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39. 예수의 선한 일꾼
설교자 김기석
본문 딤전 4:6-16
설교일시 2005/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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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선한 일꾼
딤전4:6-16
(2005/9/25)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너는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 젊은 날의 방황
청년주일을 앞두고 나는 젊은 날의 내 모습을 돌아보았습니다. 저의 젊은 날을 요약하는 한마디는 '방황'입니다. 세상의 어떤 가치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회의했습니다. 힘겨운 세월이었습니다. 괴테는 사람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게 마련이라고 말했습니다. 편안함에 길들여진 사람은 방황하지 않습니다. 방황은 그렇기에 다양한 가능성을 앞에 두고 암중모색을 거듭하는 청년기의 특권입니다. 그래서 저는 치열하게 방황하는 청년들을 보면 흐뭇한 미소를 짓고 지켜봅니다. 하지만 요즘의 젊은이들을 보면서 속상할 때가 많습니다. 너무 작은 재미에 빠진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친구들과의 대화도 너무나 일상화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자기 마음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아픔이나 열망을 나눌만한 친구를 만나기 어렵습니다. 자기 나름의 길을 찾아 최선을 다하는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학은 이미 취직 시험을 준비하는 곳으로 전락한지 오래입니다.

젊은 날의 방황은 일종의 통과제의(initiation)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나, 어떻게 살 것인가" 등의 문제를 놓고 치열하게 고민을 한 사람이라야 자기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습니다. 이삼십 년 전에 비해 오늘의 젊은이들은 한편으로는 행복한 세대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행한 시대이기도 합니다. 지난날의 젊은이들은 '민주화'라는 시대 변혁의 과제를 안고 씨름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역사 변혁의 주체로서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오늘의 젊은이들은 그런 싸움이 어느 정도는 마무리된 상황에서 살고 있습니다. 더 이상 투옥이나 고문에 대한 공포에 짓눌리지 않은 채 살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행복합니다.

하지만 민주화가 진행되어 이념적 지향점이 흐릿해지자 그들은 갑자기 삶의 입각점을 잃어버렸습니다. 삶의 방향을 바로 설정하기가 쉽지 않고 공적인 목표도 가물가물합니다. 당혹감을 느낀 젊은이들의 일부는 '재미'에 빠지게 되었고, 일부는 '소비사회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에 오늘의 세대가 불행하다고 말하는 까닭입니다. 지난 칠 팔십 년대에 젊은이들이 사회변혁을 부르짖으며 모였던 광장은 이제 소비와 축제의 마당으로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들은 커다란 물음표 앞에 서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인생은 살만한가?" 얍복강 나루에서 밤을 지새우며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을 해야 했던 야곱처럼 사람은 누구나 이 물음과 한번은 씨름해야 합니다. 풍요가 주는 혼곤함에 넋을 빼고 있던 이들은 자기 정체성이 뿌연 안개가 드리운 듯 불확실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이게 제가 보고 있는 청년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해결책은 없습니다. 견뎌야 합니다. 울면서라도 그 물음과 씨름해야 합니다. 하지만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생의 의미 물음은 관념적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삶의 군더더기를 덜어내고, 삶의 핵심을 잡으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바울 사도는 삼십 대 초반을 지나고 있던 디모데에게 "그리스도의 선한 일꾼"이 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큰 울림이 되어 다가옵니다. 저는 기독교인 젊은이들이 청년 예수의 정신과 깊이 만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좋은 지침이 될 수 있습니다.

● 저속하고 헛된 꾸며낸 이야기를 멀리하라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속된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철학자 하이데거(M. Heidegger)도 타락한 정신의 특색 가운데 하나로 '잡담'을 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몰라도 좋은 이야기들에 귀를 열어두고 사느라 정작 들어야 할 소리는 듣지 못합니다. 연예인들과 스포츠 스타들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많이 알지만,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무지한 자가 되어 갑니다. 다섯 가지 소리가 사람의 귀를 멀게 합니다. 이 소리 저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정신은 혼미함에 빠지게 마련입니다. 그런 것들을 멀리해야 내적인 힘이 생깁니다. 어느 저널리스트는 자기 자신에게 <두 주 동안의 침묵형>을 선고했습니다. 우리 정신이 살기 위해서는 이런 세상과의 분리 과정이 필요합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더욱 필요한 것이 침묵입니다.

세상에는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가르침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귀한 진주를 발견한 상인이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 그 진주를 사듯이, 정신의 힘은 하나를 얻기 위해 다른 것들을 포기하는 데서 얻어집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이 귀히 여기던 모든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길을 모른다면 암중모색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길을 찾았습니다.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안다'고 하셨던 주님, 바로 그분이 우리의 길이십니다. 그렇다면 제 아무리 듣기 좋은 소리가 들려온다 해도 그 길에서 벗어나면 안 됩니다. 호메로스는 그의 서사시 <오뒷세이아>에서 세이렌의 노랫소리에 정신이 팔렸다가 죽을 수밖에 없었던 뱃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귀에 달콤한 이야기일수록 정신에는 치명적 독이 될 수 있습니다. 16세기의 성자인 십자가의 성 요한(St. John of the Cross)는 "맛보지 못한 것에 다다르려면 맛없는 데를 거쳐서 가라"고 했습니다.

● 경건의 훈련
세상에 길들여졌던 오감으로부터 해방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훈련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 로마 사람들이 영웅으로 대접하는 운동선수들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승리를 얻기 위해 모든 일에 절제하면서 훈련을 합니다. 운동을 해본 분들은 알 것입니다. 자기 한계라고 생각하는 지점에서 한 걸음을 더 내디딜 때 새로운 힘이 생깁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선한 일꾼으로 살기 위해서는 자기 초월을 경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삶이 새로워지기 원한다면 삶의 경계를 정해야 합니다. 잠을 너무 많이 자고, 음식을 너무 많이 먹고, 잡다한 일에 마음을 팔지 않도록 우리의 모든 감각을 엄격하게 통제해야 합니다. 그리고 몸을 반듯하게 건사해야 합니다. 몸 닦음이야말로 마음 닦음의 지름길입니다.

또 그리스도의 일꾼들은 경건 훈련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경건 훈련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힘겹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기의 뜻을 꺾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적인 힘이 생깁니다. 이런 훈련을 하지 않는 한 우리는 제 자리를 맴도는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조금씩이라도 예수라는 푯대를 향해 전진하려면 경건을 훈련하기 위해 시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시급한 과제입니다. 영화 보는 시간을 줄이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을 줄이고, 잡담하는 시간을 줄여서 경건 훈련에 힘쓰다보면 우리는 내적인 힘이 고이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의 어려움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아니라, 그 어려움을 이길 내적인 힘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실패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병들 수 있습니다. 뜻밖의 난관을 만나 힘겨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내적인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살다 보면 어느 순간 무기력증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삶이 권태롭고 무슨 일을 해도 재미가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속에 기운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 기운은 하나님의 숨인 생기입니다. 그 숨을 마시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 속에 기운이 부족해지는 것이고, 기운이 부족하니까 영적인 잠에 빠져들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하늘의 기운으로 생동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히브리 시인들은 그런 젊은이들을 가리켜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라 했습니다.

● 믿는 이들의 본이 되라
바울 사도는 젊은 지도자인 디모데에게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이들의 본이 되라고 말합니다. 長幼有序의 질서가 공고한 사회에서 젊은이가 영적인 지도자가 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신 나이는 불과 서른입니다. 그리고 서른 세 살에 돌아가셨습니다. 그의 삶과 가르침이 우리의 생명입니다. 나이가 많다고 하여 진리에 가깝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젊다고 하여 진리를 모른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젊은이의 권고가 수용되는 것은 그가 삶으로 본을 보일 때입니다.

본이 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사람들은 가수들의 노래를 모방합니다. 자기 감정을 실어서 부르기보다는 유명한 가수가 해석한 곡을 따라 부릅니다. 이런 걸 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의미에서의 본이 된다는 것은 조금 다릅니다. 대목수들은 제자들에게 나무를 다루는 요령을 이렇게 저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기가 일하는 것을 보도록 하지요. 영적인 본이 된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본이 되는 사람은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가리켜 보이는 사람입니다. 그의 말을 듣고 있으면 예수님이 떠오르고, 그가 사람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아도 예수님이 떠오른다면 그는 본이 된 사람이라 할만합니다. 본이 된다는 것은 그러니까 내가 사람들에게 근사하게 보이는 것과는 관계없습니다. 나오미에게 손자를 안겨주고는 슬그머니 성경의 무대에서 사라지는 룻처럼, 본이 되는 사람은 사람들의 눈길이 그리스도를 향하도록 하는 사람입니다.

● 전심전력하여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라
누가 잘 사는 사람입니까? 어제보다 오늘을 더 아름답게 사는 사람일 겁니다. 나이 25살이면 육체는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영혼의 건강과 아름다움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어제보다 오늘 우리 마음이 더 넓고 맑고 깊다면 우리는 잘 살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살고 싶으시지요? 그런 마음이 있다면 그렇게 살면 될 일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맡겨진 직무를 등한히 하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우리 정신이 커지기 원한다면 맡겨진 일에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기왕 해야 할 일이라면 자기의 전 존재를 투입해서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의무를 수행하는 것처럼 좋은 수행의 방법이 없습니다. 지도자는 이미 완전해진 사람이 아니라, 그가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집중해야 합니다.

빈센트 반 고호와 동생인 테오가 주고받은 편지는 형제애의 아름다움을 절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느 날 테오는 형이 그림 공부를 하는데 필요한 물품들을 우편으로 보내면서 "열심히 노력하고 절대 평범한 화가는 되지 말라"는 훈계까지 덧붙였습니다. 그에 대해 빈센트는 이런 답장을 썼습니다.

"나 자신이 할 수 있는 데까지 나는 할 것이다. 그러나 소박한 의미에서의 평범을 나는 결코 경멸하지 않는다. 더구나 평범을 경멸한다고 해서 그 수준 이상으로 올라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열심히 노력하라는 너의 말은 전적으로 옳다. 가바르니(1804-1866, 프랑스 화가. 비참한 하층민의 생활을 즐겨 묘사했음)가 경고했듯 '반드시 하루에 선(線) 하나라도!'이다."

위대한 화가는 저절로 된 것이 아닙니다. '하루에 선 하나라도' 긋는 꾸준함이 그를 위대한 화가로 만들었습니다. 나는 우리 교우들이, 특히 청년 교우들이 이런 근기를 지닌 사람들이 되기 바랍니다. 우리가 무기력을 극복하고 삶의 의미를 되찾기 위해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세상의 가치를 삶의 중심에 놓지 말고, 하나님이 우리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돌아서기만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등 록 날 짜 2005년 09월 25일 12시 08분 28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