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49. 영광이 깃든 땅
설교자 김기석
본문 시85:8-13
설교일시 2005/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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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이 깃든 땅
시85:8-13
(2005/12/4)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내가 듣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평화를 약속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백성 주님의 성도들이 망령된 데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진정으로 평화를 주실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구원은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가까이 있으니, 주님의 영광이 우리 땅에 깃들 것입니다. 사랑과 진실이 만나고 정의는 평화와 입을 맞춘다.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는 하늘에게 굽어본다. 주님께서 좋은 것을 내려 주시니, 우리의 땅은 열매를 맺는다. 정의가 주님 앞에 앞서가며, 주님께서 가실 길을 닦을 것이다.]

● 우리 시대의 풍경 둘
무성하던 나뭇잎들이 떨어진 거리의 풍경이 쓸쓸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쓸쓸한 것은 사람들이 빚어내는 풍경입니다. 한쪽에는 농민들과 노동자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전경들이 있습니다. 서있는 자리가 다를 뿐 그들은 다 착한 시민들입니다. 그런데도 마치 불구대천의 원수인양 서로를 대합니다. 한쪽은 물대포를 쏘아대고 다른 한쪽은 대나무 몽둥이를 휘두르며 전투 아닌 전투를 치르고 있습니다. 어떤 메시지를 드러내기 위한 몸짓치고는 과격합니다. 왜 이 지경이 되었습니까? 가슴에 불이 붙었기 때문입니다. 절망의 불이 분노의 불길이 되어 그 착한 사람들의 마음을 불사르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그 슬픈 현장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며 "우리의 거리에는 울부짖는 소리가 전혀 없을 것"(시144:14)이라고 노래한 히브리 시인을 부러워합니다. 우리 사회를 채우고 있는 이 소란이, 이 울부짖음이 언제쯤 멎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삶의 속도를 늦추고 살아온 발자취를 돌아보고, 새로운 삶을 다짐해야 하는 이 시기에 우리 살림살이는 큰바람에 까불리는 배처럼 위태롭기만 합니다.

그러나 이런 혼란의 와중에서 우리는 청량한 종소리를 듣습니다. 구세군의 자선냄비가 등장해 행인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있습니다. 딸랑딸랑 울려대는 종소리는 어쩌면 땅에 코를 박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늘을 보라는 초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두 가지의 상반된 풍경을 대하다가 잠시 멈추어 서서 기도를 올렸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예수님이 처음 세상에 오셨을 때 목자들은 천사들의 찬양소리를 들었습니다.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눅2:14) 천사들의 찬양은 그리스도의 발길이 닿는 곳 어디에서나 일어날, 또 일어나야 할 현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주님의 소명은 인정과 소망의 등불이 꺼져가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평화를 이루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처음 이 세상에 오셨을 때의 형편도 지금처럼 어려웠습니다. 주님은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 백성들의 가혹한 삶의 자리에 오셔서, 곤고한 사람들의 가슴마다 평화와 사랑의 씨앗을 심으셨습니다. 주님은 땅의 현실을 외면한 채 하늘만 가리키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죽음을 피하는 방법을 가리켜주러 오신 분이 아니라, 어떻게 삶을 성화(聖化)시킬지를 가르치러 오신 분이십니다. 땅이 없는 하늘은 없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누군가의 '설 땅'이 되어준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들에게 가장 황당한 일이 뭔지 아세요? 시인 반칠환은 "새들에게 가장 충격인 것은//날아오를 하늘이 없는 것보다/내려앉을 대지를 발견하지 못했을 때라고"(<새2> 전문) 노래합니다. 생각해보니 그렇지요? 믿음이란 이 땅의 현실에 눈을 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땅에 하늘을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메마른 대지에 풀씨를 심고 아침마다 물을 부어주는 이의 손길처럼, 돌짝 밭에서 돌을 골라내는 농부들처럼, 믿음의 사람들은 절망하고 원망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지금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내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새들에게 내려앉을 대지가 필요하듯이, 세상살이에 지쳐 비틀거리는 누군가의 설 땅이 되어주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 고통이 주는 선물
시편 85편의 시인도 역사의 어둠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현실이 너무 힘들기에 그는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노여움을 품고 계신 것은 아닌지, 그래서 그들의 현실에 눈을 감고 계신 것은 아닌지 의심합니다. 그러다가 그는 자기들의 역사를 돌이켜 봅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이라는 헛된 자부심에 안주했을 뿐, 하나님의 뜻보다는 욕망을 주인으로 삼고 살았던 부끄러운 과거가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들이 어긋난 길로 갈 때마다 하나님은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려고 애쓰셨습니다. 때로는 가시나무로 그들을 막고, 때로는 담을 둘러쳐서 그들의 길을 막으시기도 했습니다. 인생 채찍을 드실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이 자기들의 잘못을 깨닫고 마음을 돌이키기만 하면, 언제 그랬느냐 싶게 그들을 다시금 받아들여주셨고, 그들의 모든 상처를 어루만져 낫게 해주셨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주님의 땅에 은혜를 베푸시어,
포로가 된 야곱 자손을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백성들이 지은 죄악을 용서해 주시며,
그 모든 죄를 덮어 주셨습니다.
주님의 노여움을 말끔히 거두어 주시며,
주님의 맹렬한 진노를 거두어 주셨습니다.(시85:1-3)

고통은 세상에 팔렸던 우리 정신을 제자리에 돌려놓으라는 하나의 초대입니다. 어려움이 없다면 우리는 자신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돌아보지 않습니다. 고통은 지금까지 살아온 우리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돌아보게 합니다. 이 비판적 거리 두기를 통해 우리는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겁니다. 영어로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는 'human being'입니다. 사람됨을 가리키는 단어는 'being human'입니다. 이 둘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람됨이라는 요소를 안에 갖추어야 합니다. 그 연결고리 노릇을 하는 게 고통입니다. 고통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자기의 약함을 알게 됩니다. 고통받는 다른 사람의 아픔도 이해하게 됩니다. 고통을 통해 더욱 폐쇄적이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고통을 통해 더욱 성숙해지는 사람도 있는 법입니다.

● 지금은 선택의 시간
시인은 이제 고통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께 엎드립니다. 마땅히 서야 할 자리를 이제 되찾은 것입니다. 그는 주님의 백성이 주님을 기뻐하도록 자기들의 삶을 회복시켜 달라고 빕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또한 그는 백성들이 망령된 데로 돌아가지만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그 땅에 평화를 주실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깃들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평화는 저절로 오지 않습니다. 망령된 행실을 버려야 합니다. 거짓 신들에게 절하는 일을 그만 두어야 합니다. 돈에게 절하고, 권력을 탐하고, 쾌락에 탐닉하는 삶을 그만 둘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화라는 값진 선물을 주실 것입니다. 라는 잡지는 성탄절을 앞두고 전 세계에 있는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도덕 재무장을 위한 기도를 당부하면서 e-mail을 통해 이런 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어느 시대이든 한 사회가 그 참된 도덕적 원리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역사 속에서 그런 순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입법자들이 이데올로기를 삶의 원칙보다 앞세우려고 하는 바로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정의의 나팔을 울리고 진실을 말해야 할 때입니다(There are moments in every generation when a society must decide on its real moral principles. This is one of those points in history: When our legislators put ideology over principle, it is time to sound the trumpets of justice and tell the truth).

미국의 평화운동가들이 전 세계의 양심적인 기독교인들에게 이런 호소를 하는 것은 미국이 약자들을 돌보라는 성서의 정신을 버리고, 강자의 이익에 봉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가리켜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창1:25)고 했습니다. 이 말은 세상에 대한 감상문이 아닙니다. 이 말은 오히려 도전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거기에 따라 삶을 선택하라는 도전 말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모든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시116:12) 이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 참 사람입니다. 그들은 늘 그늘진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눈길을 돌리게 됩니다. 그런 마음이 하나 둘 모여 이루어진 세상을 시인은 아름답게 그리고 있습니다.

사랑과 진실이 만나고, 정의는 평화와 서로 입을 맞춘다.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는 하늘에게 굽어본다(10-11)

'사랑'(헤세드)과 '진실'('emet), '정의'(쩨데크)와 '평화'(샬롬)는 우리가 갈망하고 있는 구원의 내용입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네 가지 속성은 우리가 삶을 통해 구현해야 하는 과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런 세상을 시작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작은 씨앗의 형태로만 주어집니다. 거기에 물을 주고, 가꾸는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무정함과 무관심을 딛고 누군가를 사랑으로 돌볼 때, 우리 속에서 돋아나는 거짓과 불성실을 도려내면서 진실을 회복할 때, 불의를 향해 '아니오'라고 말하며 위험을 무릅쓰고 정의의 편에 설 때, 나눔과 섬김을 통해 다른 이들의 마음에 깃든 원한 감정을 풀어내 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영광이 깃든 땅에서 사는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현실은 이런 덕목들과는 너무나 먼 거리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삶의 자리에서 희망을 만드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 통속(通俗)을 넘어서
저는 지난 수요일에 한겨레신문을 보다가 아주 반가운 얼굴을 만났습니다. 우리 교회 정원석 성도가 미담의 주인공이 되어 다소 쑥스러운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영등포에서 미래흉부외과를 운영하고 있는 정 원장은 서울 시내에 있는 소방관들 중에서 하지정맥류를 앓고 있는 이들에게 무료로 수술을 해주고 있었습니다. 벌써 12명이나 그 혜택을 입었고, 38명이 수술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그는 제재소 가까이에 살았답니다. 메마른 계절이면 목재 창고에 불이 나곤 했는데, 그때마다 달려와 불을 꺼주곤 했던 소방관들에 대한 고마움을 정 원장은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마움을 아는 게 사람일진대 그는 참 멋진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부여받은 능력으로 서로 조금씩 돕고 사는 것이 세상을 밝게 만드는 노력 아닐까요? 고맙다며 음료수 한 병을 수줍게 건네는 소방대원들의 손에서 삶의 보람을 느낍니다." 정 원장은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통속(profane)에 떨어지기 쉬운 우리 삶을 거룩을 향해 곧추세우기 위한 방법으로 가장 좋은 것은 사랑의 수고입니다. 정 원장의 도움으로 건강을 되찾은 소방관들도 복을 받았지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정 원장은 더욱 복 받은 사람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돈이 아니라, 도덕적 자산이고,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연민이고, 원칙에 대한 충성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세상에 도덕적 자산과 원칙에 대한 충성이라는 하늘의 뜻을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땅에 산소를 공급하는 일과 같습니다. 우리가 사랑과 진실과 정의와 평화의 세상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안아 다섯 걸음, 열 걸음을 걸으실 것입니다. 이게 우리의 희망입니다. 내려앉을 대지를 발견할 수 없어 낙심한 사람들에게 우리가 설 땅이 되어줄 때 세상은 변화될 것입니다. 사람은 누군가의 동료가 되고, 남들을 보살핌으로 성숙해집니다(아브라함 요수아 헤셀). 대강절기에 우리 눈이 고통받는 이웃들을 향해 크게 열리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들 곁으로 한 걸음 다가설 수 있는 용기를 회복하기 바랍니다. 내가 변하면 세상이 변합니다. 우리 교회가 변하면 이 땅은 하나님의 영광이 깃든 땅이 될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5년 12월 04일 12시 02분 06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