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46. 희망의 뿌리
설교자 김기석
본문 왕하7:3-7
설교일시 2005/11/13
오디오파일 s051113.mp3 [5629 KBytes]
목록

희망의 뿌리
왕하7:3-7
(2005/11/13)

[그 무렵에 나병 환자 네 사람이 성문 어귀에 있었는데, 그들이 서로 말을 주고받았다. "우리가 어찌하여 여기에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리겠느냐? 성 안으로 들어가 봐도 성 안에는 기근이 심하니, 먹지 못하여 죽을 것이 뻔하고, 그렇다고 여기에 그대로 앉아 있어 봐도 죽을 것이 뻔하다. 그러니 차라리 시리아 사람의 진으로 들어가서 항복하자. 그래서 그들이 우리를 살려 주면 사는 것이고, 우리를 죽이면 죽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황혼 무렵에 일어나서 시리아 진으로 들어갔는데, 시리아 진의 끝까지 가 보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 곳에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주께서 시리아 진의 군인들에게, 병거 소리와 군마 소리와 큰 군대가 쳐들어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기 때문에, 시리아 군인들은, 이스라엘 왕이 그들과 싸우려고, 헷 족속의 왕들과 이집트의 왕들을 고용하여 자기들에게 쳐들어온다고 생각하고는, 황혼녘에 일어나서, 장막과 군마와 나귀들을 모두 진에 그대로 남겨 놓은 채, 목숨을 건지려고 도망하였던 것이다.]

● 방리유
세상에서 가장 큰 범죄는 어떤 사람에게서 희망을 빼앗는 것이랍니다. 삶이 제아무리 힘겨워도 희망이라는 무형의 자산을 잃지 않는 한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살다보면 누군가에게 실망하여 극단적인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너 같은 녀석은…." 이런 말은 듣는 이의 가슴에 큰 상처를 남깁니다. 그런 말은 자기가 입은 마음의 상처를 부풀려 되돌려주려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그런 말은 보이지 않는, 그리고 점진적인 살해행위입니다. 사는 동안 겪는 이런 저런 차별로 인해 검게 타버린 가슴은 때로 총알이 장전된 권총처럼 위험합니다. 프랑스 소요사태가 이제는 잠잠해졌다고 합니다. 지난 달 27일 파리 북서쪽 클리시 수 부아에서 경찰 검문을 피해 달아나던 모리타니와 튀니지 출신의 10대 소년 두 명이 감전사한 사건을 계기로 폭발한 이 소요사태는 거의 보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문화선진국이라는 프랑스의 어두운 이면을 보았습니다.

"영혼이 없는 거리에서 태어나 지저분한 주위환경에 둘러싸인 더러운 건물에서 회색 빛 벽과 풍경을 보고 회색 빛 삶을 사는 젊은이들이, 평소에는 외면하다가 화를 내거나 금지시킬 일이 있을 때만 자기를 쳐다보는 주류사회를 보면서 무슨 희망을 가질 수 있겠는가."

이것은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이 1990년에 했던 '사회통합연설'에서 한 말입니다. 불어로 대도시의 외곽지역을 지칭하는 방리유(Banlieue)라는 말은 어떤 지역을 가리키는 명칭이라기보다는 도시의 소외계층을 가리키는 용어가 된 듯합니다. 날마다 인종차별을 경험하고, 취업의 기회조차 박탈당해 희망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살아갈 희망을 되돌려주는 것보다 시급한 일은 없습니다.

저는 세상에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성서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서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살 권리를 보장해주고, 그들을 잘 돌보는 것이 하나님의 우선적인 관심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그런 성서 정신의 온전한 육화肉化입니다. 병든 사람을 고치시고, 소외된 사람의 벗이 되어주시고, 사회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신 예수의 정신이 아니고는 평화로운 세상을 이룰 수 없습니다.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보며 "인간 쓰레기"라고 했던 프랑스 내무장관 니콜라 사르코지는 얼마나 오만한 사람입니까? 저는 그런 이들을 보면 괴물로 변해버린 인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의 희망의 뿌리가 어디인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 불가능의 가능성
아람(시리아) 왕 벤하닷의 침입으로 이스라엘은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왕은 무력하고 백성들의 마음에는 절망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기 시작했습니다. 사마리아 성은 여러 달 적에게 포위되어 있었습니다. 성 안에는 먹을 것이 떨어졌습니다. 성경은 기근의 충격을 나귀 머리 하나가 은 팔십 세겔에 팔리고, 합분태 즉 '비둘기 똥'이라고 불리우는 형편없는 음식이 은 다섯 세겔에 거래된다는 사실을 언급함으로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충격적인 것은 굶주림에 시달리던 여인들이 자기들의 자식까지 잡아먹었다는 사실입니다. 극단적인 굶주림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인성마저 포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있는 사람에게 윤리와 도덕의 잣대를 들이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런 참혹한 현실을 목도하면서도 왕은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습니다. 그는 다만 자기의 겉옷을 찢어 비통한 심정을 표현할 뿐입니다. 비통한 마음은 원망으로 바뀝니다. 그는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이 도우실 생각만 있다면 그런 상황에까지 몰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의를 의심할 뿐입니다. 왕은 하나님에 대한 희망을 버리기로 작정합니다.

그는 이 모든 일을 꾸민 분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리석기 이를 데 없습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만 은나라의 탕왕은 칠 년 동안 기근이 계속되자 목욕재계하고 흰 띠를 몸에 두르고 상림의 들에 나아가 기도를 하며 자기를 돌아보았다 합니다. 그것이 소위 '육사자책六事自責'입니다.

1. 정치가 알맞게 조절되지 아니하였는가?
2. 백성이 직업을 잃지는 않았는가?
3. 궁실이 화려한가?
4. 여자들의 치맛바람이 심한가?
5. 뇌물이 성행하는가?
6. 아첨하는 사람이 들끓지는 않는가?

고사에 의하면 탕왕이 이렇게 자기를 돌아보며 자책을 하자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 천리에 걸쳐 큰 비가 내렸다고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어려운 일을 만나면 남에게서 그 탓을 찾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먼저 자기를 돌아봅니다. 이스라엘 왕은 그런 의미에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마음에 깃드는 것은 복수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복수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종인 엘리사를 죽이겠다고 마음먹고는 말합니다. "사밧의 아들 엘리사의 머리가 오늘 그대로 붙어 있다면, 하나님이 나에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신다 하여도 달게 받겠다"(왕하6:31). 그가 엘리사를 찾아왔을 때 예언자는 왕에게 말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었습니다. '내일 이맘때쯤에 사마리아 성문 어귀에서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에 사고,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에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셨습니다."(왕하7:1)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왕을 모시고 온 시종무관은 조롱하듯 말합니다. "비록 주님께서 하늘에 있는 창고 문을 여신다고 할지라도, 어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엘리사는 그가 내일 그런 일이 생기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기는 하겠지만 먹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은 불가능의 가능성(impossible possibility)입니다. 사람의 희망이 그친 자리에서 하나님의 희망이 시작됩니다. 뒤에는 바로의 군병들이 쫓아오고 앞에는 홍해 바다가 넘실거릴 때, 그래서 모두 공포에 사로잡혔을 때, 홍해 바닷물이 열렸습니다. 광야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던 백성들 앞에 만나가 내렸고, 목마름에 죽어가던 백성들을 위해 반석에서 물이 솟아나왔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부름에 응답하여 사납게 일렁이는 바다 위로 발을 내디뎠을 때 물은 육지처럼 그의 몸을 받쳐주었습니다. 죽음의 골고다 언덕은 부활의 문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다"(사55:8) 하셨습니다. 그걸 인정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 밑바닥에서부터 시작되는 역사의 새벽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주신 약속이 어떻게 실현되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한센병 환자들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전쟁이 벌어진 상황에서도 비-국민 취급을 받습니다. 그들은 성밖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들은 삼중고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질병의 고통과 철저히 버림받았다는 소외감 그리고 굶주림이 그것입니다. 민족의식이나 이데올로기보다 더 근원적인 것은 살고자하는 의지입니다. 물론 위대한 정신들은 더 큰 뜻을 이루기 위해 살고자하는 자기의 본능적 의지를 꺾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절망의 심연에 서있던 한센병 환자 네 사람은 살고 싶은 생각에 아람 사람의 진으로 나아가 항복하기로 작정합니다. 그들이 살려 주면 사는 것이고, 죽이면 죽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새벽녘에 일어나 아람 진영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군인들이 머물던 막사는 그대로 있는데, 어디를 둘러보아도 사람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조심스런 생각에 그들은 아람 진영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다 다녀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때서야 그들은 지천으로 널린 음식을 배불리 먹고 값진 보화들을 찾아 숨겨놓기도 했습니다.

6절과 7절은 이야기의 흐름을 끊으면서 독자들에게 하나님이 일으키신 이 기적이 어떻게 발생했는지 그 경과를 보여줍니다. 주님은 그 밤에 아람 사람들의 진영에 병거 소리와 군마 소리와 큰 군대가 쳐들어오는 소리를 일으키셨습니다. 아람 왕과 군인들은 잠결에 그 엄청난 소리를 듣고는 이스라엘이 헷 족속의 여러 왕들과 이집트 군대를 불러들여 자기들을 급습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일으키신 공포로 말미암아 비이성적인 혼란과 공포가 급격하게 번져가면서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사태의 반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야웨 하나님의 승리를 최초로 목격한 사람들은 성밖의 사람들, 즉 한센병 환자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가장 먼저 알아차리는 것은 프랑스식으로 말하자면 '방리유'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메시야 탄생의 소식을 제일 먼저 들은 것은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었습니다. 땅의 사람들이야말로 하늘의 소리를 제일 민감하게 듣고, 세상의 변화를 가장 빨리 알아차리는 사람들입니다.

● 함께 부르는 희망의 노래
성경은 그 후에 일어난 일들도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 한센병 환자들은 황급히 성으로 달려가 아람 사람들이 달아났음을 성문지기들에게 알리자, 그들은 환호성을 올리며 왕궁에 그 사실을 알립니다. 하지만 왕과 신하들은 그런 사실을 쉽사리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주저하고 있을 때 백성들은 성문을 열고 달려나가 아람진영을 마음껏 약탈합니다. 식량이 지천이 되자 내일이면 식료품값이 내려갈 것이라는 엘리사의 예언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왕은 뒤늦게 사태를 수습해보려고 하지만 성난 민심은 왕의 임명을 받은 관리를 밟아 죽이고 맙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스라엘의 역사의 한 토막을 민중의 시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희망은 남의 탓만 하는 무력한 왕에게 있지 않습니다. 관료들에게 있지 않습니다. 희망은 당신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방리유, 우리 시대의 성밖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이 가장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 존재들입니다. 이주 노동자들, 쌀 개방을 앞두고 절망한 농민들, 도시 빈민들…우리 사회가 그들을 거치장스러운 장애물이 아니라 함께 살아야 할 소중한 이웃으로 인정하고 그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최선의 배려를 다할 때, 그래서 그들이 희망의 노래를 부를 때 우리 사회는 살만한 곳으로 바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예수께서도 자기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다"(13:12)고 말하면서 우리도 진영 밖으로 나가 그가 겪으신 치욕을 짊어지자고 권합니다. 오늘 오후에 우리가 하는 <후원자 축제>는 바로 그런 부름에 응답하기 위한 작은 시도입니다. 우리가 그늘진 땅에 사는 이들 곁에 사랑으로 다가설 때 하늘의 희망이 세상에 주입될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초대에 기쁨으로 응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5년 11월 13일 12시 15분 44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