔지 아세요? <안목 없는 도둑>입니다. 똑같은 물건을 보아도 어떤 이는 하찮은 것으로 여기고, 어떤 이는 보물로 여깁니다. 안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요즘 영상 동호회의 활동이 활발한데요, 인터넷상에 회원들이 찍은 사진을 서로 돌려보는 곳이 있습니다. 그걸 보면서 제가 느끼는 것은 역시 똑같은 사물이나 대상을 보아도 바라보는 방법이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다 카메라를 잘 다룹니다. 그 중에서도 박준영 선생의 사진이 참 좋습니다. 젊진 않지만 조항범 집사의 사진은 깊이가 있구요. 사진을 잘 찍는다는 것은 카메라를 어떻게 작동하느냐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대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더욱 중요합니다. 사진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세계는 내 눈이 보는 그대로의 세계입니다. 불평의 렌즈를 끼고 세상을 바라보면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감사의 렌즈를 끼고 바라보면 어느 것 하나 귀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의 눈 안에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날마다 만나는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거든, 그에게 어떤 문제가 있나를 먼저 찾지 마시고, 그를 바라보는 내 마음의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의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별을 좋아하는 까닭이 뭔지 아세요? 멀리 있기 때문입니다.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다워 보입니다. 사람에게는 대안동경(對岸憧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항상 저 건너편 언덕이 더 멋져 보이는 것이지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시골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시골 사람들은 도시인들을 부러워하지요. 하지만 잘 산다는 것은 다른 게 아닙니다. 나의 삶을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지금 이 자리를 꽃자리로 알고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그 말은 아무런 노력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내 꿈과 미래의 출발점은 바로 지금 여기임을 잊지 말자는 말입니다. 사람들의 병통은 가까운데 있는 것이나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까운데 있는 이들에게서 우리는 장점보다는 단점을 먼저 보게 됩니다. 문제는 그 단점을 사랑으로 덮어주고, 그가 그것을 극복하도록 도와주거나 기다려주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바울 사도는 사랑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7). 누가 좋은 사람입니까? 단점과 허물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단점과 허물이 많은 사람들을 품고 가려는 열린 마음의 사람입니다.

● 공격성, 자기 소외의 결과
예수님은 남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비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 어쩌면 수백 번씩 현실을 재단하고, 사람들의 값을 매깁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지요? 우리는 판단의 칼날을 마구 휘둘러 다른 이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히기도 합니다. 맘에 드는 사람과 싫은 사람, 기분 좋은 일과 기분 나쁜 일, 옳고 그름을 거의 습관적이라 할만큼 가르면서 살아갑니다. 물론 우리는 몸을 가지고 살기에 시비(是非)와 곡직(曲直)을 가리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참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오히려 시비와 곡직을 판단할만한 예리한 식견을 갖추어야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러한 판단이 기초하고 있는 자의성입니다. 옳고 그름의 기준이 변덕스러운 '나'가 될 때 진실은 자취를 감추게 마련입니다. 여러분, '나'라고 하는 이 물건(?) 믿을만 한가요? 그렇지 못하지요?

사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제일 모르는 사람이 자신입니다. 사람들은 홀로 있기를 두려워합니다. 왠지 아세요? 자기와 함께 있는 것처럼 불편한 게 없기 때문이에요. 남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자기와의 만남을 유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홀로 있는 시간이면 마치 거울 앞에 선 듯 자기를 보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현대인들이 고요함을 견디지 못하는 것은 자기의 실상을 대면하는 데서 빚어지는 불편함 때문입니다. 도무지 가만히 있지 못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들은 항상 분주합니다. 그렇기에 자기를 돌아볼 시간도 없고, 누군가를 돕기 위해 멈춰 설 수도 없고, 선하고 아름다운 일을 위해 다른 이들과 연대하지도 못합니다. 분주할수록 마음의 여백은 줄어들고, 외로움은 증대됩니다. 우울함도 깊어갑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이들에 대해 공격적인 사람이 되어 갑니다. 항상 다른 이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가장 올바른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 소외에 깊이 빠진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비난하는 것은 그가 비난받아 마땅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때 그의 처신이, 말투가 나의 감정을 상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도무지 심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옳고 그름에 눈감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어중간한 중간을 취함으로 다른 이의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라는 처세훈도 아닐 겁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는 다른 이의 행동이나 존재를 제멋대로 판단하고 정죄할 자격이 없음을 알라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 사람이 지금은 그렇게 처신했지만 다음에는 달리 처신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그렇게 열려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천사와 악마의 투기장'입니다. 악마가 승리할 때도 있지만 천사가 승리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떤 사람의 개별적인 행동 몇 가지를 보고, 그를 나쁜 사람으로 혹은 비겁한 사람으로 규정하면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조금 이야기의 각도를 돌려볼까요? 사람이 자기가 선한 사람인 것을 증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스스로 선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를 대하든지 함부로 대하지 않고, 모든 존재를 귀히 여기고, 제 몫을 챙기는 일에 앞장서지 않으면 됩니다. 다른 하나의 방법은 다른 사람이 나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건 참 졸렬한 방법이고 그렇게 효과적이지도 않은 방법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방법을 자주 사용합니다. 누군가를 비판하는 데 재빠른 사람을 신뢰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니까 남을 비난함으로써 자신의 선함을 입증하려는 사람은 스스로 제 무덤을 파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 오지랖은 넓지만 팔이 짧구나
그러면 예수님은 모든 비판 혹은 판단을 금지하고 계신 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금하시는 비판은 한 존재에 대한 미움과 멸시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건전한 비판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누군가로부터 질정(叱正)을 받지 않고는 우리 정신이 자랄 수 없습니다. 남에게 배울 생각이 없는 닫힌 정신만이 비판받기를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옳은 것이라 해도 모든 비판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를 질정해주기 위해서는 먼저 그에 대한 존경과 애정이 있어야 합니다. 존경과 애정이 없는 비판이라도 해도,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이라면 귀하게 받아들일 겁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정한 비판, 애정이 담기지 않은 비판 앞에 설 때 자기 방어적이 되게 마련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 '에고'를 더욱 강화함으로써 자기를 지키려한다는 말입니다. 생명이 자라기 위해서는 적당한 온도가 필요하듯이 존재의 변화는 사랑이라는 품에서만 일어납니다. 오지랖은 넓지만 팔이 짧은 게 문제입니다. 시인 김지하는 <사랑>이라는 시에서 "누굴 보듬어 안을 만큼/팔이 길었으면 좋겠는데/팔이 몸통 속에 숨어서/나오기를 꺼리니" 기다려볼 수밖에 없겠다고 노래합니다. 내가 문제임을 알고, 내가 먼저 변해야 함을 알고 끈질기게 노력하면 몸통 속에서 팔이 나올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군가의 허물을 들추어내고, 비판하기를 좋아하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3)

이게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티'와 '들보'는 매우 충격적인 대조입니다. 흑백의 대비만큼이나 선명합니다. 이것은 자기의 허물을 더 통렬하고 아프게 돌아보라는 말일 겁니다. 우리는 남의 허물은 크게 보고, 자기 허물은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처럼 살고 있습니다. 내게는 못나 보이는 사람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소중한 사람입니다. 왠지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사랑스런 사람입니다.

저는 비노바 바베라는 인도인의 말을 참 귀하게 여깁니다. 그는 부단 운동을 벌인 사람입니다. 부단 운동이란 지주들로 하여금 땅 없는 사람들을 위해 땅의 일부를 헌납하는 운동입니다. 그는 부자들에게 만일 아들이 다섯이라면 여섯이라고 생각하고 땅을 여섯으로 나눠 그 한 몫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고 권고했습니다. 거의 불가능한 제안처럼 보이지만 그는 많은 땅을 헌납받아 가난한 사람들을 정착시켰습니다. 부자들을 설득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는 그 일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옳은 일이고, 아름다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람들 속에 있는 선의 씨앗을 보았고, 그것이 싹을 틔우도록 도왔습니다.

"내가 지주를 만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에게는 많은 잘못과 단점이 있고, 그의 이기심은 높은 담벼락처럼 완강합니다. 하지만 그에게도 작은 문이 있습니다. 그의 마음에 선량함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문을 찾을 의지만 있다면 당신은 당신 자신의 이기심을 극복하고 그의 삶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의 결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고 문을 찾으십시오. 나는 모든 자본가와 지주에게서 그 작은 문을 찾고 있습니다. 그 문을 찾지 못한다면 그것은 내 잘못입니다. 다시 말해 나는 그의 단점들을 내 머리로 들이받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대할 때 마치 담벼락 앞에 서있는 것처럼 암담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에도 작은 문은 있게 마련입니다. 그 문을 찾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 잘못입니다. 예수님은 그 문을 발견하는 명수이셨습니다. 생명의 실상을 보는 눈이 열리면 우리는 무정하고 냉정한 사람들의 마음에 숨겨져 있는 사랑의 가능성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의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능성을 보았고, 그 가능성을 일상의 삶 속으로 이끌어냈습니다. 저는 이것이 참된 혁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참된 진보란 '사랑으로 보듬어 안는 것'이랍니다. 주님은 우리가 스스로를 혁명함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혁명의 씨앗들이 되라고 요구하고 계십니다. 편견, 선입견, 두려움, 미움의 들보를 빼고 보면 귀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의 눈매가 이러한 주님의 눈매와 닮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5년 07월 03일 13시 27분 54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