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47. 예수의 길
설교자 김기석
본문 마태4:1-11
설교일시 2005/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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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길
마4:1-11
(2005/11/20)

[그 즈음에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께서 밤낮 사십 일을 금식하시니 시장하셨다. 그런데, 시험하는 자가 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하였다." 그 때에 악마는 예수를 그 거룩한 도성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자기 천사들에게 명하실 것이다.' '그들이 손으로 너를 떠받쳐, 너의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할 것이다' 하였다." 예수께서는 악마에게 말씀하셨다. "또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라' 하였다." 또다시 악마는 예수를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 주며, 그에게 말하였다. "네가 나에게 엎드려서 절을 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겠다." 그 때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하였다." 이 때에 악마는 떠나가고, 천사들이 와서, 예수의 시중을 들었다.]

우스갯소리 한마디하겠습니다. 어느 경건한 신부님이 마차를 타고 어딘가로 가고 계셨더랍니다. 그의 왼편에는 매우 아름다운 여인이 앉아 있었고 오른편에는 몹시 추한 여인이 앉아 있었습니다.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신부님은 지긋이 눈을 감고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가만히 들어보니 기도는 두 마디뿐이었습니다. 마차가 왼편으로 쏠릴 때는 "주님의 뜻대로 해주십시오", 오른편으로 쏠릴 때에는 "시험에 들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 마음 아시겠어요? 아름다운 여인을 보며 그 신부님의 마음도 살짝 흔들렸던 것 같습니다. 이런 마음의 흔들림이야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아름다운 수로부인을 보고는 잡고 가던 소의 고삐를 놓고 벼랑에 핀 꽃을 따서 바치며 <헌화가>를 바친 노인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자줏빛 바위 끝에/잡은 암소를 놓게 하시고/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이렇게 살짝 흔들리는 마음조차 종교적 계율이나 규범으로 단죄한다면 세상은 삭막한 곳으로 변할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참 험한 곳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시험에 들지 말게 하소서"(Do not put us to the test)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자칫 한눈을 팔면 타락의 벼랑으로 굴러 떨어질 수 있는 게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것은 일상적 시험이 아니라 근본적 시험이었습니다. 그 시험을 통해 예수님의 삶의 방향이 결정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 마술적인 신앙을 거부하다
사탄은 주리신 예수님께 달콤한 유혹을 던집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 시험하는 자인 사탄은 역시 만만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는 금식하는 동안 예수님을 괴롭혔던 근본적인 문제를 들고 나온 겁니다. 주님은 몸 받아 살아가는 사람들이 겪는 아픔과 슬픔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그 아픔과 슬픔을 덜어주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두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셨을 것입니다. 사탄은 즉각적인 해결을 예수님께 제안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굶주린 이들을 돕고 싶다면 당장 이 광야에 널려 있는 돌을 빵으로 바꾸어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유혹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깡마른 엄마 팔에 안긴 채 희노애락의 감정조차 드러나지 않는 퀭한 눈의 아이들을 볼 때마다, 집을 잃고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을 볼 때마다, 부모를 잃은 아이가 개에게 물려죽었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돌을 빵으로 바꿀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은 생각이 들곤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제안을 거절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지당한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이 말씀으로 우리 마음이 시원해지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땅의 현실에 눈을 감고 계신 것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이 '빵'의 문제보다 더 근원적이라는 사실을 가르치시려는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 보아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거절하신 것은 빵의 문제가 아니라, 돌을 빵으로 바꾸는 문제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에게 마술사가 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돌은 돌이고, 빵은 빵입니다. 돌을 빵으로 바꾸는 것은 하나님의 질서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탄은 예수님에게 그 질서를 깨뜨릴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애당초에 돌을 빵으로 바꿀 능력이 없으니까 이런 시험은 우리에게 '해당 무'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현실 속에서 돌을 빵으로 바꾸라는 사탄의 음성을 끊임없이 듣고 있습니다. 믿기만 하면 부자가 되고, 출세한다고요? 예수님은 그런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믿음은 마술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믿음을 도깨비 방망이 정도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부자가 되고 싶어합니다. 돈 싫어하는 사람 없습니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돈 없는 사람은 존재가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악착같이 돈을 벌려고 합니다. 돈에게 지배당하는 사람에게는 이웃도 없고, 부모형제도 안중에 없습니다. 이게 모두 돌을 빵으로 바꾸라는 사탄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돈이 지배하는 순간 사람다움은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돌을 빵으로 만들려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무시되기 일쑤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이 예수님 일행을 찾아 가버나움에 왔을 때 예수님은 그들을 좀 못마땅하게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요6:26). 빵의 문제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삶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사탄은 부분의 문제를 전체인양 왜곡합니다. 빵이 넉넉하다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영적 존재여서 하나님의 뜻을 행할 때만 공허감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나누고, 섬기고, 돌보며 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면 돌을 빵으로 바꾸는 마술을 부리지 않아도 굶주린 이들을 먹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조금 덜 먹고, 조금 더 불편하게 살기로 작정하면 됩니다. 이것은 우리 삶에 대한 근본적 도전입니다. 돌로 만든 빵을 먹고 돌가슴이 되어 살 것인가, 아니면 이웃과 좋은 것을 나누며 부드러운 가슴으로 살아갈 것인가? 이 물음에 삶으로 대답해야 합니다.

● 성전 중심주의를 거부하다
이제 사탄은 광야를 떠나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이끌어갑니다. 유다인들에게 예루살렘은 세계의 중심입니다. 그 한복판에 있는 것이 성전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비록 로마의 지배를 받고있는 처지이기는 하지만, 성전이 우뚝 서 있는 한 자기들은 다시 일어설 것임을 그들은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성전은 민족 해방을 위한 희망의 요새인 셈입니다. 사탄은 성전의 가장 높은 곳에 예수님을 데리고 올라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뛰어내리라고 부추깁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들이 "손으로 너를 떠받쳐서 너의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탄은 멋진 퍼포먼스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그런 기적을 보여준다면, 구름 떼처럼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따를 것이라고 은밀히 속삭였겠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일언지하에 그런 제안을 거절하시며 외치십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라".

왜 이런 제안을 거절하셨을까요? 그것은 사람들을 기적의 관객으로 전락시키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당신을 우러러보고 추앙하게 만들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어느 시대이든 사람들은 숭배할 대상을 찾습니다. 지금은 거대한 자본이 '스타 시스템'을 통해 대중들에게 숭배할 대상을 제공합니다. 연예계 스타, 스포츠 스타…이런 이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대리 만족을 얻습니다. 종교계의 스타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성전 꼭대기에 서있습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은 사람들에게 강력한 규범으로 작용하고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추종자가 됩니다. 그들은 권력의 단맛에 길들여지고, 인기에 영합하게 됩니다. 그들은 대중들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신비의 아우라 뒤로 물러서곤 합니다. 거리가 미를 창조한다는 말처럼, 사람들은 접근하기 어려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동경합니다. 이름이 높아갈수록 그들은 섬김과 비움을 통해 맑아지는 삶에서 벗어나서, 대접받는 일에 익숙해지고, 지시하는 일에 익숙해집니다. 타락입니다.

바다는 가장 낮은 곳에 있기에 세상의 모든 물들을 받아들입니다. 바다가 바다인 까닭은 다 받아들이기 때문이랍니다. 예수님은 낮은 곳으로 흘러가곤 하셨습니다.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은밀하게 작용하여 생명을 살리셨습니다. 기적은 아무도 하지 못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데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기적의 관객이 아니라, 기적의 일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성전 안에서만 믿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 한 복판에서 사랑의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택할 길입니다.

● 힘이 아니라 돌봄을 택하다
사탄은 이제 예수님을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주고 말합니다. "네가 나에게 엎드려서 절을 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겠다." 사실 이 본문의 바른 순서는 "이 모든 것을 네게 주겠다. 네가 나에게 엎드려서 절을 하면"입니다. 사탄은 먼저 모든 나라와 영광을 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조건을 붙입니다. "나에게 엎드려서 절을 하면". 참 교묘한 유혹입니다. 사람은 권력과 영광을 얻기 위해서 사탄과도 계약을 맺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처음부터 우리 양심을 꺼림칙하게 만드는 조건을 들고 나오지 않습니다.

요즘 저는 가끔 젊은 아가씨들의 전화를 받습니다. 그들의 목소리는 참 밝고 호의적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놓쳐서는 안 될 좋은 기회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뒤에 붙은 조건절을 듣지 않으려고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전화 끊겠습니다" 하고는 수화기를 내려놓습니다. 세상에 하나님의 은혜를 빼고는 공짜란 없습니다. 우리는 가끔 사탄의 유혹에 귀를 기울일 때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 현실에 실망할 때면 더욱 그렇습니다. "내가 감리사라면", "내가 감독이라면", "내가 국회의원이라면", "내가 대통령이라면"…공허하기는 하지만 이런 힘에의 유혹은 참 달콤한 것입니다. 어떤 사회 문제를 일시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답답하기에 우리는 그런 상상을 해보는 것입니다. 돈이나 쾌락보다 더 달콤한 것이 권력이랍니다. 나의 생각을 다른 이에게 강제할 수 있다는 것이 묘한 쾌감을 주는 것 같습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 사탄에게 절하는 순간, 우리 삶의 소속이 바뀝니다. 사탄에게 종속되는 것입니다. 사탄에게 종속되는 순간, 우리는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능력을 잃게 됩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영적인 자유도 잃게 됩니다.

사탄과 제휴한 권력의 가장 큰 문제는 그 자리를 보존하기 위해 백성들을 억압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탄의 제안을 거절한 것은 그것이 사탄의 제안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권력과 힘을 가지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아셨기 때문일 겁니다. 예수님의 길은 인생의 대박을 꿈꾸는 사람들의 길과는 다릅니다. 어느 결에 우리의 삶은 속도전이 되었습니다. 내실보다는 규모를 중시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사탄에게 절하며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마더 테레사는 자기의 사역을 이렇게 요약한 바 있습니다.

"난 결코 대중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는다.
난 다만 한 개인을 바라볼 뿐이다.
난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껴안을 수 있다.
단지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씩만…"

우리는 어떤 일을 대대적으로 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한 번에 한 사람만' 사랑하겠다는 결의만 있다면 우리는 새로워질 것입니다. 영성이란 지금 고통받는 사람을 사랑으로 보듬어 안는 용기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떤 사람이 심은 씨앗이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자라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심은 것이 사랑과 희망의 씨앗이라면 그것은 기어코 아름다운 열매로 자라날 것입니다. 성도는 계산하는 사람이 아니라 희망하는 사람입니다.

옛말에 크게 한 번 죽어야 그 후에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살아난다(大死一番 事後蘇生)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당하신 시험은 육적인 욕망의 탈을 벗는 기회였습니다. 그후로 예수님은 흔들리지 않는 바위처럼 당신의 길을 가셨습니다. 우리는 그 길이 생명의 길이라고 믿기에 그 길을 따르기로 한 사람들입니다. 물질과 허영심과 권력의 유혹을 물리치고 나면 우리 삶도 맑아질 것입니다. 예수님이 택하신 좁은 길을 통해 우리는 하늘에 이를 것입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5년 11월 20일 13시 49분 4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