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48. 생명은 소명이다
설교자 김기석
본문 요12:44-50
설교일시 2005/11/27
오디오파일 s051127.mp3 [5388 KBytes]
목록

생명은 소명이다
요12:44-50
(2005/11/27, 대강절 첫째 주)

[예수께서 큰소리로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요,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다. 그것은 나를 믿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내 말을 듣고서, 그것을 지키지 않을지라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는 것이다. 나를 배척하고 나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심판하시는 분은 따로 계신다. 내가 말한 바로 이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나는 내 마음대로 말한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무엇을 말해야 하고 또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가를, 친히 나에게 명령해 주셨다. 나는 그 명령이 영생을 준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나는 무엇이든지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해 주신 대로 말할 뿐이다."]

● 나도 사는데 너도 살아
쌀 개방에 반대하는 농민들의 분노의 함성이 뜨겁습니다. 농촌 사람들이 겪는 절망의 현실을 알리기 위해 소중한 생명을 버린 이들이 있습니다. '꼭 그래야 했나' 하다가도 '오죽하면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29일간의 단식으로 쌀 개방에 반대했던 민주노동당 강기갑 의원이 단식을 풀면서 했던 인터뷰를 보셨는지요? 그는 "농민 여러분, 살아서 싸웁시다" 하고 말하다가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황우석 박사를 둘러싼 윤리논쟁이 가뜩이나 을씨년스러운 초겨울의 풍경을 더욱 쓸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던 사람의 쓸쓸한 퇴장을 지켜보는 우리 마음도 착잡합니다. 살다보면 '존재의 터전'이 흔들리는 것 같은 상황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여러 해 동안 공들여 쌓아올렸던 것들이 일시에 무너질 때, 그것을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을 때,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마련입니다.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그래도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비틀거리면서라도 다시 길을 떠나는 것, 그것이 용기이고 믿음입니다.

며칠 전 신문에서 본 컬럼이 떠오르네요. 정박미경이라는 자유기고가가 초등학교 4학년인 조카가 심심해서 써 본 소설 내용을 소개한 것이었는데 그 내용이 참 맹랑했습니다. 열 살 남짓한 여자 아이가 주인공인데 그 아이는 집이 가난하고 공부도 못하고 게다가 너무 못생겼습니다. 자살을 결심하고서 한강을 찾아가 넋두리를 늘어놓습니다. "난 세상 살 이유가 없어. 저 물에 뛰어들 거야. 물이 너무 차가우면 다시 나올까? 아냐, 내 길은 이것 뿐이야." 굳은 의지로 한발을 물에 담그려는 순간 누군가 주인공을 잡아끌며 말합니다. "나도 사는데 너도 살아!" 이 초등학생의 소설은 이런 말로 끝납니다. "뒤돌아보니, 전인권이다. 끝".

이 글을 소개하면서 필자는 세 가지 점에서 충격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열살 남짓한 아이의 소일거리가 소설 쓰기라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자살을 결심한 주인공의 전형성입니다. 가난하고 공부 못하고 못생겨서 슬픈 아이가 생각해낸 것이 자살이라는 게 세상의 고정관념이나 편견을 그대로 답습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세 번째 이유는 유쾌한 충격이었는데, 그것은 "나도 사는데 너도 살아"라고 말하는 이가 전인권이라는 발상 때문이랍니다. T.V에서 본 전인권 씨는 사자갈기 같은 퍼머 머리에, 잘생기지도 않았고, 말도 어눌하고, 목소리도 탁합니다. 어린아이가 보기에 전인권은 세상을 살 만한 이유가 별로 없는 것 같은 데도 꾸역꾸역 열심히 살아가는 인물의 전형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쓴 분은 이 열살 꼬마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근사함'말고도 세상사는 이유란 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었다"면서, 자기도 누군가에게 살아있음의 의미를 느끼게 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한겨레신문, 2005년 11월 23일자 26면)

●입구와 출구 사이의 삶
어느 철학자(M. Heidegger)는 오늘의 사람들이 입구와 출구를 잃어버렸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하는지 왜 사는지도 모르고 산다는 것이지요. 그것을 일러 '존재 망각'이라고 합니다. 자기를 잃고도 잃은 줄을 모르고 사는 것이지요. 그러니 자기를 되찾으려는 절박함이 없습니다.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에 몰두할 따름입니다. 기독교는 모든 생명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고백합니다. 그렇기에 생명을 가진 것들은 다 소중합니다. 그 중에서도 인간은 영적 존재로서 하나님과 소통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생명은 '소명召命'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시면서 할 일을 주셨습니다. 그 '할 일'이 뭔가 멀리서 찾을 것 없습니다. '지금, 여기'(Here and Now)의 삶을 충실히 살아내면 됩니다. 가까이 있는 이들을 돌보고, 북돋워주고, 함께 어울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일입니다. 어려운 일도 많겠지만 할 일이 있는 한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며칠 전에 유아부 교사인 김진경 씨가 쌍둥이 남매를 낳았습니다. 병원에 찾아갔더니 쌍둥이를 낳은 사람답지 않게 마치 무용담을 늘어놓는 것처럼 애 낳은 경과를 신명나게 설명했습니다. 참 품성이 밝고 명랑한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이야기가 모유 수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간호사가 "내일 아침에 아기에게 젖을 먹여야 하니까 수유실로 내려오세요" 하더랍니다. 그런데 조금만 움직여도 견딜 수 없는 통증을 느끼던 터이라, 다소 당황스러운 어조로 "내려갈 수 있을까 모르겠어요" 하고 말했답니다. 그러자 간호사는 단호하고도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할 수 있어요. 엄마니까." 기가 막힌 말 아닙니까? 과연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데 성공했을까요, 못했을까요? 여러분이 짐작하시는 대로입니다. 사람은 누군가에게 내가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할 때 가장 큰 능력을 발휘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그런 일을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사람입니다.

● 예수의 열망
잘산다는 것은 '보내신 분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일 겁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가리켜 '나를 보내신 분'이라고 지칭합니다. 예수님의 생은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려는 열망 하나로 점철되었습니다. 십자가는 하늘 아버지의 뜻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뜻을 꺾은 이의 처절하지만 아름다운 순종의 표상입니다. 그의 마지막 말은 "다 이루었다"(요19:30)입니다. 예수의 죽음은 무력한 자의 패배가 아니라, 소명을 온전히 이룬 자의 귀환인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입구와 출구를 압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인생들입니다. 그것이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금을 충실하게 살아내야 합니다. 성도들은 오늘을 영원에 잇댄 채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주님은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까닭을 분명히 자각하고 계셨습니다. "나는 빛으로서 세상에 왔다." 이 말은 매우 함축적입니다. 자기 내면의 어둠에 갇힌 사람들을 해방시키러 왔다는 뜻일 수도 있고,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이들에게 분명한 길을 보여주기 위해 왔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이것을 알아듣기 쉽게 풀어서 설명하시기도 했습니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막10:45)
"인자는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러 왔다."(눅19:10)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요10:10)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다."(요12:47)

표현은 다양하지만 그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빛으로 왔다'는 말이 됩니다. 초가 자기 몸을 태움으로 빛을 발하듯이 주님은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인간의 등불을 밝히셨습니다. 세상 길에서 방황하다가 삶의 지향을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기 위해 고난의 가시밭길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천하보다도 귀히 여기시며 그들이 자기 생명의 몫을 충분히 누릴 수 있도록 그들을 치유하고 힘을 북돋워주셨습니다. 그 은총을 경험한 사람은 더 이상 어둠 가운데 머물 수 없습니다.

● 사랑이 있는 곳에서 삶은 축제가 된다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주님은 철저히 외면 당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그렇게 편한 분은 아닙니다. 그 눈길 앞에 서면 누구나 죄인일 수밖에 없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배척 당하면서도 당신이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고 심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 날의 심판관은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그 말씀에 순종하느냐, 순종하지 않느냐에 따라 우리 삶은 갈릴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가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셈입니다. 요한은 심판을 받는다는 말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심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빛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였다는 것을 뜻한다."(요3:19)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는 것이 곧 심판을 받은 삶이라는 말입니다. 말씀이 심판한다는 말은 주님의 뜻을 거슬러 내 멋대로 사는 삶이 곧 나를 심판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타락이란 하나님을 등진 상태,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상태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기를 싫어하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타락한 마음 자리에 내버려두셔서, 해서는 안될 일을 하도록 놓아 두셨습니다."(롬1:28)

해서는 안 될 일을 거리낌없이 해대는 삶 자체가 이미 심판을 받은 삶입니다. 우리가 정말 잘 살기를 원한다면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이 대충 살아도 된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자기 닦음이 없이는 우리 믿음이 죽은 믿음이 되기 쉽습니다. 자기 닦음을 훈련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보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처럼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손에 매어 표로 삼고, 이마에 붙여 기호를 삼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들려주신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습니다. "나는 무엇이든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여 주신 대로 말할 뿐이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듣는 분'입니다. 텅 빈 항아리에 고개를 숙이면 하늘의 메아리가 들려옵니다. 주님도 당신을 온전히 비워 하늘의 소리를 담으셨습니다.

● 생명과 평화의 축제를 위하여
테레사 수녀에게 어느 기자가 물었습니다.
"수녀님은 뭐라고 기도하십니까?"
그 질문에 테레사 수녀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습니다.
"저는 듣습니다."
기자가 의아해하며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수녀님이 들으실 때,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분도 들으십니다."

살다보면 마음이 산란하여 견디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면 앉아야 합니다. 마음을 비우고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끈질기게 앉아 있다보면 우리 영혼의 빈 터에 하늘의 고요가 깃들 것입니다. 그 고요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지쳤던 영혼에 새 힘이 생길 것입니다. 주님이 오심을 기다리는 대강절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기다림의 시간에 고요히 내리는 흰 눈처럼 주님의 마음이 우리의 지친 가슴을 포근히 덮어주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가슴에 사랑과 평화의 샘물이 고이면 그것을 퍼다가 지친 영혼들에게 나누어주기를 소망합니다. 삶에 지친 이웃들이 우리 때문에 살맛을 되찾을 수 있다면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사랑이 있는 곳에서 삶은 축제가 됩니다. 우리가 이르는 곳마다 생명과 평화의 축제가 시작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5년 11월 27일 12시 10분 34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