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42. 소원의 항구
설교자 김기석
본문 시107:23-32
설교일시 2005/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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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의 항구
시107:23-32
(2005/10/16)

[배를 타고 바다로 내려가서 큰 물을 헤쳐 가면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하신 행사를 보고, 깊은 바다에서 일으키신 놀라운 기적을 본다. 그는 말씀으로 큰 폭풍을 일으키시고, 물결을 산더미처럼 쌓으신다. 배들은 하늘 높이 떠올랐다가 깊은 바다로 떨어진다. 그런 위기에서 그들은 얼이 빠지고 간담이 녹는다. 그들은 모두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흔들리니, 그들의 지혜가 모두 쓸모 없이 된다. 그러나 그들이 고난 가운데서 주님께 부르짖을 때에, 그들을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주신다. 폭풍이 잠잠해지고, 물결도 잔잔해진다. 사방이 조용해지니 모두들 기뻐하고, 주님은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그들을 인도하여 주신다. 주님의 인자하심을 감사하여라. 사람에게 베푸신 주님의 놀라운 구원을 감사하여라. 백성이 모인 가운데서 그분을 기려라. 장로들이 모인 곳에서 그분을 찬양하여라.]

● 인샬라
작년 성지순례 때 우리가 가장 많이 들은 아랍말은 '인샬라'입니다. 그 뜻은 '신의 뜻이라면'입니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아랍인들은 '인샬라'라고 말합니다. 이번 대지진으로 파키스탄과 인도가 입은 피해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지질학자들은 이번 지진이 인도양 판(plate)과 유라시아 판이 부딪치면서 일어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재난은 모든 차이를 일시에 무너뜨렸습니다. 그 재난 앞에서 선악의 구분이나, 종교간의 차이도 의미를 잃고 맙니다. 애써 일구어놓은 삶의 터전 전체가 폐허로 변하는 데는 불과 5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신음소리와 울음소리가 가득했던 그 재난의 현장을 보며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라고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비극의 현장을 찾아간 기자는 해는 여전히 밝게 빛나고, 새벽 공기는 여전히 신선하다고 전해줍니다. 사람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비극을 겪고 있건만 하늘은 여전히 무심하게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옛 사람들이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다 天地不仁'고 말한 것은 이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재난을 겪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때에 절은 얼굴, 누추한 옷차림, 얼기설기 실로 상처를 꿰맨 이마 등 볼품없는 몰골들이었지만 눈동자만큼은 카슈미르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총총했다고 기자는 말합니다. "신의 뜻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 아직 살아남은 가족이 많다. 그들을 먹이고 재우는 일이 더 중요하다." 가족을 잃은 어느 청년의 말입니다. 삶은 참 모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모질지만 거룩하고 엄숙한 과제이기도 합니다. 살아있는 한 살아야 합니다. 그게 생명입니다. 그들은 신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이해할 수 없지만 그게 신의 뜻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있기에 그들은 일어설 것입니다. 이제 그 비극의 땅에도 사라졌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돌아오고 있답니다. 그들이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해주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인간 가족들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 고통과 긍휼
지난 화요일에 저는 경동교회의 여해문화관에서 열린 故 윤이상 선생님의 10주기 추모 음악제에 갔습니다. 조국 통일을 위해 평생을 바쳤던 한 음악인의 열정을 기리는 뜻깊은 모임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이화여대 교수였던 황병기 선생이 작곡한 노래 "우리는 하나"라는 곡을 들었습니다. 가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는 하나'라는 구절의 반복입니다. 그 곡은 해안으로 서서히 밀려오는 밀물처럼 제 가슴에 파고들었습니다. 그 곡은 물론 통일을 그리는 노래이지만 거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에덴의 동쪽에서 살면서 우리가 잃어버렸던 어떤 근원적인 세계로 우리를 이끌었습니다. 그 곡을 듣는 동안 제 가슴 깊은 곳에서 인간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솟아올랐습니다. 그것은 고통받는 형제자매들에 대한 아픔이었습니다.

이념이나 종교나 국가를 떠나 몸을 받아 살아가는 인간의 공통점은 고통입니다. 이웃이 겪는 '고통'에 대한 연민이야말로 우리를 본래적인 인간의 자리에 되돌려놓는 통로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긍휼'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긍휼은 자기가 낳은 자식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과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그것을 '통애痛愛', 즉 아파하는 사랑이라고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히브리서는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히4:15). 체휼體恤이란 '몸으로 아파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마음으로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아픔으로 경험하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이것을 예루살렘 성경은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우리와 더불어 느끼지 않을 수 없는 분'(who was incapable of feeling our weakness with us)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의 헤세드
오늘 본문인 시편 107편에서 우리는 인생의 막장에서 구원을 경험한 이들의 감사 찬양을 듣습니다. 이 시편은 광야 길을 지나면서 주리고 목마른 이들, 이방 나라에 포로가 되어 잡혀간 이들, 그리고 질병의 고통에 시달리던 이들, 그리고 고통의 바다에서 풍랑을 만났던 이들의 경험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경우이든 모두 절박한 처지입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순간들입니다. 그 순간 그들에게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부르짖음입니다. 그것은 울음일 수도 있고, 넋을 잃고 하늘을 바라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갈과 이스마엘의 비통한 울음소리를 기도로 들으시어, 그들 곁에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마엘이 큰 나라를 이루게 되리라고 약속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강제노역에 시달려 밤마다 신음을 내뱉던 히브리인들의 신음소리를 기도로 들으시고 그들에게 약속의 새 땅을 허락해주셨습니다. 넘실거리는 홍해 바다를 앞에 둔 이스라엘 백성들과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홍해가 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은 어쩌면 바로 이것을 가리키는 말인지도 모릅니다. 구원은 언제나 위로부터 옵니다.

신음소리를 그리고 울음소리를 기도로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이 드리는 절박한 기도를 외면하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할 때에도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헤아리시고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고(롬8:26) 계십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헤세드, hesed)을 이미 맛본 사람들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하나님께 간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생을 바다를 항해하는 배에 비유했습니다. 햇빛 좋고 바람 잔잔한 날도 있지만, 풍랑을 만날 때도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는 말씀으로 큰 폭풍을 일으키시고, 물결을 산더미처럼 쌓으신다. 배들은 하늘 높이 떠올랐다가 깊은 바다로 떨어진다. 그런 위기에서 그들은 얼이 빠지고 간담이 녹는다. 그들이 모두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흔들리니, 그들의 지혜가 모두 쓸모 없이 된다.(25-27)

얼이 빠지고 간담이 녹는 것 같은 상황, 지금까지의 경험과 지혜가 모두 쓸모 없게 되는 상황을 만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어떤 이는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어 버립니다. 어떤 이는 생을 저주합니다. 어떤 이는 파괴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때야말로 인간의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믿음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제 어머니는 신장병으로 2개월의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을 때 하나님과 만났습니다. 어머니의 질병이 하나님의 초대장이었던 셈입니다. 하나님은 어머니의 생명을 25년간 연장해주셨고, 그 기간 동안 우리 가족은 다 복음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질병조차 '복된' 질병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실패조차 '복된' 실패가 될 수 있습니다. 인생의 승리자는 남에게 지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절망과 싸워 이기는 사람입니다. 그럴 수 있는 힘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마운 선물과 부르심은 철회되지 않습니다"(롬11:29). 이런 희망이 있는 한 우리는 패배자가 될 수 없습니다.

● 먹감나무 무늬처럼
이제 구원을 체험한 이들에게 요구되는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구원하심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지난 목요일 저녁에 저는 창동에서 목회를 하는 친구의 부탁을 받고 그 교회의 '나눔 콘서트'에 가서 설교를 했습니다. 제 곁에는 초대손님 한 분이 앉아 있었는데, 그는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목회자의 아내였습니다. 그분의 노래와 간증을 들으면서 저는 참 깊은 감동을 느꼈습니다. 육체적으로 건강한 처녀가 몸의 한쪽을 쓰지 못하는 가난한 신학생과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그 가족들의 반대가 심했을 것은 뻔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끝내 그 전도사를 택했고, 고등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면서 남편과 태어난 아기를 돌보았습니다. 남편이 40대의 늦은 나이에 목회를 시작할 때 그 사모는 굳은 결단을 하고 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살아갈 대책이 없었지만 불안하지는 않았습니다. '먹을 게 없으면 굶지 뭐', 이런 '배 째라 정신'으로 나간 겁니다. 정말 가난한 시골 동네에서 그들 내외는 장애인들을 돌보며 아름다운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저마다 높은 봉우리에 오르려 애쓰는 세상이지만, 그들은 계곡을 통해 흐르는 물이 바다에 이름을 알기에 높아지기보다는 낮은 곳으로 흐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런 절실함이 있기에 그분이 부르는 노래(<꿈이 있는 자유>가 부른 <소원>)는 감동적이었습니다.

삶의 작은 일에도 그 맘을 알기 원하네
그 길 그 좁은 길로 가길 원해
나의 작음을 알고 그분의 크심을 알면
소망 그 기쁜 길로 가길 원하네

저 높이 솟은 산이 되기보다
여기 오름직한 동산이 되길
내 가는 길만 비추기보다는
누군가의 길을 비춰준다면

내가 노래하듯이 또 내가 얘기하듯이
살길 난 그렇게 죽기 원하네
삶의 한 절이라도 그 분을 닮기 원하네
사랑 그 높은 길로 가기 원하네

저 높이 솟은 산이 되기보다
여기 오름직한 동산이 되길
내 가는 길만 비추기보다는
누군가의 길을 비춰준다면

내가 노래하듯이 또 내가 얘기하듯이
살길 난 그렇게 죽기 원하네
삶의 한 절이라도 그 분을 닮기 원하네
사랑 그 좁은 길로 가기 원하네
그 깊은 길로 가기 원하네
그 높은 길로 가기 원하네

먹감나무를 아시는지요? 감나무 가지는 유난히 잘 부러집니다. 감을 딸 때 가지를 꺾게 되는 데, 가지마다 입은 상처로 빗물 같은 것이 스며들어가면 검게 뭉쳐진 듯한 무늬가 만들어집니다. 그게 사람들이 말하는 먹감나무 무늬입니다. 사람들은 그걸 귀하게 여겨 목공예 재료로 쓰기도 하고 고급 가구를 만들기도 합니다. 전우익 선생님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소나무는 상처를 관솔로 만들고 감나무는 아름다운 무늬로 만드는데 우리도 상처로 좌절하지 말고 상처를 딛고 보다 나은 사람, 보다 나은 민족이 되어야겠다고 여겨요."

그렇지요. 삶이 힘겨워도 그것 때문에 우리 심정이 모질어지면 사람으로 태어난 보람이 없습니다. 고통을 아름다운 노래로 바꿀 줄 알아야 합니다. 고통 가운데서도 우리를 보살피시고, 소원의 항구로 이끄시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절박한 고통을 체험한 이가 부르는 구원의 노래는 상처 입은 많은 이들의 영혼에 빛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와도 절망하지 마십시오. 흙을 빚어 아름다운 도자기를 빚는 도공처럼 고통과 슬픔을 빚어 아름다운 노래로 바꿀 줄 아는 사람, 우리는 바로 그런 사람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이 소망과 기쁨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등 록 날 짜 2005년 10월 16일 12시 17분 4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