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31. 희망의 문
설교자 김기석
본문 롬5:1-5
설교일시 2005/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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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문
롬5:1-5
(2005/7/31)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금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믿음으로> 나아오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될 소망을 품고 자랑을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을 자랑합니다. 우리가 알기로, 환난은 인내력을 낳고,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그의 사랑을 우리 마음속에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얼굴에는 그 사람이 살아온 세월의 이력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잘 생기고 못 생기고를 떠나서, 기품이 서려있는 얼굴이 있는가 하면 세월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어서 찌들어버린 얼굴도 있습니다. 화가들은 성자들의 얼굴에서 드러나는 기쁨과 평화와 순결함을 빛으로 드러내곤 했습니다. 후광(halo)이 바로 그것입니다. 얼굴을 '얼'의 '골짜기'라고 말한 분이 있습니다만, 얼굴은 우리가 지향하는 바가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마음이 환해지게 만드는 얼굴이 있는가하면, 저절로 마음이 위축되게 만드는 얼굴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얼굴은 어떠합니까? 한 시대를 풍미했던 어느 코메디언은 "못생겨서 죄송합니다"라는 말로 사람들에게 다가섰습니다. 못생긴 것은 죄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 얼굴이 드러내는 내면의 풍경입니다.

● 평안한 얼굴
기독교인의 얼굴에 나타나는 빛은 '평화'여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1)

우리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존재입니다. 여전히 허물과 죄 속에서 살아가지만 하나님을 향하여 끝없이 돌이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돌이킴을 하나님은 우리의 의로 여겨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허물이 없는 완벽한 사람이기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불의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세상에 살면서 허물을 짓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부끄럽기는 하지만 그 허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두려움 없이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용납하시고, 용서하시고, 새로운 길을 열어주시는 하나님 덕분에 우리는 평화롭습니다. 어려움이 없지는 않지만, 그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있는 힘이 하늘로부터 공급됨을 믿기에 우리는 당황하지 않습니다. 생의 폭풍이 몰려와도 고요함과 평화로움을 잃지 않습니다.

● 즐거움의 빛
기독교인의 얼굴에 나타나야 할 또 다른 빛은 '즐거움'입니다. 그 즐거움은 밖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밖에서부터 즐거움을 구하는 사람은 즐거움과 권태 사이를 시계추처럼 왕복하게 마련입니다. 염량세태炎凉世態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내게 세력이 있을 때에는 따르는 사람이 많지만, 권세가 없어지면 푸대접하는 게 세상 인심입니다. 밖에서부터 즐거움을 구하는 한 우리는 행복하기 어렵습니다. 행복과 즐거움은 우리 속에 있습니다. 지옥을 짓는 것도 우리이고, 천국을 짓는 것도 우리입니다. 지옥을 짓는 것은 우리가 전문가니까 말하지 않아도 아시지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마음에 천국을 지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금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믿음으로] 나아오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될 소망을 품고 자랑을 합니다(즐거워합니다).(2)

마음에 천국을 짓기 위해서는 우리 삶이 '고마움'임을 깊이 자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 덕분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그리스도 덕분에 우리는 새로운 존재로서 살아갈 수 있는 은혜의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에는 캄캄한 밤에도 우리의 길잡이가 되어주는 샛별 하나가 밝게 빛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되리라는 소망입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러야 할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함부로 살면 안 됩니다. 때때로 먹장구름이 푸른 하늘을 가리듯 고달픈 세상일들이 우리를 뒤흔들지만, 우리는 기어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러야 할 존재임을 잊지 마십시오. 생이 '고마움'임을 알고 '소망'을 품고 사는 사람은 이미 천국에 한 발을 들여놓고 삽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을 자랑합니다."(3a) 환난조차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일 겁니다. 물론 모든 환난이 다 자랑거리가 되는 것은 아닐 겁니다. 바울 사도께서 말하는 환난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쓰다가 겪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환난은 고난 당하신 예수님과 우리를 더 깊이 결속시켜줍니다. 예수님의 승천 이후 복음을 전하던 사도들이 공의회에 끌려가 매를 맞고 풀려났을 때 그들은 의기소침해졌습니까? 아닙니다.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것을 기뻐하면서, 공의회에서 물러나왔다."(행5:41)

모욕을 당한다는 사실이 기쁨일 수 있을까요?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그런 모욕과 환난을 통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에 서게 된 것을 기뻐했습니다. 이미 죽음을 넘어선 생명을 맛보았기에 가능한 일일 겁니다.

● 환난은 인내를
난감한 일을 만나면 마음이 위축되어 퇴행적인 행동을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잠깐 동안은 당황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걸림돌을 디딤돌로 삼아 생의 도약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신앙이란 연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보드라운 살 속에 박힌 모래알을 진주로 바꾸어내는 진주조개처럼, 우리 앞에 어떤 생의 재료가 당도하든 그것을 가지고 가장 아름다운 삶을 이루어내는 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까닭은 "환난은 인내력을 낳고,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3b-4)이라고 말합니다. 밴텀급 세계챔피언이었던 홍수환 씨를 아시지요? 저는 그분의 고백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가장 쓰라린 기억이 알고 보면 가장 빛나는 기억과 맞닿아 있다고 고백합니다.

"사실 복싱 시작단계에서 오른쪽 손등 골절로 인해 주먹을 거의 쓰지 못하는 지경이 됐었습니다. 그때부터 왼손의 파워를 기르는 훈련을 죽기살기로 시작했지요. 실상 지금까지도 오른 주먹은 어퍼컷을 빼고는 제대로 쓰질 못합니다. 왼손잡이 아닌 왼손잡이 복서가 돼야했던 일은 내게 가장 쓰라렸던 기억이지만, 바로 그 때문에 세계챔피언에 오르는 영광이 가능했지요. 그러니 인생에서 가장 쓰라린 기억은 그것을 극복하는 순간 가장 빛나는 기억으로 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통을 영광으로 바꾼 힘은 피나는 훈련이었습니다. 환난을 이기기 위해서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는 굳은 다짐과 그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더해져야 합니다. 왜 사는지를 아는 사람은 어떻게든 살 수 있습니다. '졸렌 sollen'이 있는 곳에는 '쾨넨 k nnen'도 있게 마련입니다. '당위성'이 있는 곳에는 '가능성'도 있다는 말입니다. 어려움을 견뎌내면서 우리는 점차 쉽게 무너지지 않는 검질긴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겁니다.

● 인내는 단련된 인격을
믿음 안에서 환난을 극복해가는 사람들은 품성의 변화를 경험하게 마련입니다. 어려움을 극복한 사람 가운데는 경직된 이들도 많은 게 사실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핏발이 서있고, 웬만해서는 다른 이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떡메로 많이 칠수록 반죽이 부드러워지듯이 주님 안에서 어려움을 겪어낸 사람들의 품성은 늡늡합니다(속이 너그럽고 활달하다). 그들은 독선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습니다. 이해의 폭이 넓어집니다. 마을 사람들을 가리지 않고 다 품어주는 동구 밖 느티나무 그늘처럼, 세상의 모든 물들을 다 받아들이는 바다처럼 그들은 모든 이들을 품어 안습니다. 바다는 어쩌면 다 받아들인다 하여 바다인지도 모릅니다. 바다 '해海'에는 어미 '모母'자가 들어있지 않습니까? 어머니는 못난 자식이라 하여 내치지 않습니다. 그냥 품어줍니다. 환난을 겪어낸 성도들의 품성이 그러해야 합니다.

그들은 자기 좋을 대로 살지 않습니다. 항상 다른 이들을 염두에 두고 살아갑니다. 수해 당한 이웃들이 울고 있는데, 그 옆에서 골프를 치지 않습니다. 수로에 몰려든 고기를 잡으려고 그물을 던지지 않습니다. 이런 마음을 옛사람은 '不忍之心', 즉 '차마 못하는 마음'이라 했습니다. 이 마음이 사라진 것이 우리 시대의 불행입니다. '나는 나고, 너는 너'라는 싸늘한 개인주의가 세상을 어둡게 만듭니다. 우리 시대를 한마디로 '不敬'의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경건이란 다른 게 아닙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대하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지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내놓는 밥이, 물 한 잔이, 태도가 하나님께 바쳐도 좋을지를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바로 이 마음이 환난과 인내를 통해 단련된 인격의 모습입니다.

●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단련된 인격에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 희망입니다. 希望에서 '希'는 '바란다'는 뜻도 있지만, '드물다'는 뜻도 있습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것이 희망입니다.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희망은 근본적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얻을 가능성이 없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에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실의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동포들에게 그곳에서 집을 짓고 과수원도 만들어 정착하라고, 아들딸을 낳아 인구가 줄어들지 않게 하라고, 사로잡혀 간 그 성읍이 평안과 번영을 누리도록 노력하라고 말했습니다(렘29:5-7). 이것은 패배의식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현실에 대처하라는 초대입니다. 아골 골짜기를 소망의 문이 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호2:15).

이런 근원적인 희망의 뿌리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 속에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사람은 결코 낙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희망의 연료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겪을 때 곁에 머물러 주는 가족과 친구의 사랑이 있어 우리는 용기를 잃지 않습니다. 그런 사랑이야말로 우리의 정신을 지탱해주는 든든한 토대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데 염려할 게 무엇입니까? 포기하거나, 낙심하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살다보면 어려운 일을 겪게 마련입니다. 믿음이 없는 이에게 그것은 시련이지만, 믿는 이들에게는 새로운 생으로 통하는 희망의 문입니다. 코브린의 랍비는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대가 어떤 일로 해서 고통받을 때 그것을 나쁜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신이 인간에게 주는 것에 나쁜 것이란 없다. 그 대신 '이것은 약간 쓰군'이라고 말하라. 왜냐하면 약 중에는 쓴 약초로 만든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살아갈 용기를 잃었을 때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든든히 붙잡고 계십니다. 어려움 때문에 우는 사람이 아니라, 어려움 때문에 더욱 아름다운 존재로 변화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5년 07월 31일 15시 05분 24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