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29. 본이 된 사람
설교자 김기석
본문 고전10:31-11:1
설교일시 2005/7/17
오디오파일 s050717.mp3 [6184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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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이 된 사람
고전10:31-11:1
(2005/7/17)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여러분은 유대 사람에게도, 그리스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교회에도, 걸림돌이 되지 마십시오. 나도 모든 일을 모든 사람의 마음에 들게 하려고 애씁니다. 그것은, 나 스스로의 이로움을 구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의 이로움을 구하여, 그들이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인 것과 같이, 여러분은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 너만은 좀 멋지게 살아라
여러분께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만일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의 아들딸들이 "나는 딱 아빠처럼 혹은 엄마처럼 살 거야"라고 말한다면, 대견해 하면서 뛸 듯이 기뻐하실 분이 혹시 계신가요? 그런 분이 계시다면 그분은 정말 멋진 분이거나, 이마에 좀 열이 많은 분일 겁니다. 우리 나라 부모들의 교육열은 세계적으로 정평이 나있는데, 그런 열정의 이면에는 '너희는 나처럼 살지 말라'는 염원이 있는 것 같아요. 이 말은 지금 우리가 잘 살고 있지 못하는다는 사실을 반증해주는 것이겠지요. "나는 제대로 살아보지 못했지만 너만은 좀 멋지게 살아라." 이게 부모의 염원입니다.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실망하는 때는 언제입니까? 물론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때이겠지요. 하지만 자신의 부정적인 모습을 아들과 딸이 반복하고 있음을 자각할 때는 아찔한 느낌이 들게 마련입니다. 엄마와 아빠는 아기가 태어나면 아기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자신을 닮았는지 확인해 보고는 흐뭇해합니다. 그런데 자식이 자기 성격을 닮은 것은 영 못마땅해합니다.

자식들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부모가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대개 자기 분열을 경험하며 삽니다. '되고 싶은 나'와 '현실의 나'는 다릅니다. 이 분열이 우리를 아프게 만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 자녀들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말씀하시기를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마23:3)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리새인의 경건에 대한 심판 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부모는 바리새인을 닮았습니다. 삶으로 본을 보이지 못하니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독자적인 생명입니다. 삶의 몫은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게으름으로 인해 자기 몫의 삶을 방기하는 것도 죄이지만, 남을 추종하느라 자기 삶에 성실하지 못한 것도 죄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원본'(original)으로서 살아야 합니다. 내 삶을 대신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 삶을 제대로 살아내기 위해서는 좋은 길 안내자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길'이라 고백합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과 가르침이야말로 사람이라면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길을 걷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살다보면 그 길에서 벗어나기 일쑤입니다. 길잡이가 필요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본이 되는 사람이야말로 길잡이입니다.

사도 바울 선생님은 '그 길'을 벗어나 방황하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여러분은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하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자칫 잘못하면 아주 교만한 말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말에서 우리는 거부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분이 어떻게 살았는지 성서를 통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삶을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이라는 한 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 한 마디 속에 그의 삶의 비밀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말은 그분이 하신 일을 앵무새처럼 반복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을 떠돌기 일쑤인 우리 정신을 자꾸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되돌리면서, 순간 순간마다 이런 상황에서 주님이시라면 어떻게 처신하실까를 물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 선생님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자기로부터 해방된 사람"이고, "하늘 아버지로 가득 채워진 사람"입니다. 그러면 바울 사도의 삶에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많지만 이 시간에는 고린도전서에만 국한해서 몇 가지를 찾아보겠습니다.

● 사랑의 빚진 자처럼
기본적으로 바울 선생님은 자기 삶이 온통 사랑의 빚임을 잊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각자가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모두가 받은 것인데, 왜 받지 않은 것처럼 자랑합니까?"(4:7) 우리가 구원받은 것도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고, 우리가 누리고 살고 있는 것들도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이 말이 실감이 안 날 수도 있지만,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다만 그것을 가공하고 변형시켜 사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 있는 어떤 것도 우리가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욕망을 절제하면서 조심조심 살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땅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선생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경기에 나서는 사람은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9:25). 욕망을 절제하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본받기 어렵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속에서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는 변덕스런 욕망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서 너무 멀리 벗어난 자신을 발견하게 마련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엇에 홀린 듯이 살아갑니다. 그 홀림의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무엇이든지 조금씩 덜어내며 살면 됩니다. 다이어트를 하는 이들이 밥을 한 숟가락씩 덜어내고 먹는 것처럼, 웃자란 나뭇가지를 쳐주듯이, 우리 욕망을 절제하는 데서 영적인 힘이 생기는 법입니다.

● 매이지 않은 삶
바울 선생님에게서 배우는 또 다른 삶의 모습은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는 그분의 영적인 자유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사신 몸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의 노예가 되지마십시오"(7:23) 온갖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바울 선생님이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확고한 자기 정체성 때문입니다. 그를 강제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때로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어떤 사람의 생각을 추종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양보해도 되는 일이라면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삶의 원칙과 관련된 문제라면 그건 심각한 문제입니다.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기 신앙에 위배되는 일을 한다면 그 순간 우리 영혼의 추락은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절 한 번만 하면 천하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겠다는 사탄의 제의를 한 마디로 거절합니다. 한번 절한 사람은 열 번도 절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삶의 원칙을 지켜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융통성이 없다느니, 그래 가지고 세상을 어떻게 살려 하느냐고 하면서 괴롭힙니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그를 소외시킵니다.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유혹이나 시련에 직면할 때마다 '나는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사신 몸이다' 하고 스스로에게 다짐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yes-man'이 아닙니다. 'no' 할 것은 'no'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영적인 자유가 발생합니다. 누구도 우리를 강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앙의 비밀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바울 선생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9:19). 어느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았지만,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자유. 이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자유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자기 좋을 대로 살지 않습니다. 다른 이들의 유익을 구합니다. 바울 선생님은 만나는 모든 사람의 삶의 자리에 내려섰습니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율법 없는 사람에게는 율법 없는 사람처럼,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믿음이 약한 사람처럼 처신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옛말에 '君子不器'(<<論語>>, 爲政篇 12章)라는 말이 있습니다. 군자는 그릇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릇이란 각각의 용도에 맞게 만들어져서 다른 일에 쓰일 수가 없지만, 군자는 어느 곳에 가든 조화롭게 적응할 줄 알면서도 자기의 본질을 잃지 않는 것이 군자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그런 의미에서 군자였습니다.

● 덕 세움, 하나님의 영광
바울 선생님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늘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할 것으로 제시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나의 행동 하나하나가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인가를 늘 물으며 살라는 것입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8:1). 내가 남보다 더 많이 안다 하는 교만한 자부심이 한 공동체를 얼마나 어지럽게 만드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남을 세심하게 배려해주는 사랑이야말로 한 공동체를 세우는 힘입니다. 나에게는 거리낄 게 없는 행동이라도 다른 이가 시험에 들 수 있다면 절제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나도 모든 일을 모든 사람의 마음에 들게 하려고 애씁니다. 그것은, 나 스스로의 이로움을 구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의 이로움을 구하여, 그들이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10:33).

둘째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10:31). 밥을 먹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물을 마시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을 하는 것도, 사랑을 하는 것도 다 철두철미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하라는 것입니다. 좀 막연한가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먹는 것은 제대로 먹고, 배고픈 사람과 나누어 먹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마신다는 것은 목이 마른 사람과 부족한 물을 나누어 마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하는 일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생명을 잘 돌보고, 죽어가는 생명을 되살리는 일이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삶입니다. 또 분열과 불화로 평안할 날이 없는 세상에 하늘의 평화를 가져가기 위해 애쓰는 일이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조금씩 신앙적 나태함을 벗고 예수님이 앞서 걸으시고, 바울 사도가 그 뒤를 따르고, 이후에 많은 거룩한 성도들이 걸어갔던 그 길을 따라 걷는다면 우리도 누군가에게 본이 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식들에게 반면교사가 아니라 정면교사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너무 늦은 때는 없습니다. 자각하는 그 때야말로 새로운 삶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불행은 삶의 본이 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있는 우리들이 방황하는 현대인들에게 참 멋진 삶의 본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5년 07월 17일 13시 32분 27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