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41. 끄트머리
설교자 김기석
본문 눅22:28-32
설교일시 2005/10/09
오디오파일 s051009.mp3 [5851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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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트머리
눅22:28-32
(2005/10/9)

["너희는 내가 시련을 겪는 동안에 나와 함께 한 사람들이다. 내 아버지께서 내게 왕권을 주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에게 왕권을 준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나라에 들어와 내 밥상에서 먹고 마시게 하고, 옥좌에 앉아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하게 하겠다." "시몬아, 시몬아, 보아라. 사탄이 밀처럼 너희를 체질하려고 너희를 손아귀에 넣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나는 네 믿음이 꺾이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네가 다시 돌아올 때에는, 네 형제를 굳세게 하여라."]

● 그 사랑 덕분에
오늘 본문 말씀은 수난을 앞둔 예수님의 절박한 심정이 담겨있습니다. 아직도 핵심을 붙들지 못한 제자들을 바라보면서 주님은 최후의 가르침을 주십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대접받으려는 마음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아니, 거기에 그쳐서는 안 되고 섬기는 자의 자세를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힘이 없어서, 돈 때문에 혹은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서 누구를 섬긴다면 굴욕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돈이든 힘이든 지위든 여하한 형태의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꺼운 마음으로 이웃을 섬기는 사람에게는 기쁨의 선물이 주어집니다. 살다보면 이런 경험을 한두 번쯤은 하게 마련입니다. 좋은 일을 하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문제는 지속성이 없다는 것이지요. 왜 지속할 수 없을까요? 그건 자꾸 계산을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쯤 했으면 상대방도 이쯤은 해야 한다는 마음의 계산이 있습니다. 그 계산이 맞지 않을 때 우리는 실망하고 속상해하고 누군가를 미워하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실망하지 않으려면 보상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선한 마음에 이끌려 누군가를 섬기고 돌보았다면 그 자체로 만족해야 합니다. 쉽지는 않은 일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그런 뜻을 깊이 헤아렸을까요? 아직은 아닐 겁니다. 주님도 그것을 잘 아십니다. 얼마 후면 그들이 당신을 버리고 다 달아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들을 격려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시련을 겪는 동안에 나와 함께 한 사람들이다. 내 아버지께서 내게 왕권을 주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에게 왕권을 준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나라에 들어와 내 밥상에서 먹고 마시게 하고, 옥좌에 앉아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하게 하겠다."(28-30)

제자들의 믿음은 아직 든든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주님 곁에서 함께 시련을 겪어왔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그들에게 왕권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저는 여기서 예수님의 사랑을 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현재의 모습보다는 앞으로의 가능성에 눈길을 주고 있습니다. 때가 이르면 그들이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를 내다보고 계십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13장에서 '바라고 믿고 참아내는' 사랑의 속성을 말했습니다. 주님은 바로 그런 사랑으로 제자들을 대했던 것입니다. 나중에 제자들이 아름다운 존재로 거듭나 주님의 사역자들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신뢰, 그 사랑, 그 오래 참음 덕분입니다.

● 새로운 세상의 실마리가 된 사람들
우리 주님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보면 참 놀랍습니다. 주님 곁에 모여든 사람들은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흠 없는 사람들도, 지식인들도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주류 사회에서 한 걸음쯤 밀려나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확대된 제자단에는 그 사회에서 죄인으로, 민족반역자로 낙인찍힌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찌 보면 쓸모 없는 사람들입니다. 한 사회의 중앙이 아니라 주변부에 위치한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과 더불어 새로운 세상을 이루어내셨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회의 주변부에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도, 그것을 이루어갈 수도 없습니다. 세상이 어떠한지를 가장 잘 이해하는 것은 땅에 가까이 머무는 사람들뿐입니다.

주님은 그 사회의 그늘진 곳에서 살던 사람들과 더불어 새로운 세상의 꿈을 실현해가셨습니다. 건축자들에 의해 버림받은 돌이 건물의 모퉁이 돌이 된다는 말은 당신 자신이 겪을 운명의 극적인 반전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세상의 질서를 일컫는 말이기도 합니다. 주변부, 곧 끄트머리야말로 세상을 바꾸는 실마리가 됩니다. '끄트머리'라는 단어는 맨 끝 부분을 뜻하지만, 동시에 일의 실마리 곧 단서端緖를 뜻하기도 합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이 둘을 연결하면 한 사회의 맨 끝 부분에 속한 이들이야말로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이사야는 고난받는 종을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는"(사42:3)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우리는 강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상한 갈대들이 어떻게 버림받는지를 보고 있습니다. 꺼져 가는 등불을 불어 꺼버리는 사람들을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상한 갈대의 상처를 싸매 고쳐주시고, 꺼져 가는 등불의 심지를 돋우어 불꽃을 살려내십니다.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보고도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요8:11) 하셨습니다. 세리장 삭개오를 보시고는 "오늘은 내가 네 집에서 묵어야 하겠다"(눅19:5)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대하든 천하보다도 귀한 존재로 대하셨습니다. 그분께 '함부로', '적당히'는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면 아무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그가 파렴치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가 내게 큰 해를 끼친 사람이라도 해도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그 자리에까지 이르지 못했습니다.

● 사탄의 체질
지난 목요일이었습니다. 나른한 오후 저는 오늘의 본문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고 곧 이어 문이 열리더니 어떤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그는 다짜고짜 목사님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가만히 보니 낯이 익은 사람이었습니다. 언젠가 제게 와서 돈을 뜯어가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잔뜩 굳은살이 박힌 주먹을 은근히 내보이면서, 살아보려고 애를 써보지만 사는 게 쉽지 않다며 불량스럽게 말했습니다. 한 나흘 치 생활비만 지원해주면 일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며 도와달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뻔한 소리에 좀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그 부탁을 들어드릴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더 불량스럽게 목소리를 높이면서 한번 정상적으로 살아보려는 자기 꿈을 꺾지 말라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저도 덩달아 목소리를 높이면서 그를 내보냈습니다. 마음의 평화는 깨진지 오래였습니다. 얕은 물이 작은 바람에 출렁이는 것처럼 내 마음도 출렁이고 있었습니다. 그날 늦은 오후에는 어깨통증에 시달리고 있는 아내가 침을 맞아보고 싶다고 해서 한의사를 찾아가기로 했었습니다. 함께 길을 걸어가는데 아내의 말에 대한 나의 응답이 자꾸 퉁명스러워지는 겁니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아차리자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게다가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 날은 휴진이었습니다. 그대로 집으로 가면 안 될 것 같아서 어찌할까 하는데 길옆에 태국음식을 하는 식당이 보였습니다. 무조건 아내를 잡아끌고 들어갔습니다. 음식을 시켜놓고 앉아 있는데, 문득 낮에 묵상하던 성경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아라. 사탄이 밀처럼 너희를 체질하려고 너희를 손아귀에 넣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나는 네 믿음이 꺾이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네가 다시 돌아올 때에는, 네 형제를 굳세게 하여라."(31-32)

뜨끔했습니다. 저는 제가 마음을 비교적 잘 통제하며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한 순간 내 마음은 화의 풍랑에 휩쓸리고 말았습니다. 사탄의 체질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저를 찾아온 그 사람이 사탄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제서야 저는 나의 평화로운 삶이 나의 교양이나 믿음 혹은 덕성 때문이 아니라, 나를 위해 빌고 계신 주님 덕분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낮에 겪은 불쾌한 체험을 통해 주님은 내 삶의 실상을 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살다보면 우리는 사탄의 체질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 체질을 통해서 알곡을 가려내는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맛있는 음식도 좋았지만, 그런 은총에 대한 자각으로 제 마음은 밝음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 구원의 신비
주님은 시몬 베드로가 당신을 세 번씩이나 부인할 것을 내다보셨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가 그 시련의 때를 잘 이겨낼 수 있게 해달라고 좋으신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런 시련과 부끄러움의 체질을 통해 베드로가 자기의 약함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은총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절감할 순간을 기다리셨습니다. 한번 주어진 주님의 사랑은 거두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세상의 권력은 자기를 보호하고 확장하기 위해 힘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사랑이라는 수단만을 사용하십니다. 이런 사랑을 경험한 사람이기에 베드로는 나중에 죽음의 자리까지 마다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제 잘난 맛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의 허물을 아는 이들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여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자신을 낮추는 데서 드러납니다. 스스로 가난하게 되고, 스스로 종이 되기를 택하셨기에 주님은 도덕적 권위를 가지고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섬기는 사람만이 명령할 수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주(主)요 스승인 예수님이 친히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셨습니다. 그렇기에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당신과 더불어 시련의 시간을 함께 견뎌낸 제자들에게 약속된 영광의 보좌는, 섬기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수고했던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우리는 이 세상의 쓰레기처럼 되고, 이제까지 만물의 찌꺼기처럼 되었다"(고전4:13)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쓰레기가, 그 찌꺼기가 세상에 희망을 가져왔습니다. 이게 바로 구원의 신비입니다.

힘이 없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화 잘 내는 자신에 대해 실망하지 마십시오. 믿음이 없고 지혜가 없다고 한숨을 내쉬지 마십시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만 주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를 고치셔서 당신의 뜻대로 사용하여 주실 것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살다보면 이런저런 일들에 걸려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시 일어서십시오. 우리는 주님께 속한 생명임을 한 순간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심을 잊지 마십시오. 이 희망이 있는 한 우리는 믿음의 승리자들이 될 것입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5년 10월 09일 11시 43분 48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