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33. 평화는 소명이다
설교자 김기석
본문 삼하19:16-23
설교일시 2005/8/14
오디오파일 s050814.mp3 [6268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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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는 소명이다
삼하19:16-23
(2005/8/14)

[바후림에 사는 베냐민 사람으로 게라의 아들인 시므이도 급히 와서, 다윗 왕을 맞이하려고, 모든 유다 사람들과 함께 내려왔다. 그는 베냐민 사람 천 명을 거느리고, 사울 집안의 종 시바와 함께 왔는데, 시바도 자기의 아들 열다섯 명과 자기의 종 스무 명을 다 데리고 나아왔다. 이들은 요단 강을 건너서, 왕 앞으로 나아왔다. 그들은 왕의 가족이 강을 건너는 일을 도와서, 왕의 환심을 사려고, 나룻배로 건너갔다. 왕이 요단 강을 건너려고 할 때에,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왕 앞에 엎드려서 말하였다. "임금님, 이 종의 허물을 마음에 두지 말아 주십시오. 높으신 임금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떠나시던 날, 제가 저지른 죄악을, 임금님께서는 기억하시거나 마음에 품지 말아 주십시오. 바로 제가 죄를 지은 줄을, 이 종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오늘 요셉 지파의 모든 사람 가운데서 맨 먼저 높으신 임금님을 맞으러 내려왔습니다."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그 말을 받아서, 왕에게 말하였다. "주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분을 시므이가 저주하였으니, 그것만으로도 시므이는 죽어야 마땅한 줄 압니다." 그러나 다윗이 말하였다. "스루야의 아들들은 들어라. 나의 일에 왜 너희가 나서서, 오늘 나의 대적이 되느냐? 내가 오늘에서야,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 같은데, 이런 날에, 이스라엘에서 사람이 처형을 받아서야 되겠느냐?" 왕이 시므이에게 맹세하였다. "너는 처형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 동요하지 않는 마음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다윗이라는 위대한 인물의 삶에도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 있습니다. 밧세바와의 부정한 관계를 은폐하기 위해 충직한 부하 장수 우리아를 죽음으로 내몬 일이 그 하나입니다. 시편 51편에서 다윗은 그때 자기가 저지른 죄를 슬퍼하며 통회 자복합니다. "나의 반역을 내가 잘 알고 있으며, 내가 지은 죄가 언제나 나를 고발합니다"(시51:3). 그는 자기 속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만큼 절박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삶 가운데서 가장 아픈 기억은 역시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 부자간에 죽고 죽이는 싸움을 했던 그 순간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기치 못했던 반란에 당황한 다윗은 도성을 버리고 피난길에 오릅니다. 그때의 참담한 광경을 사무엘서의 저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올리브 산 언덕으로 올라갔다. 그는 올라가면서 계속하여 울고, 머리를 가리고 슬퍼하면서, 맨발로 걸어서 갔다. 다윗과 함께 있는 백성들도 모두 머리를 가리고 울면서, 언덕으로 올라갔다."(삼하15:30)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식에게 쫓겨 올리브 산을 넘는 왕은 얼굴을 가린 채 흐느껴 웁니다. 그는 신발조차 벗어 던졌습니다. 그것은 수치를 당한 사람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왕을 따르는 사람들도 그 기막힌 광경에 말문이 막혀 함께 눈물을 흘리며 뒤를 따를 뿐이었습니다. 그들이 베냐민 지파의 땅 초입에 있는 바후림에 들어섰을 때 예상치 못했던 일을 만났습니다. 사울 왕의 친족 가운데 하나였던 시므이가 달려나와 왕에게 돌을 던지며 악담을 퍼부었던 것입니다.

"영영 가거라! 이 피비린내 나는 살인자야! 이 불한당 같은 자야! 네가 사울의 집안 사람을 다 죽이고, 그의 나라를 차지하였으나, 이제는 주님께서 그 피 값을 모두 너에게 갚으신다."(삼하16:7-8)

시므이는 다윗이 회복불능의 타격을 입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렇기에 조금도 주저 없이 다윗이 지금 겪고 있는 참극은 사울의 집안 사람들을 다 죽인 데 따르는 천벌이라고 말합니다. 군사령관 격인 아비새는 분기탱천해서 당장이라도 시므이의 목숨을 거둘 기세였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를 만류합니다.

"스루야의 아들아, 나의 일에 너희가 왜 나서느냐? 주님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고 분부하셔서 그가 저주하는 것이라면, 그가 나를 저주한다고, 누가 그를 나무랄 수 있겠느냐?"(삼하16:10)

다윗은 현실을 직시합니다. 가장 다급한 상황에 몰렸으면서도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냉철함을 잃지 않습니다. 시므이를 죽이면 화가 풀릴까요? 그 상황이 변하기라도 하나요? 그는 모욕을 견디는 쪽을 택합니다.

● 탁월한 정치 감각
결국 치열한 공방 끝에 치밀한 전략가였던 다윗은 전투 경험이 미숙한 압살롬의 반란을 진압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진압 과정에서 압살롬이 살해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는 가슴이 미어질 듯한 아픔을 맛보았습니다만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한번 흔들린 왕권을 회복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압살롬의 반역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서로 눈치만 보면서 선뜻 다윗을 맞으러 나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낌새를 알아차린 다윗은 정략가답게 사독과 아비아달 제사장을 자기의 든든한 지지기반이었던 유다 지파의 장로들에게 보내서, 자기를 영접하는 데 앞장 설 것을 은근히 종용합니다. 그들은 마치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일어나 왕을 맞으러 나갑니다.

그때였습니다. 왕에게 악담을 퍼부었던 베냐민 지파 사람 시므이도 왕 앞에 나타났습니다.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게 사람입니다. 다윗의 명운이 끝났다고 생각했었지만, 다윗은 이전보다 더 강력한 지도력을 행사할 게 분명해졌습니다. 그는 왕 앞에 엎드려 사죄합니다.

"임금님, 이 종의 허물을 마음에 두지 말아 주십시오. 높으신 임금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떠나시던 날, 제가 저지른 죄악을, 임금님께서는 기억하시거나 마음에 품지 말아 주십시오. 바로 제가 죄를 지은 줄을, 이 종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오늘 요셉 지파의 모든 사람 가운데서 맨 먼저 높으신 임금님을 맞으러 내려왔습니다."(19-20)

시므이는 약은 사람입니다. 그의 말을 가만히 뜯어보면 그가 정치적인 흥정을 시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사울 왕의 권력 기반이었던 북부 지파 사람들 가운데서 맨 먼저 왕을 맞으러 나왔음을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이 말 속에는 자기를 살려주는 것이 상대적으로 소외감을 느끼고 있는 북부 지파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눈치 없는 군사령관인 아비새는 그를 죽여야 한다고 말하지만 다윗은 시므이의 말에 담긴 속뜻을 이미 읽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아비새를 책망합니다.

"내가 오늘에서야,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 같은데, 이런 날에 이스라엘에서 사람이 처형을 받아서야 되겠느냐?"(22)

군자의 말처럼 들리지요? 하지만 이 말은 매우 정치적인 수사입니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의 정치지형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열 두 지파의 동맹체입니다. 하지만 크게 보면 사울의 권력기반이었던 북부 지파와 다윗의 권력기반이었던 남부 지파 사이에 갈등의 골이 깊었습니다. 다윗이 명실상부한 왕이 되기 위해서는 이런 갈등을 해소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사울이 죽은 후 상대적으로 차별 받고 있다고 느꼈던 북부 동맹 사람들을 끌어안지 않고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다윗은 시므이에게 정치 보복을 가하지 않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북부 지파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자 했던 것입니다. 시므이가 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묘한 정치적 틈새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시므이를 마음으로 용서한 것은 아닙니다. 그가 늙어 솔로몬에게 왕위를 물려줄 때 시므이에 대해서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너는 지혜로운 사람이니, 그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잘 알 것"(왕상2:9)이 아니냐고 하면서, 그가 평안히 죽음을 맞지 못하게 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정치인으로서의 다윗의 한계입니다. 그는 탁월한 정치가요 시인이기는 하지만, 위대한 영성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원수들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원수 사랑을 몸소 보여주신 예수님의 모습과는 좀 거리가 있습니다.

● 앙심을 놓아 버리라
우리는 벌써 남북 분단 60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60년의 세월을 보내면서도 여전히 갈라져서 살아간다는 것은 참 부끄러운 일입니다. 평화통일을 모색하는 우리에게 정치가로서의 다윗은 몇 가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다윗은 어떤 경우에도 감정적으로 처신하지 않았습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사람은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성을 점령한 사람보다 낫다"(잠16:32)는 말이 있습니다. 그는 냉철한 이성으로 상황을 장악해 나갑니다. 둘째로 다윗은 남북을 포용해야 할 자기의 시대적 사명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남북 관계에서 우리가 정치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의 한계 또한 분명합니다. 정치적인 실천이 정략적인 발상에만 기초한다면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만들 수 없습니다. 진실과 진정만이 얼어붙은 마음을 녹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의구심에 가득 찬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우리들의 역할이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평화를 원한다면, 우리 삶 속에서부터 평화를 연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미국의 평화 운동 단체인 '화해연대(Fellowship of Reconciliation)'의 총무인 존 디어(John Dear) 신부는 전쟁이나 폭력이 없는 새로운 세계를 원한다면 "바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 안에 있는 폭력을 뿌리 뽑고 우리에게 상처를 준 이들을 용서하고, 쓰라림과 앙심을 놓아 버리고 서로 화해하며, 하나님의 영이 자유롭게 우리 사이를 운행하시도록 자신을 열어야 한다"(<<살아 있는 평화>>)고 말합니다.

용서하고, 쓰라림과 앙심을 놓아버릴 수 있을 때 우리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평화에 합류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시므이에 대한 앙심을 죽을 때까지 풀지 못했습니다. 그는 행복했을까요? 그렇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을 사로잡고 있는 쓰라린 기억이 있습니까? 그것을 놓아버리십시오. 그것이 평화의 시작입니다. 주님이 평화의 왕이신 까닭은 그 속에 앙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우고 비우고 또 비워 하나님의 마음으로 충만하셨기 때문입니다.

평화 통일은 정치인들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우리들 속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분단 의식, 앙심, 미움을 버리지 않는 한 한반도의 평화는 없습니다. 금강산을 다녀온 사람이 백 만 명이 넘었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개성으로 가는 통근버스가 현대 사옥 앞에서 출발한답니다. 이런 남북간의 활발한 교류를 새로운 역사로 바꿀 힘은 사랑과 이해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서로를 받아들이려고 애쓸 때 우리는 '평화'라는 명품을 세계 앞에 내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평화는 선택이 아니라, 소명입니다. 테러와 전쟁의 소문이 들려오고, 가난과 굶주림이라는 '느린 폭력'이 평화를 위협하는 이 시대에 우리가 먼저 평화가 되어야 합니다. 더 많이 이해하고, 용납하고, 사랑으로 보듬어 안고, 나누고, 보살피다보면 우리는 새벽처럼 찾아오는 평화의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지레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걷는 평화의 길은 우리 주님께서 앞서 가시며 닦아놓은 길입니다. 그 길을 걸어 마침내 하나님 앞에 이르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5년 08월 14일 12시 29분 29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