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32. 너희 믿음대로 되라
설교자 김기석
본문 마9:27-31
설교일시 2005/8/7
오디오파일 s050807.mp3 [5867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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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믿음대로 되라
마9:27-31
(2005/8/7)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시는데, 눈 먼 사람 둘이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외치면서 예수를 뒤따라 왔다. 예수께서 집 안으로 들어가셨는데, 그 눈 먼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왔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느냐?" 그들이 "예, 주님!"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고 말씀하셨다. "너희 믿음대로 되어라."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엄중히 다짐하셨다.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아라." 그러나 그들은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지역에 퍼뜨렸다.]

● 누가 세상을 바로 보는가
열 두 해를 혈루증에 시달리던 여인은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댐으로써 병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었던 야이로의 딸의 손을 붙잡아 일으키셨습니다. 예수에 대한 소문은 마치 해안으로 밀려드는 파도처럼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바야흐로 인기 절정입니다. 하지만 예수는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그 자리를 떠납니다. 이게 바로 예수 정신입니다. 주님은 죽을 자리는 마다하지 않지만, 영광을 받는 자리에는 한사코 앉지 않으려 하십니다. 사람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옛 사람은 '功成而弗居'라 했습니다. 공을 세운 후에 그 단 열매를 따먹으려는 욕심이 사람을 병들게 만듭니다. 열심히 일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알아주지 않는다고 속상해하고 대접이 소홀하다고 삐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철부지들입니다. 그 일이 꼭 필요한 일이었고, 좋아서 했다면 그것으로 감사할 일입니다. 다른 이들의 반응에 따라 일희일비하지 말아야지요.

예수님은 기대에 찬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멀어집니다. 그런데 그 길에서 예수님을 따라오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 둘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향해 크게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그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곧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눈길이 온통 예수가 행하는 이적을 향하고 있을 때 그들은 그 이적을 넘어 예수의 존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빛을 잃어 앞은 보지 못하지만, 영혼의 빛은 꺼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의 두 눈이 우리를 속일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세상의 화려한 것들을 붙좇느라고 우리는 마음의 눈이 어두워지고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세상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정치인이나 신문 기자일 것 같습니까? 물론 이 세상의 이면에서 벌어지는 더러운 일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우리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 시대의 징조를 누구보다 빨리 알아차리는 것은 이 사회의 그늘진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정치인들이 아무리 장밋빛 청사진을 펼쳐보여도 밑바닥에서 살고 있는 이들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 그건 아닌 겁니다. 앞 못 보는 두 사람은 예수가 누구이신지를 꿰뚫어보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절박한 외침을 외면한 채 집 안으로 들어가십니다. 너무나 싸늘한 반응입니다. 그들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도 그들은 실망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실망은 어떠면 사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면서 천덕꾸러기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니 그런 냉담한 반응쯤은 문제가 될 수 없었을 겁니다. 앞 못보는 두 사람은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에 의지해 더듬더듬 예수를 따라갑니다.

● 절대 신뢰
마침내 예수님이 그들에게 말을 건네십니다. 거두절미하고 바로 핵심으로 돌입합니다.

"너희는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느냐?"(28)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이미 읽고 계셨습니다. '이 일'이란 눈을 뜨게 하는 일일 겁니다. 그들의 대답이 간결합니다.

"예, 주님!"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절대적인 신뢰입니다. 믿음이란 이런 것입니다. 조금의 유보도 의심도 없습니다. 이 문답의 간결함이 제게는 큰 충격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느냐?" 우리는 이런저런 문제들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갑니다. 개인적인 일도 있고, 공동체를 위한 일도 있습니다. 경제적인 문제도 있고, 진로에 관한 문제도 있고, 가족이나 친구간의 관계의 문제도 있고, 교회의 문제도 있습니다.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우리 사회나 테러와 전쟁의 공포가 끊이지 않는 지구촌에 평화의 열매가 맺히게 해달라고 우리는 기도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이 질문 앞에 서있습니다. "너희는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느냐?" 어떻습니까? 믿으십니까? 우리가 기도하는 그 일을 주님이 해결해주실 수 있다고 믿고 기도하십니까? 아니면 그냥 해보는 건가요?

저는 요즘 새벽기도 시간에 사무엘서를 강해하고 있습니다. 아기를 낳지 못하던 한나는 하나님 앞에 자기의 원통한 사정을 아뢰며 기도합니다. 그의 기도가 오랫동안 계속되자 엘리 제사장은 한나가 술에 취했다고 생각하고 그를 불러 꾸짖습니다. 하지만 한나는 자신이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을 하나님과 통하고 있었노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엘리는 한나를 축복합니다. "평안한 마음으로 돌아가시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대가 간구한 것을 이루어 주실 것이오." 성경은 한나의 반응을 이렇게 들려줍니다. "한나는 그 길로 가서 음식을 먹었다. 그리고 다시는 얼굴에 슬픈 기색을 띠지 않았다."(삼상1:18) 이런 절대 신뢰가 기적을 낳습니다.

● 성도는 기적의 수행자
우리가 구하는 것이 주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면, 주님은 이미 우리 기도를 들어주신 줄로 믿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기도의 응답을 기다리며 맥을 놓고 있으면 안 됩니다. 기도의 응답이 주어진 줄로 믿고, 그것을 삶 속에서 수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허락하셨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그 땅을 차지하지 않으면 그 약속은 허사가 되고 맙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이미 준비해놓으신 일들을 수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앞 못 보는 이들의 확신에 찬 대답을 들으시고는 그들의 눈에 손을 대고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믿음대로 되어라."(29)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사건을 창조하는 말씀입니다. 성서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고백합니다. 그 때의 말씀은 '다바르 Dabhar'입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창조의 에너지입니다. 거꾸로 말해도 됩니다. 세상에 넘치고 있는 창조의 에너지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숲을 산책하고 돌아와 경전을 읽고 돌아왔다고 말하는 시인은 그러니까 거짓말을 한 게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앞 못 보는 이들의 눈이 열렸습니다. 그들이 믿는 대로 된 것입니다. 앞 못보는 이들의 눈이 열린다는 것은 단순한 기적이 아닙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메시야의 시대가 열리는 징조를 "그 때에 눈먼 사람의 눈이 밝아지고, 귀먹은 사람의 귀가 열릴 것"(사35:5)이라고 예고했습니다. 앞 못보는 이들의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그러니까, 그들이 고백했던 대로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보여주는 징표인 셈입니다.

지금 우리 눈은 어떻습니까?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가 아닙니까? 중세의 신학자인 마이스터 에카르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믿음 가운데서 '볼' 수 있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신다', 이 얼마나 엄청난 말입니까? 하지만 이 말은 '하나님이 네 안에도 거하신다'는 사실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자신을 내팽개치듯 살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고, 아무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마음의 눈을 치유하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눈이 퇴화해버린 심해어처럼 우리 눈도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주님께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은 그럴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내는 소리가 아무리 작아도 그 소리를 들으십니다. 가끔은 하나님이 우리 영혼의 소리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 같아 답답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앞 못보는 두 사람이 낙심하지 않고 예수의 뒤를 따랐던 것처럼, 우리도 쉽게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구하는 자에게 주실 것이고, 두드리는 자에게 열릴 것입니다.

● 가슴에 불을 간직한 사람
본문에서 예수님은 눈을 뜨게 된 두 사람에게 엄격하게 이르십니다.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아라."(30)

아직은 당신이 누구신지 세상에 드러낼 때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아직 때가 이르지도 않았는데, 공연히 사람들 사이에 불필요한 논쟁을 불러일으킬 필요는 없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이 대목을 조금 달리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예수님은 말의 부질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과장과 억측과 빈정거림 속에서 진실은 가리워지고 맙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침묵을 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드러내실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지역에 퍼뜨렸습니다. 속에 불덩이를 간직한 사람이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감격을 맛본 사람들이 어떻게 입을 다물고 있겠습니까? 어쩌면 그들의 그 역동적인 모습은 맥없이 살고 있던 사람들의 가슴에도 불을 질렀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있다고 하는 사실이 우리 가정에 학교에 직장에 공동체에 어떤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까? 우울함과 짜증과 피로감이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식어버린 가슴에 기쁨과 평화와 사랑의 불을 지르라고 보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불씨를 얻기 위해서는 순간순간 주님께 귀의해야 합니다.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느냐?"라는 물음에 "예, 주님!" 하고 진심으로 대답할 때 기적은 이미 시작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손길이 우리의 마음에 닿을 때 우리는 새 사람이 될 것입니다. 마음을 어지럽히는 걱정과 근심과 좌절감을 다 주께 맡기십시오. 그리고 이웃들에게 웃음 띤 얼굴로 돌아서십시오. 주님과 가까이 있는 한 우리의 기쁨이, 그리고 희망이 줄어드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우리 생이 역동적으로 변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5년 08월 07일 13시 23분 2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