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51. 좋은 것을 굳게 잡으라
설교자 김기석
본문 살전5:16-24
설교일시 2005/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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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것을 굳게 잡으라
살전5:16-24
(2005/12/18)

[항상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예수 안에서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 예언을 멸시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을 분간하고, 좋은 것을 굳게 잡으십시오. 여러 가지 모양의 악을 멀리하십시오. 평화의 하나님께서 친히 여러분을 완전히 거룩하게 해주시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여러분의 영과 혼과 몸을 흠이 없고 완전하게 지켜 주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을 부르시는 분은 신실하시니, 이 일을 또한 이루실 것입니다.]

어느 유대교 회당에서 직원을 채용한다는 공고가 나가자 많은 사람들이 지원했습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메시야가 오시는지 망을 보고 있다가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왜 그 일에 지원하게 되었는지를 묻자 그들은 다소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두 가지의 매력이 있습니다. 첫째는 별로 할 일이 없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은퇴할 때까지 직장을 잃을 염려가 없다는 점입니다.” 알아 들으셨지요? 재작년에 우리 나라에 왔던 평화운동가인 유대인 랍비가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주님이 다시 오시지 않을 것을 확신하고 사는 것 같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날이 도적같이 이르리라”는 말씀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언제 주님이 우리에게 결산을 요구하실지 알 수 없습니다. 우주적 파국으로서의 주님의 날이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개인적 종말로서의 죽음은 오늘일 수도 있고 내일일 수도 있습니다. 항상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위협이 아니라 오늘을 보람있게 살라는 요청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주님은 지금도 거듭해서 우리의 삶 가운데 오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일상의 삶 가운데 강림하고 계심을 알아차릴 때 우리는 삶이 축복임을 깨닫게 됩니다.

● 기독교인의 인식표
주님의 강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삶의 내용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기독교인의 인식표는 무엇이냐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것을 ‘기쁨, 기도, 감사’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기쁨은 대개 우리가 바라던 것이 이루어질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그렇다면 기쁨은 늘 외부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하는 일의 결과에 따라서, 혹은 만나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서 기쁠 수도 있고 기분이 나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기쁨은 조건적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권합니다. 기쁨이 마음먹었다고 오는 게 아니라면 이것은 불가능한 요청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기쁨의 뿌리는 바깥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삶 가운데 계신 주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다는 자각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실패, 배신, 쓰라림, 고통, 외로움, 가난…그것이 무엇이든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 우리는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기쁨은 우리의 삶에 조용히 스며드는 기쁨인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기도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누가 기도할 수 있습니까?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자족하는 사람의 기도에는 절실함과 진실함이 없습니다. 진정한 기도란 벌거벗은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드러내는 일입니다. 우리가 늘 기도의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기도를 하지 않으면 자기 중심성을 극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나를 중심으로 바라보는 데서 삶의 비극이 생깁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되고 싶고, 대접받거나 칭찬을 받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그런 기대가 깨질 때 상처를 입고, 질투를 하게 되고, 원망을 하게 됩니다. 기도의 마음을 유지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런 마음조차 하나님께 바치기 때문에 자아의 무게로 인해 추락하는 일이 없습니다. 또 진정한 기도란 나의 문제만 가지고 주님께 가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사람은 눈물의 골짜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처지에 눈길을 주고, 그들의 사정을 하나님께 아뢰는 사람입니다. 요즘 우리는 새벽마다 세상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기억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어제 저는 신문에서 카슈미르 카코티 계곡 주민들이 긴급구호품을 받기 위해 줄을 길게 서있는 광경을 보면서 하나님께 오랫동안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세상의 아픔을 이해하고, 그 때문에 가슴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신앙인은 둥근 네모라는 말처럼 형용모순입니다.

기독교인들의 또 다른 인식표는 감사입니다. 현대 세계의 비극은 감사가 줄어든다는 사실입니다. 감사의 적은 풍요로움입니다. 무엇이든 넉넉한 사람들은 감사할 줄 모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라야 한 그릇의 고봉밥이 고마운 것입니다. 외로운 사람이라야 곁에 머물러주는 이에 대해 고마워합니다. 중한 병에 걸려본 사람이라야 대지 위를 걸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은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말고 선물로 여기라는 말입니다. 생의 모든 것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축제임을 늘 자각하라는 말입니다.


● 내면의 소리를 들으라
어떻게 하면 이렇게 살 수 있을까요? 바울은 그것을 간결하게 말합니다.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 예언을 멸시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내면에 오셔서 속삭이시는 성령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사야의 말을 인용해서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한 것들, 사람의 마음에 떠오르지 않은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마련해 주셨다”면서 “성령은 모든 것을 살피시니, 곧 하나님의 깊은 경륜까지도 살피신다”고 말합니다(고전2:9-10 참조). 하나님은 우리의 영에게 늘 말을 건네고 계십니다.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향해 연민의 감정을 느낄 때가 있지 않습니까? 많은 시간을 무정하게 사는 우리인데 어느 순간 이상하게도 이웃들의 고통과 슬픔이 내 아픔으로 다가올 때가 있지요? 그때가 바로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불을 지피실 때입니다. 대개 이런 순간은 우리 마음이 폭풍이 지나간 후의 고요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을 때 찾아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끝없이 말을 건네고 계시지만, 우리의 귀가 온통 세상을 향해 있기 때문에 성령의 속삭임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덜 중요한 일 때문에 가장 중요한 초대를 거절하는 어리석음 속에서 살아갑니다. 성령의 불꽃을 꺼뜨리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영혼이 그 음성을 듣기 위해 늘 고요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에 집중해야 하는 까닭은 성령 안에서 살기 위한 것입니다. 성령의 움직임을 주의 깊게 식별하는 사람은 다정한 사람이 됩니다. 이웃들에게 다가가고 싶고, 말 건네고 싶고, 일으켜주고 싶은 마음이 일 때 그 마음을 억누르지 마십시오. 편안함에 길들여진 몸은 그 일을 꺼릴 겁니다. 하지만 몸의 말을 듣기 보다는 성령의 초대에 응하는 것이 잘 사는 길입니다.

또 성령의 부름을 식별할 수 있는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묵상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중하게 대하며 살라는 말입니다. 말씀은 따라야 하는 것이지 자의적으로 판단하고, 취사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 불편함 속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비로소 영적인 자유의 광장에 서게 됩니다. ‘용서하라’, ‘섬기라’, ‘돌보라’…이런 요구는 우리를 불편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자아의 감옥으로부터 해방하시려는 하나님의 배려인 것입니다.

● 좋은 것을 굳게 잡으라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모든 것을 분간하고, 좋은 것을 굳게 잡으라”. “갖가지 모양의 악을 멀리 하라”. 살다보면 선의만 가지고 살기에 세상이 너무 험한 것 같아 낙심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적당한 선에서 우리의 선의를 철회하고픈 유혹을 받곤 합니다. 미운 놈 미워하는 게 인간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좋은 것을 굳게 잡으라’는 말씀 앞에 서 있습니다. 천성산하면 떠오르는 분이 있지요? 지율 스님입니다. 그분이 도룡농으로 상징되는 생명의 세상을 지키기 위해 단식을 하며 천성산을 지키고 있을 때, 마산 YMCA 어린이들이 천성산 터널 공사 현장을 방문하였습니다. 아이들은 내원계곡에서 도롱뇽 유생을 관찰하고 그곳에 갔던 것입니다. 지금 도룡농의 집이 무너지고 있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묻자 한 아이가 포크레인에 침을 뱉자고 말했습니다. 지율 스님은 그래선 안 된다고 말하고는, 차라리 포크레인에게 편지를 쓰고 노래를 불러 주면 어떨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포크레인을 빙 둘러서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여름엔 여름엔 파랄 거예요
산도 들도 나무도 파란 잎으로
파랗게 파랗게 덮인 속에서
파아란 하늘 보고 자라니까요

그 노래를 들으며 지율은 이 아이들이 저만 알던 거인 아저씨네 무너진 담 벽으로 숨어 들어와 봄을 불러온 바로 그 아이들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답니다. 침을 뱉고 발길질을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마주 선 절벽과도 같은 현실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약한 노래가 세상을 바꿉니다. 그 노래가 지금 우리의 귀에까지 들려오고 있으니 말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좋은 것을 굳게 잡은 분입니다. 갖가지 모양의 악을 멀리한 분입니다. 우리의 말과 행위는 무력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실을 품고 있다면 그것은 무력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Abraham Joshua Heschel)은 말합니다.

부조리함을 뛰어넘는 의미가 있음을 기억하라. 어떤 작은 몸짓이라도 의미가 있고, 모든 말에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모든 부조리와 좌절과 실망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여전히 세상을 구속하기 위해 부여된 당신의 몫을 감당할 수 있음을 결코 잊지 말라.
Remember that there is a meaning beyond absurdity. Be sure that every little deed counts, that every word has power. Never forget that you can still do your share to redeem the world in spite of all absurdities and frustrations and disappointments.

● 기도의 지원
하지만 우리는 약합니다. 자꾸 현실의 벽 앞에서 흔들립니다. 그렇기에 은총이 필요합니다.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그들을 거룩하게 하시고,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그들의 영과 혼과 몸이 흠 없게 보존되기를 기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다가 힘에 부쳐 비틀거릴 때마다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군가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곳곳에 숨겨놓으신 길벗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우리가 겪는 고통을 통해 영혼을 단련하고, 깨끗이 닦는 도구로 삼으십니다.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부름에 언제든 ‘예’라고 대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혼이 올바른 판단을 하고,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창조적으로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몸이 과도한 욕망의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일을 수행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우리 곁에 오시는 주님을 영접하기 위해 마음을 열 때 우리 삶은 맑아지고 깊어질 것입니다. 주님과 더불어 걷는 인생길은 축제입니다. 어느 곳에 머물든지 사람들의 가슴 속에 기쁨을 나르는 복된 사람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5년 12월 18일 13시 27분 2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