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36. 의를 보살피시는 하나님
설교자 김기석
본문 대하 20:18-24
설교일시 200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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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를 보살피시는 하나님
대하20:18-24
(2005/9/4)

[여호사밧이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니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도 여호와 앞에 엎드려 여호와께 경배하고 그핫 자손과 고라 자손에게 속한 레위 사람들은 서서 심히 큰 소리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니라 이에 백성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이르되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하였으니 곧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세일 산 주민들을 쳐서 진멸하고 세일 주민들을 멸한 후에는 그들이 서로 쳐죽였더라 유다 사람이 들 망대에 이르러 그 무리를 본즉 땅에 엎드러진 시체들뿐이요 한 사람도 피한 자가 없는지라]

● 여호사밧의 다짐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그 시대에 맞는 역할을 부여하십니다. 크든 작든 자기 몫을 성실히 감당하는 사람들을 보면 흐뭇합니다. 하지만 자기 몫도 감당치 못하면서 오지랖 넓게 이 일 저 일 참견하는 사람들을 보면 딱합니다. 옛 사람들은 윗자리에 앉은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를 몇 가지로 요약해줍니다. 첫째는 너그러움입니다. 지도자에게는 관대하게 남을 받아주고, 너그럽게 감싸주는 아량이 필요합니다. 둘째는 공경스러운 자세입니다. 아랫사람을 대할 때에 존중하는 마음이 없다면, 아무도 신나게 일할 수 없습니다. 셋째는 남의 아픔을 함께 슬퍼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남의 어려움을 자신의 어려움으로 느낄 수 있는 따뜻함과 예민함이 있어야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 시대에는 이런 지도자를 만나기가 참 어렵습니다.

여호사밧은 유다의 임금 가운데서 가장 긍정적인 지도력을 가진 사람 중 하나입니다. 아버지 아사의 뒤를 이어 35세에 왕이 된 그는 25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공도 있고 과도 있지만, 과보다는 공이 많은 왕입니다. 그는 이방의 종교 의식에 참여하지 않고, 하나님께 만 헌신한 왕입니다. 전쟁시기에 왕으로 세움 받은 그는 안보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국경 지대를 요새화했습니다. 그리고 높은 곳에 세워진 산당과 아세라 목상을 제거했습니다. 아세라는 다산 및 식물의 여신으로 바알의 짝으로 통했습니다. 그 종교의식은 대개 성적인 방종과 결합되곤 했습니다. 그가 아세라 목상을 제거한 까닭은 "오직 주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살기로 다짐 His heart advanced in the ways of Yahweh"(대하17:6)했기 때문이라고 역대기 역사가는 밝혀줍니다. '택선고집擇善固執'이라는 말 기억나시지요? 사람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하나의 길을 선택하고, 자기의 다짐을 지켜나가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는 백성들도 그런 마음으로 살기를 원했습니다. 왕이 된지 삼 년째 되는 해에 그는 유능한 지도자들을 지방 곳곳으로 파견하여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게 했습니다. 마음에 경전이 새겨진 사람은 어떠한 시련이 닥쳐와도 중심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경전'의 '經'은 '날실'을 가리킵니다. 피륙을 짤 때 바디에 이미 걸쳐놓은 세로줄 말입니다. 그 날실을 바탕으로 해서 씨실을 엮는 것입니다. 그는 사법제도를 정비함으로써 그 땅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없도록 조치하기도 했습니다.

● '아니오'라고 말하지 못하면
하지만 그가 늘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산 것은 아닙니다. 그는 정치가였기 때문에 여러 가지 국제적인 역학관계를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악한 자들과 동맹을 맺어서는 안된다는 예언자들의 충언을 무시하고, 이스라엘 왕인 아합과 사돈 관계를 맺었습니다. 자기 아들 여호람과 아합의 딸인 아달랴를 맺어준 것입니다. 어느 날 아합은 여호사밧과 마주 앉은 자리에서 앗수르에게 빼앗긴 옛 땅을 되찾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하면서, 그 싸움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거절하기도 어렵고, 수락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전쟁을 피하기 위해 정략 결혼을 서둘렀는데, 또 다른 전쟁에 휘말리게 생겼으니 말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여쭈어보고 결정하겠다고 말합니다. 많은 궁정예언자들은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하나님의 확고한 뜻이라고 말했지만, 단 한 사람 미가야 만큼은 전쟁에 나가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분별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사밧이 아합을 지원하는 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아합의 강권에 못 이겨 전쟁에 참전하고,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간신히 죽을 고비를 넘긴 채 유다 땅으로 돌아옵니다. 그를 기다라고 있던 것은 예언자 예후입니다. 그는 왕을 위로하기는커녕,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악한 자를 도우려 했던 왕의 처신이 잘못된 것이라고 준엄하게 꾸짖습니다. 살다보면 '아니오'라고 말해야 할 자리에서 머뭇거리다가 그만 악한 일에 말려드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아니오'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왕따(?)가 될 각오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용기이고 믿음입니다. 여호사밧 왕이 좋은 왕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곁에 왕을 꾸짖을 용기를 지닌 예언자가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물론 쓴 소리를 들을 줄 아는 그의 성숙한 인격도 주목되어야 하겠지요?

●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여호사밧의 생 가운데 가장 빛나는 순간은 모압·암몬·마온 연합군의 공격을 받았을 때일 것입니다. 요단강 동편 지역에 터잡고 살던 그들은 요단강을 건너 남왕국 유다의 옆구리를 쳤습니다. 예기치 않은 공격을 받은 왕과 백성들은 매우 당황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무력함을 절감했습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렸지요? 사방이 막혀 옴짝달싹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초월'이라고요. 여호사밧은 전국에 금식과 기도의 날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역사 가운데서 도움을 입었던 순간들을 회상하면서 지금의 위기로부터도 구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의 기도 가운데 특히 이 대목이 절절하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We do not know what to do, but our eyes are upon you)(대하20:12).

하나님의 처분만 바라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영이 레위 사람인 야하시엘에게 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감에 사로잡혀 예언을 합니다. 내용은 간단합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에 너희가 싸울 일이 없을 거라는 겁니다. 왕과 백성들은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며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행위로 보여주는 '아멘'입니다. 다음 날 전장을 향해 나아가려는 백성들에게 여호사밧은 이렇게 격려합니다.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20)

그에게는 조금의 의심도 두려움도 없습니다. 그는 예언자를 통해 주신 말씀을 절대적으로 신뢰합니다. 그리고 여호사밧은 정예군이 아니라, 거룩한 예복을 입은 찬양대를 앞세운 채 적의 진영을 향합니다.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살벌한 전쟁터에 찬양이 울려 퍼집니다. 아직 승리를 거둔 것도 아닌데 그들은 감사의 찬양을 부릅니다. 그들이 한 마음으로 찬송을 부를 때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적들로 하여금 자중지란을 일으키게 했다고 역대기 사가는 전합니다. 그 복병의 정체가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우박인지, 수렁인지, 서로에 대한 의구심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적들은 싸워보지도 못한 채 자기들끼리 살육전을 벌이다가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있을 법하지 않은 일처럼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절대적인 신뢰는 기적을 낳습니다. 공포가 어둡게 내려앉은 곳에서 부르는 찬양의 노랫소리는 기적을 부릅니다. 70년대에 우리는 법정에 선 선후배들을 격려하기 위해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우리 승리하리라, 우리 승리하리라, 우리 승리하리, 그 날에, 오오 참 마음으로 나는 믿네, 우리 승리하리라." 절망의 땅에서 부르는 희망의 노래는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여호사밧은 바로 그런 기적을 우리에게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 이름값을 하며 살고 싶다
우리는 모두 보이지 않는 전선(죽임의 문화, 음란, 소비주의, 폭력)에 서있습니다. 우리 영혼을 지배하려는 유혹에 맞서 싸우는 일은 늘 어렵습니다. 평화와 생명의 세상은 점점 멀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세상에는 죽음의 공포가 넘치고 있습니다. 이라크에서는 종파간의 갈등이 빚어낸 공포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미국에서는 허리케인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생령들이 죽었습니다. 더욱 속상하고 안타까운 것은 자연재해의 피해를 크게 입는 것은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피해지역 주민의 90%가 흑인이라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세상은 아무리 보아도 공평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평화와 생명의 노래가 메아리조차 없이 흩어져버릴까 두렵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여호사밧을 보면서 용기를 얻습니다. 우리는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함께 슬퍼하지 않는 무정한 사람들을 보면서 낙심했습니다. 하지만 희망은 위로부터 옵니다. 우리의 힘과 경험과 지혜만 의지한다면 우리는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영감받은 하나님의 종은 말합니다.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대하20:15). 이 말씀이 우리를 일으켜 세웁니다. 여호사밧, 그는 우리에게 희망의 징표로 우뚝 서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의를 보살피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자신의 철저한 믿음을 통해 의를 보살피시는 하나님을 드러냈습니다. 이름값을 한 셈입니다.

벌써 여러 해 전에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이 이현주 목사에게 '볼 관'에 '구슬 옥'을 붙여 관옥(觀玉)이라는 호를 주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구슬이라는 게 둥근 공이니까 온전한 원만함일 것이고, 온전한 원만함은 하나님이라고 뜻을 새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인생의 목표를 정했습니다. 첫째는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보는 사람이 되자. 둘째, 볼 관 자에는 '드러낸다'는 뜻도 있으니까 하나님을 드러내는 사람이 되자. 그래서 그는 이런 결의를 다졌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 몸을 통해 무슨 일을 하시는지 그것을 '목격'할 참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본 것을 사람들에게 증언함으로써 그분을 드러내 보여줄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우리의 새로운 이름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런 이름에 걸맞은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에서 비롯됩니다. 우리 삶이 절망의 땅에 희망을 심고, 슬픔의 밭을 갈아 기쁨의 열매를 거두는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등 록 날 짜 2005년 09월 04일 12시 17분 4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