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37. 역지사지 易地思之
설교자 김기석
본문 롬 14:1-10
설교일시 2005/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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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지사지易地思之
롬14:1-10
(2005/9/11)

[여러분은 믿음이 약한 이를 받아들이고, 그의 생각을 시빗거리로 삼지 마십시오. 어떤 이는 모든 것을 다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믿음이 약한 이는 채소만 먹습니다. 먹는 이는 먹지 않는 이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이는 먹는 이를 비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를 받아들이셨습니다. 우리가 누구이기에 남의 종을 비판합니까? 그가 서 있든지 넘어지든지, 그것은 그 주인이 상관할 일입니다. 주께서 그를 서 있게 할 수 있으시니, 그는 서 있게 될 것입니다. 또 어떤 이는 이 날이 저 날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또 어떤 이는 모든 날이 다 같다고 생각합니다. 각각 자기 마음에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날을 더 존중히 여기는 이도 주님을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요, 먹는 이도 주님을 위하여 먹으며, 먹을 때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먹지 않는 이도 주님을 위하여 먹지 않으며, 또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가운데는 자기만을 위하여 사는 이도 없고, 또 자기만을 위하여 죽는 이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죽은 사람에게도 산 사람에게도, 다 주님이 되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는 형제나 자매를 비판합니까?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 거룩한 분노
서점에서 책을 뒤적이다가 문득 내가 교인들에게 너무 착하게 살라고 강권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이 너무 착하면 반편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이들을 함부로 대합니다. 반면에 좋고 싫음에 대한 가름이 분명하고, 자기 몫은 어김없이 챙기는 사람은 좀 야박해 보이기는 해도 사람들이 만만하게 대하지는 않습니다. 괜히 건드렸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니 말입니다. 조금 다른 뜻이기는 합니다만 시인 이재무는 <땡감>이라는 시에서 만만한 사람이 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는 세상의 흐름에 따라 부유浮游하는 사람 말고 자기 줏대를 가지고 단단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그리워합니다.

<여름 땡볕
옳게 이기는 놈일수록
떫다
떫은 놈일수록
가을 햇살 푸짐한 날에
단맛 그득 품을 수 있다
떫은 놈일수록
벌레에 강하다
비바람 이길 수 있다
덜 떫은 놈일수록
홍시로 가지 못한다>

시인은 땡감처럼 단단하면서도 떫은 사람이 있는가 둘러보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이 여름 땡볕 세월에/땡감처럼 단단한 놈들이 없다/떫은 놈들이 없다"고 탄식합니다. 땡감 같은 사람은 인기가 없습니다. 떫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떫지 않으면 가을 햇살 푸짐한 날에 단맛을 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기득권을 누리고 있던 이들에게는 대단히 떫은 존재였습니다. 눈엣가시였습니다. 자기들이 설정해놓은 '경건'이라는 허위의식의 울타리를 둔중한 망치질로 두드려대니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하지만 거짓과 위선과 무정함에 대한 분노가 있었기에 주님은 버림받은 사람들을 따뜻함으로 품어 안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입니까? 불의한 세상, 공평함이 없는 세상에 대한 분노가 아닐까요? 불평과 탄식 말고 분노 말입니다. 하지만 활활 타오르는 분노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맹목적인 분노는 폭력의 악순환을 낳을 뿐입니다. 우리 눈이 누군가에 대한 미움과 시샘으로 활활 타오르는 동안에는, 우리는 평화의 일꾼이 될 수 없습니다. 거짓과 위선에 대한 분노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의 세례를 받을 때만 창조적인 힘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성도들은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하는 무기력한 착한 사람이 아니라, 거짓과 불의에 대해서는 단호히 거절하면서 그 악한 일에 말려든 사람조차 사랑으로 품어 안고 새로운 세상을 이루기 위해 땀흘리는 뚝심 있는 착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교회의 소명
하지만 우리의 선한 뜻은 현실의 장벽에 부딪혀 좌초하기 일쑤입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우리는 제풀에 지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봐야 뭐해, 세상은 그저 그렇고 그런데." 이렇게 해서 사람들의 맑은 마음은 흐려지기 시작합니다. 그렇게도 싫어했던 세상을 닮고, 때묻은 기성세대의 삶을 반복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교회를 주신 뜻은 어쩌면 각 지체들이 서로의 얼굴을 비춰주는 거울이 되어주고, 영혼의 숫돌이 되어서 서로의 무뎌진 마음을 갈아주라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으로 모이는 교회가 모든 피조물들이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가는 새로운 세상의 모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약육강식 혹은 무한 경쟁이라는 살벌한 구호가 우리의 의식을 죄어치는 세상이지만, 돈의 많고 적음이나 사회적 신분의 높고 낮음을 떠나서 모두가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고 돌보는 사랑의 세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교회의 소명입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에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신신당부하듯 말합니다. "여러분은 믿음이 약한 이를 받아들이고, 그의 생각을 시빗거리로 삼지 마십시오."(14:1) 바울은 로마서 15장 1-2절에서도 같은 생각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전개합니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돌보아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이웃의 마음에 들게 행동하면서, 유익을 주고 덕을 세워야 합니다."

여기서 믿음이 강한 이는 누구이고, 믿음이 약한 이는 누구입니까? 로마 교회는 유대교적 배경을 가진 신자들과 그런 신앙적 배경 없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방계 신자들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교적 배경을 가진 신자들은 여전히 몸에 밴 신앙적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관습은 오랜 세월 동안 몸에 밴 제2의 천성인데, 헌 옷 벗어 던지듯 할 수 있는 게 아닐 겁니다. 그들은 음식을 먹을 때도 레위기에 나오는 정결법의 규정을 따랐고, 유대교의 절기를 소중히 여겼습니다. 이방계 신자들은 그런 유대계 신자들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유난을 떤다고 생각했겠지요. 혹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자유를 알지 못한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반면에 유대계 신자들은 다소 무질서해 보이고, 세속적으로 보이는 이방계 신자들을 조금은 경원시했겠지요. 그 때문에 로마 교회는 보이지 않게 금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정을 알아챈 바울은 그 두 진영이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용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음식 규정에 구애받지 않는 이들은 그렇지 못한 이들을 업신여기지 말아야 하고, 음식 규정을 지키는 이들은 그렇지 않은 이들을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날을 지키는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 따스한 말줄임표
가만히 보면 사람들이 서로에게 등을 돌리고 갈라서는 것은 큰 차이, 혹은 본질적인 차이 때문이 아닙니다. 사소한 문제가 사람들을 갈라놓습니다. 바울은 음식 규정을 지키는 이나 그것에 구애받지 않는 이, 혹은 어떤 날을 귀히 여기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그 근본 동기에서는 하나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주를 위하여!"입니다. 그렇지요. 두 진영 모두 주님을 잘 섬기기 위해 애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마음의 동기는 존중되어야 마땅합니다.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따지는 동안 진실은 멀리 달아나 버리고 남는 것은 서로에 대한 환멸뿐입니다. 서로의 마음을 헤아려 알아주는 것, 이것이 진정한 착함이 아니겠습니까?

시인 이승훈은 세상 모든 사람에게 삶은 간단하지도 쉽지도 않다고 말하면서 "아프다 힘들다 말하는 상대 앞에서는/이해력이 필요한 게 아니라/열려있는 귀와 열려있는 마음이 필요할 따름"이라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옳은 이야기이지요? 그의 시를 마저 들어보시겠습니까?

<사는 게 힘에 부치는 너와 나
사는 게 무섭고 때로 노여운 너와 나
서로를 보며 니가 힘들면
나도 등이 아프고, 나도 팔이 저리다고
그렇게 따스한 말줄임표를 건넬 수 있는 관계들이
아직 나에게 남아있으니 그걸로 족하다.>

네가 힘들면 나도 등이 아프고, 나도 팔이 저리다고 말없이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세상은 아직 살만 합니다. 우리가 이웃들을 이런 따뜻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어떻게든 그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애쓰며 살 때 주님은 흐뭇한 미소를 우리에게 건네주실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자기만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또 자기만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7-8)

● 사회적 연대의 정신
하버드 대학의 정치학과 교수인 마이클 샌들은 "뉴올리언스의 '허리케인 사태'는 사회적 연대의 정신이 희박한 미국 사회의 단점을 그대로 드러냈다" 지적했습니다. 그는 다양한 문화에 대한 개방성은 미국의 장점이지만 (이질적인 구성원들 간의) 사회적 연대의 정신은 약화됐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치유의 길은 없을까요? <>라는 잡지의 발행인인 짐 월리스(Jim Wallis)는 "카트리나가 우리의 정치적 양심을 바꾸고, 공동선에 대한 우리의 헌신을 다시 고무하는 계기가 된다면 이 참혹한 비극은 치유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카트리나의 비극을 통해 미국이 새로워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생명의 본질은 '서로에게 의존함'입니다. 실체 없는 그림자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너' 없는 '나'는 없습니다. 네가 있어 내가 있습니다. 생명의 본질은 그렇기에 '고마움'입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이 즐겨 쓰는 말은 '덕분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말을 하며 살고 계십니까? 믿음의 사람은 역지사지易地思之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상대를 알기 위해서는 그의 자리에 서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주님은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질고를 대신 지셨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연약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의 삶을 향해 겸손한 마음으로 한 걸음씩 다가갈 때 우리는 무한 경쟁과 약육강식의 세상을 살면서 굳어진 마음이 풀리는 것을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교회연합주일인 오늘 교회가 서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가를 생각해봅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교회를 짓기 전에 빈민가에 가서 그들의 눈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보라고 말했습니다. 약한 이들을 사랑으로 보듬어 안음으로 우리는 참 사람이 될 것입니다. 착하기는 하지만 무기력한 신앙인이 되지 말고, 불의한 세상을 사랑의 쟁깃날로 갈아엎으면서 평화의 씨앗을 한 알 한 알 정성껏 심으며 사는 정말로 착한 신앙인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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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Restoring the hope of America's poorest families, renewing our national infrastructures, protecting our environmental stability, and rethinking our most basic priorities will require nothing less than a national change of heart and direction. It calls for a transformation of political ethics and governance; moving from serving private interests to ensuring the public good. If Katrina changes our political conscience and re-invigorates among us a commitment to the common good, then even this terrible tragedy might be redeemed.(Jim Wallis)

등 록 날 짜 2005년 09월 11일 12시 09분 50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