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43. 은총의 순간들
설교자 김기석
본문 렘33:10-13
설교일시 2005/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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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의 순간들
렘33:10-13
(2005/10/23)

[나 주가 이렇게 말한다. 너희들은 '이 곳이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짐승도 없다'고 말하지만, 지금 황무지로 변하여, 사람도 없고 주민도 없고 짐승도 없는 유다의 성읍들과 예루살렘의 거리에, 또다시, 환호하며 기뻐하는 소리와 신랑 신부가 즐거워하는 소리와 감사의 찬양 소리가 들릴 것이다. '너희는 만군의 주께 감사하여라! 진실로 주는 선하시며, 진실로 그분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변함이 없으시다' 하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주의 성전에서 감사의 제물을 바치는 사람들이 이렇게 찬양할 것이다. 내가 이 땅의 포로들을 돌아오게 하여 다시 옛날과 같이 회복시켜 놓겠다. 나 주의 말이다. 나 만군의 주가 이렇게 말한다. 지금은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짐승까지 없는 이 곳과 이 땅의 모든 성읍에, 다시 양 떼를 뉘어 쉬게 할 목자들의 초장이 생겨날 것이다. 산간지역의 성읍들과 평지의 성읍들과 남쪽의 성읍들과 베냐민 땅과 예루살렘의 사방과, 유다의 성읍들에서, 목자들이 그들이 치는 양을 셀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 하나님의 말없는 말
비가 내린 후 날이 차갑습니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옷깃을 여며 바람을 막습니다. 이제 겨울이 멀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절기상으로 상강霜降입니다. 이 찬 바람 속에서 국화는 더욱 짙은 향기를 머금을 것입니다. 논어論語의 자한子罕편에는 날이 차가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진다는 것을 안다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는 말이 있습니다. 상강 절후는 어쩌면 우리에게 자신을 돌아보라는 하늘의 추상같은 명령이 아닌가 싶습니다. 계절의 변화를 몸으로 느낄 때마다 나는 대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주셨던 약속을 떠올립니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8:22)

계절의 변화는 어쩌면 하나님의 은총을 상기하라는 초대장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단풍 구경에 나서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빛에만 취할 일이 아니라, 그 오묘한 자연의 조화 속에 깃든 하나님의 말없는 말을 들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의 선포를 통해서 말을 건네시지만, 말없는 말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말을 건네십니다. 어느 문인은 <<말없음표의 속말들>>이란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나는 그 책을 보면서 말없음표의 속말을 굳이 드러내서 뭐하자는 거냐며 역정 아닌 역정을 낸 적이 있습니다. 때로 삶에는 생략이 필요하거든요. 남김없이 표현하면 다른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여지는 그만큼 줄어드는 겁니다. 전문가들은 어떤 사람의 문장을 한 문단만 보아도 그가 어느 정도의 공력을 가진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글의 성격에 따라서 다르기는 하지만 다른 이들과 정서적으로 소통하기를 원한다면 생략할 줄 알아야 감동도 전할 수 있는 법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의미에서 생략의 선수이십니다. 하지만 우리 영의 눈이 밝아지고 영의 귀가 열리면 그 말없는 말들을 다 들을 수 있습니다. 시편 19편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시편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창공은 그의 솜씨를 알려준다.
낮은 낮에게 말씀을 전해주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알려준다.
그 이야기 그 말소리, 비록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그 말씀 세상 끝까지 번져간다.(시19:1-4)

● 부재를 통해 느끼는 그의 존재
우리가 비록 소음으로 가득 찬 도시에 살지만 우주에 가득 찬 이런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우리 삶이 한결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환한 전깃불을 끄지 않고는 달빛의 호사를 누릴 수 없고, 텔레비전과 라디오 그리고 컴퓨터를 끄지 않고는 한 밤중이라도 그 신비한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큰 손해가 뭔지 아십니까? 신비에 대한 감수성을 잃어버린 채 사는 것, 감동을 잃은 채 사는 것입니다. 길들여진다는 것, 이것처럼 슬픈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여기 한 사람이 있습니다. 단정하게 좌정하고 앉아 있던 그가 몸을 일으킵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산책길에 나섭니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리고 반 걸음을 걷자 섬뜩한 철문입니다. 몸을 돌이켜 한 걸음, 두 걸음, 그리고 반 걸음을 걷자 코 앞에 쇠창살이 있습니다. 그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그렇게 걷다가 어느 순간 속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곳에는 이슬 젖은 산책길이 있나요
그곳에는 저물어가는 들길이 있나요
시장 골목에 손님 부르는 소리 들려오나요
길모퉁이 술집에는 술국이 끓고 있나요
지금도 철롯길에는 밤 기차가 달리나요
강둑 길에는 들꽃이 피고 아이들이 달리나요
거리에는 연인들이 팔짱을 끼며 걷고 있나요
(박노해, <미치도록 걷고 싶다> 중에서)

짐작하셨겠지만 그는 지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망망대해에 떠있는 작은 섬처럼 외로운 곳, 그리움이 목젖까지 차오르는 곳에서, 그가 정작 그리워하는 것은 너무나 일상적인 사람살이의 풍경입니다. 우리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해져서 오히려 권태롭고, 때로는 벗어나고 싶은 그 일상 말입니다. 우리가 일에 지쳐 탈출하고 싶은 그 일상이 갇힌 자에게는 가장 가고 싶은 곳입니다. 어떤 사람의 존재감을 우리가 절실히 느끼는 것은 그의 부재를 통해서입니다. 곁에 계실 때는 몰랐던 어머니,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면 문득 그분들의 빈자리가 너무 크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자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비오는 날의 풍경, 황홀하게 물들어가는 단풍, 저녁 노을…이런 것들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복인지 모릅니다. 어느 것도 당연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고 삽니다. 웬 사설이 이리 긴가 염려하시는 분이 계실 것 같네요.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가야 할 길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평화'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십니까? 제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두 어 달 전까지 쓰신 <나의 일생>이라는 글을 이렇게 마감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몸이 아프고 힘들어서 더 이상 못 쓰겠다. 다만 나는 후손들이 살아갈 세상이 아름다운 세상이 되기를 원한다. 고요한 호수에 유람선이 선유하고, 고운 옷 입은 아이들의 밝은 웃음을 볼 수 있는 곳.

이게 제 아버지가 생각하는 평화로운 세상이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의 꿈은 훨씬 더 소박합니다. 내가 가꾼 무화과와 포도열매를 따먹을 수 있고, 내가 지은 집에서 소박하게 살아가는 것, 그들이 그리는 평화의 이미지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 생각은 마음의 밭
예루살렘이 초토화되었을 때 사람들은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가까운 이들이 비극적으로 죽임을 당하는 것과, 굴비 두름처럼 엮인 채 먼 이방 나라로 끌려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이 없는 것도 고통이었습니다. 찬 이슬과 바람을 피할 집이 없는 것도 고통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더 견딜 수 없었던 것은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이 속절없이 무너졌다는 믿을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예루살렘은 세상의 어떤 힘도 무너뜨릴 수 없는 만세반석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넋이 나간 듯이 하늘을 보며 믿을 수 없는 현실 때문에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 일어서야 했습니다. 인간의 위대함은 '생각'에 있습니다. 생각을 나타내는 '생각 사思'자는 '밭 田'과 '마음 心'이 결합된 단어입니다. 생각이야말로 우리의 마음이 자라나는 밭입니다. 생각하고 반성하지 않는 정신은 클 수 없습니다. 마침내 그들의 입에서 이런 고백이 흘러나옵니다.

"멍에에 익숙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31:18)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고, 제멋대로 욕망에 따라 춤을 춘 결과가 오늘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게 고난의 신비입니다. 고난이 없으면 생각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히브리서 기자가 "그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 순종을 배우셨습니다."(히5:8) 하고 말했겠습니까? 고난은 우리 영혼을 벼리는 숫돌입니다. 사람은 넘어지기도 하고, 죄를 짓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 후입니다. 그것을 통해 무엇을 배우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가 삶을 깊이 돌아보고, 자기 자리를 찾을 때면 우리에게 새로운 선물을 마련해주십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시련과 함께 그것을 벗어날 길도 마련해 주심으로써 우리가 그 시련을 견디어 낼 수 있게 해주신다는 것이지요(고전10:13)

● 시련을 넘어
산그늘이 내린 밭 귀퉁이에서 할머니와 손자가 참깨를 텁니다. 보아하니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십니다.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손자는 한번을 내리치는 데도 힘을 더합니다. 세상사에서 어려움을 많이 겪었던 손자는 한번을 내리쳐도 솨아솨아 쏟아지는 참깨를 보며 신이 납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그런 손자를 가볍게 나무랍니다. "아가,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되느니라. " 김준태 시인의 시 가운데 나오는 장면입니다. 이 마음을 아시겠지요?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고난의 짐에 짓눌려 무너지는 것을 차마 보실 수 없는 분입니다. 그렇기에 성도들에게 완전한 절망이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난을 통해 자기들의 본래의 자리를 찾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것은 그들을 고쳐 새로운 백성으로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렘29:11)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회개한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그 약속의 일부입니다. 황무지로 변하여, 사람도 없고 주민도 없고 짐승도 없는 유다의 성읍들과 예루살렘의 거리에, 사람들이 환호하며 기뻐하는 소리, 신랑 신부가 즐거워하는 소리와 감사의 찬양 소리가 들려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황폐하던 그 땅에 목자들의 초장이 생길 것이고, 그곳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는 양떼를 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삶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내 삶의 자리, 바로 그곳이야말로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자리입니다. 우리가 머무는 자리에서 생을 경축하며 사는 이야말로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나는 파키스탄과 이라크 그리고 뉴올리안즈에서 사람들의 일상적 삶이 회복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울부짖던 이들의 얼굴에 웃음을 돌려주고 싶습니다. 이 일이야말로 부름받은 우리의 할 일입니다. 여러분, 행복의 파랑새를 멀리서 찾지 마십시오. 눈을 뜨고 바라보면 우리 삶의 순간 순간이 은총의 순간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좋은 가을날, 느른했던 우리 정신이 서리처럼 맑고 차갑게 깨어나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5년 10월 23일 12시 08분 45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