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40.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설교자 김기석
본문 요6:32-35
설교일시 2005/10/2
오디오파일 s051002.mp3 [17360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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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요6:32-35
(2005/10/2, 세계성찬주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다 주신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참 빵을 너희에게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하나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그 빵을 언제나 우리에게 주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내게로 오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요, 나를 믿는 사람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 친견이 허락된다면
동양의 전통에서 마음 공부를 위해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가운데 하나가 親見(다르샨, darshan), 즉 위대한 영혼과 대면하는 것입니다. 키 큰 나무 사이를 걸으면 키가 커진다는 말이 있듯이, 위대한 정신과 만나면 우리 정신도 자라게 마련입니다. 진리에 대한 목마름을 가진 사람은 불원천리하고라도 스승을 찾아 나섭니다. 큰 정신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데도 게으름 때문에 혹은 사소한 재미에 한눈 파느라 그 기회를 잃는다면 참 한심한 일입니다. 이오 목사님은 새벽마다 성경 한 구절을 읽고 주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의 뜻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 행복을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새벽마다 본문을 읽고 이어지는 생각들을 적어 내려가다 보면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기쁨이라 할까 평안이라 할까 그런 부드럽고 따스한 기운이 머리보다 먼저 가슴을 감싸주곤 했습니다."(이현주 목사, <<예수에게 도를 묻다>>, '읽는 분에게 드리는 말씀' 중)

예수님과 함께 지낼 수 있는 시간을 허락 받는다면 여러분은 그분과 무엇을 하고 싶으십니까? 한 젊은이에게 이 질문을 던졌더니 그는 대뜸 물위를 걷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러더니 좀 미안했는지 자기가 다니는 길에서 늘 마주치는 하반신을 잃은 할아버지를 고쳐드리고 싶다고 정정했습니다. 또 정신을 못 차리는 교계 지도자들을 찾아다니며 좋은 말로 깨우쳐주고 싶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아내에게 물었더니 대뜸 함께 산책을 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도 그렇게 하고 싶어졌습니다. 주님과 오솔길을 따라 느릿느릿 침묵 속에 걷노라면 마음을 괴롭히던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져버릴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내게는 예수님의 식탁에서 밥을 먹어보고픈 소망이 있습니다. 주님의 곁에 있으면 제대로 먹는 게 뭔지를 배울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을 배우기만 해도 우리는 지금보다는 한결 좋은 사람이 될 터이니 말입니다.

● 밥상공동체
예수님이 추구하셨던 세상은 <밥상 공동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머무시는 곳마다 사람들이 음식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가 형성되곤 했습니다. 경험해보셔서 아시겠습니다만 편치 않은 사람과는 밥을 함께 먹을 수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먹는다 해도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맛이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영어로 동료를 뜻하는 'companion'은 빵을 함께 나누는 사람을 뜻한답니다. 예수님의 식탁은 누구에게나 열린 식탁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예수님의 별명이 '죄인과 세리의 친구', '먹고 마시기를 탐하는 자'이겠습니까? 저는 예수님이 폭식가였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음식을 맛있게는 잡수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생명의 식탁에 동참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있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주님의 음성을 듣고 마음 문을 여는 사람은 주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자리에 앉게 됩니다. 마음 문을 연다는 것은 우리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주님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일들이 주님과의 깊은 사귐 속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의 식구(食口)가 되는 것입니다. '밥 食'에 '입 口'가 결합된 식구라는 단어는 왠지 눈물겨운 느낌을 자아냅니다. 한솥밥을 먹은 사람이라는 것, 이보다 더 직접적인 관계가 어디 있겠습니까? 나이가 들어도 어머니의 손맛을 잊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가족이라는 단어는 뭔가 의례적인 느낌을 주지만, 식구라는 단어에는 어떤 정서적 응어리가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주님과 한 식구이십니까?

● 하늘이 주신 음식
어느 날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당신이 하늘에서 오신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면서 조상들은 광야에서 떡을 먹었노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그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연한 말입니다. 사실 우리가 먹는 음식 가운데 하늘로부터 오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어느 시인은 유자차 한잔을 마시면서 '지난 여름 어느 날/아무도 몰래/어느 유자나무 위로/내려앉은 햇살을//물에 풀어 마신다'고 노래했습니다. 너무나 당연해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현실을 시인은 꿰뚫어봅니다. 그렇기에 그의 삶은 우주의 비의라도 엿본 것처럼 조심스럽습니다. 그렇지요. 우리가 먹는 것은 모두 온 우주가 동참하여 만들어낸 것들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음식은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이것을 오늘의 본문에서 간결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다."(33)

무리들은 "주님 그 빵을 언제나 우리에게 주십시오" 하고 부탁합니다. 그때 주님이 하신 말씀이 뭐지요?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내게로 오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요, 나를 믿는 사람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 잘 믿으면 모든 게 잘 될 거라는 낙관주의의 선언인가요? 아니면 안 먹어도 배부를 것이라는 이야기인가요? 생명의 떡인 예수를 먹고 마신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저는 마더 테레사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그 답이 있다고 믿습니다.

●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어느 날 한밤중에 어떤 사람이 테레사 수녀를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자녀가 여덟이나 되는 힌두교인 가족이 있는데, 그들은 며칠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테레사는 곧바로 쌀을 퍼들고 그들을 도우러 갔습니다. 그 집의 어머니는 테레사가 건네준 쌀을 받자마자 그것을 둘로 나누어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녀가 돌아왔을 때 테레사는 물었습니다. "어디를 다녀오십니까? 무슨 일을 하고 오셨습니까?" 그러자 그녀는 "그들도 굶주리고 있어서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녀의 집 곁에는 똑같은 수의 자녀가 딸린 이슬람교인 가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힌두교인 어머니는 이슬람교인 가족이 며칠 동안 양식 없이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평화'는 총·칼 혹은 첨단무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연민의 마음, 아픔과 슬픔에 대한 공감의 마음이 평화의 뿌리입니다.

그 힌두교인 어머니는 우리에게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신다는 것의 의미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웃의 절박한 처지를 헤아리고, 그와 더불어 좋은 것을 함께 나누려는 마음이야말로 가장 거룩한 마음이고, 그 마음을 가진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고, 목마르지도 않을 것입니다.

세계 성찬 주일인 오늘 우리들은 나눔에 굶주린 인류의 신음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콩고에서 우간다에서 수단에서 라이베리아에서 시에라리온에서 네팔에서, 그리고 가까이는 저 산동네에서 들려오는 이들의 신음소리에 우리가 귀를 막는다면 우리의 신앙고백은 거짓이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그분의 심정이 되어 세상을 바라봄이고, 그분의 손발이 되어 살아감입니다. 우리는 그 거룩한 일에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저 높은 하늘, 우리의 손이 미칠 수 없는 곳이 아닙니다. 떼제의 노래가 우리에게 그 답을 들려줍니다.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

등 록 날 짜 2005년 10월 02일 12시 27분 34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