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0. 정신을 가다듬고
설교자 김기석
본문 벧전4:1-3, 7-11
설교일시 2006/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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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가다듬고
벧전4:1-3, 7-11
(2006/3/5)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으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여러분도 같은 마음으로 무장하십시오. 육신으로 고난을 받은 사람은 이미 죄와 인연을 끊은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육신으로 살아갈 남은 때를 인간의 욕정대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난날에 이방 사람들이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하였으니, 곧 방탕과 정욕과 술 취함과 환락과 연회와 가증스러운 우상숭배에 빠져 살아 왔습니다. 그것은 지나간 때로 충분합니다. …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삼가 조심하여 기도하십시오.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 줍니다. 불평 없이 서로 따뜻하게 대접하십시오. 각 사람은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관리인으로서 서로 봉사하십시오. 말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사람답게 하고, 봉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봉사하는 사람답게 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이 모든 일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습니다. 아멘.]

• 믿음과 진실을 지킨다는 것
근 30년쯤 전, 신학교 첫학기의 <철학> 시간은 제게 두 가지 선물을 주었습니다. 첫째는 한자 공부입니다. 최명관 선생님이 쓰신 <<철학개론>>이 교재였는데 그게 참 우리를 난감하게 만들었습니다. 순수 한글 단어나 토씨를 빼고는 전부 다 한자로 표기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게을리하면 계속 난감한 상황을 만날 것 같아서 저는 하루에 200단어 이상의 한자를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외우고 잊어버리기를 반복했지만 그래도 그게 몇 달 계속되니까 제법 한자를 읽을 만하게 되었습니다. 그게 바탕이 되어서 나중에 동양 고전을 읽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둘째는 과학적 진리와 신앙적 진리의 차이에 대한 인식이었습니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고 주장했다가 교황청의 종교재판에 회부되었던 갈릴레이 갈릴레오는 자기의 주장을 철회하고 재판소 문을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했다지요? 과학적 진리는 인식의 문제이기에 때가 되면 밝혀지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신앙적 진리를 위해서는 목숨을 걸 수 밖에 없습니다. 지오르다노 브루노(Bruno, Giordano, 1548-1600)는 그의 주장이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과 위배된다고 철회를 요구받았을 때 그것을 거절하고 화형을 당하는 쪽을 택하였습니다. 자기 믿음과 진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브루노의 태도는 제게 상당히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믿음과 진실을 지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 다수가 믿고 따르는 것에 순응하기를 거절할 때 우리는 곤란한 일을 만납니다. 큰 물이 흐르는 강에서 갈대 하나가 빠른 속도로 물살을 거슬러 오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갈대가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것이 아니라 땅에 뿌리를 박은 채 떠내려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것이었습니다. 거룩함이 사라진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며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최선을 다해서 저항하지 않고는 물살에 떠밀려가게 마련입니다. 초기 기독교의 신자들은 복음적 가치를 살아내기 위해 어떤 고난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모욕당하고 매맞고 갇히고 쫓겨나고……. 그래서 사도들은 성도들에게는 주님의 영광도 약속되어 있지만 고난도 겸하여 받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베드로는 그 고난의 의미를 이렇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으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여러분도 같은 마음으로 무장하십시오. 육신으로 고난을 받은 사람은 이미 죄와 인연을 끊은 것입니다.(4:1)

진리를 따라 살기 위해 육신으로 고난을 받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와의 인연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죄의 맛이 끊어진다는 말입니다. ‘말짱 도루묵’이라는 말을 아시지요? 피난살이에 지친 선조 임금이 어느 날 어부가 바친 ‘묵’이라는 생선을 먹고는 감격을 했답니다. 그래서 ‘은어’라는 제법 격식이 있는 이름을 내렸는데, 나중에 전란이 끝나고 궁궐로 돌아가서 피난길에서 먹었던 그 생선을 내오라 해서 먹었더니 맛이 없더랍니다. 그래서 ‘도로 묵이라고 하여라’ 해서 ‘도루묵’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처지에 따라서 입맛도 달라지는 것이지요. 어쩌면 우리가 세상에서 즐기는 것들은 ‘은어’라는 이름을 가진 ‘도루묵’인지도 모릅니다. 베드로는 “방탕과 정욕과 술 취함과 환락과 연회와 가증스러운 우상숭배에 빠져” 사는 것은 삶은 ‘지나간 때로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아직은 충분히 맛보지 못했기에 나는 좀 더 즐겨야겠다고 생각하는 분도 혹시 계실지 모르겟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잡다한 즐거움에 이별을 고하면 그것들은 우리 옷자락을 붙잡으며 ‘우리를 두고 가려는가’ 하고 애처로운 눈빛을 보냅니다. 하지만 청산할 것을 빨리 청산해야 우리 삶이 가벼워집니다. 끊어버리는 아픔 없이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 하루를 영원처럼
베드로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고 말합니다. 어찌 보면 너무 위협적인 말처럼 들립니다. 아직도 살아가야 할 날이 창창한데 꼭 그렇게 비장하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살 날을 누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가끔 청년들이 한 여름에도 ‘미리 크리스마스’ 하고 인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분들이 죽음을 미리 경험해보는 모임을 가졌습니다. 유언을 작성하고 수의를 입고 관에 눕습니다. 관 뚜껑이 위에서 덮이고 망치질 소리가 들려올 때 관 속의 사람들은 마음의 큰 충격을 받는다고 합니다. 어떤 이들은 흐느껴 운다더군요. 그렇지요, 우리가 이렇게 뻔뻔하게, 제멋대로, 거칠게,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살 날이 앞으로도 많이 남았다는 생각 때문일 겁니다. 성도는 하루를 영원처럼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삼가 조심하여 기도하십시오.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 줍니다. 불평 없이 서로 따뜻하게 대접하십시오. 각 사람은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관리인으로서 서로 봉사하십시오.(4:7-10)

‘정신을 차리라’는 말이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우리는 뭔가에 취한 듯 몽롱한 상태에서 살고 있습니다. 가슴은 뭔가가 얹혀 있는 것처럼 늘 답답하고 머리는 무겁습니다. 문제가 있는 것은 아는데, 그 문제가 뭔지는 잘 모릅니다. 매사가 뒤죽박죽입니다. 우리가 마음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국회의원 모씨가 동아일보 여기자를 성추행한 사건 때문에 세상이 소란합니다. 그는 자기 잘못을 변명하기를 음식점 주인인 줄 알았다고 말했습니다. 쓴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음식점 주인은 그래도 되나요? 철도 파업으로 온 나라가 야단인 때 국무총리는 골프를 즐기셨답니다. 오래 전에 한 약속이었다나요. 우리는 여기서 ‘아, 우리 국무총리는 약속 하나는 끝내주게 잘 지키는 멋진 사나이구나’ 하면서 박수를 보내야 하나요? 정신들이 나갔습니다. 얼이 빠졌습니다. 뭔가에 취해 있습니다. 우리라도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려는 열망입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자기를 돌아보는 시간을 마련하지 않는 한 우리는 몽롱함에서 깨어날 수 없습니다. 이번 성지 순례 여정 중에 저는 터키의 이스탄불의 어느 호텔에서 첫째 날 밤을 맞이하였습니다. 메모지를 찾느라고 서랍을 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다른 것은 하나도 없고 비스듬한 화살표 표시 하나가 보였습니다. 그 밑에는 “Direction of Mecca Kiblah”, 즉 ‘메카 방향’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하루 다섯 번씩 메카를 향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무슬림들을 위해 메카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일상의 흐름을 끊고 기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없습니다.

• 환대의 공간 만들기
그리고 사도는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뜨겁게 사랑하라”고 권합니다.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사랑은 감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왠지 끌려서 잘 해주는 사랑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무슨 소용입니까? 그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리 합니다. 우리는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까지 사랑할 것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감정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도가 그런 사랑을 요구하는 것은 우리를 골탕먹이려는 것은 아닐 겁니다. 사랑은 받는 사람에게도 기쁨이지만, 하는 사람에게는 더 큰 기쁨입니다.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는 사람은 도덕적 우월감을 맛볼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소태가 자라고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기적이고 편협한 사랑의 범위를 의지적으로 넓힐 때 우리는 영적인 자유와 더불어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그 기쁨은 하늘의 선물입니다. 사랑의 실천은 우리 삶의 불꽃과 같아서 우리가 어둠 가운데서 헤매지 않게 해줍니다.

사도는 또 “불평없이 서로 따뜻하게 대접하라”고 말합니다.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서 북동쪽으로 40킬로쯤 떨어진 곳에는 마룰라(Maalula)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지금은 死語가 된 예수님 당시의 아람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우리는 그곳에 있는 성 세르기우스 수도원을 방문하여 아람어로 드리는 주기도문을 들었습니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것은 참 경건한 어조의 언어였습니다. 잠시 수도원 주위를 둘러보다가 저는 수도원 앞에 주차된 알록달록한 버스 앞에서 사진을 한 장 찍었습니다. 그 때 차창이 열리더니 운전석에 있던 사내가 뭔가를 내게 내밀었습니다. 그것은 맛있게 우려낸 ‘차’였습니다. 고맙다며 받아들었더니 ‘이것은 시리아식 환대’라면서 곱게 웃었습니다. 낯선 사람을 잘 대접하는 그 마음이 참 흐뭇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대접하였습니다”(히13:2). 교회는 환대의 공간이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냉대를 받는 사람들도 이곳에 오면 마음이 편해지는 곳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믿음을 지킨 사람들 위에 장막을 쳐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믿는 사람들은 서럽고 쓰린 마음으로 살고 있는 이들에게 장막을 쳐주어야 합니다.

• 믿는 이들의 시선은 곡선
그런데 믿음 안에서 일을 할 때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봉사하다가 낙심하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자기의 영적인 역량을 벗어날 정도로 일하는 것도 덕스럽지 못합니다. 예수님도 사람들에게서 벗어나 한적한 곳을 찾으셨습니다. 착한 사람들일수록 낙심하기 쉽습니다. 때로는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일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말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사람답게 하고, 봉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봉사하는 사람답게 하십시오.(4:11)

성도는 어떤 일을 하든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하는 사람입니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하나님의 손발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그의 시선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입니다. 누구를 대하든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를 대합니다. 그러니 아무도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생전 다시 볼 일이 없을 것 같은 사람이라 해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귀한 존재로 대해야 합니다. 이 마음 하나 얻지 못한다면 우리의 믿는 보람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사순절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정신을 가다듬어야 합니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버려야 할 것은 버리고, 잡아야 할 것은 굳게 잡아야 합니다. 이전보다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봉사의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입니다. 또한 우리 자신의 삶을 바로 세우는 길입니다. 사순절 순례의 여정을 통해 우리의 몸과 마음이 거듭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6년 03월 05일 12시 15분 08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