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1. 그 명을 땅에 보내시니
설교자 김기석
본문 시 147:7-20
설교일시 2006/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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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명을 땅에 보내시니
시147:7-20
(2006/3/12)

[주님께 감사의 노래를 불러드려라. 우리의 하나님께 수금을 타면서 노래 불러드려라. 주님은 하늘을 구름으로 덮으시고 땅에 내릴 비를 준비하시어 산에 풀이 돋게 하시며,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이를 주신다. 주님은 힘센 준마를 좋아하지 않으시고, 빨리 달리는 힘센 다리를 가진 사람도 반기지 아니하신다. 주님은 오직 당신을 경외하는 사람과 당신의 한결 같은 사랑을 기다리는 사람을 좋아하신다. 예루살렘아, 주님께 영광을 돌려라. 시온아, 네 하나님을 찬양하여라. 주님이 네 문빗장을 단단히 잠그시고, 그 안에 있는 네 자녀에게 복을 내리셨다. 네가 사는 땅에 평화를 주시고, 가장 좋은 밀로 만든 음식으로 너를 배불리신다. 주님이 이 땅에 명령만 내리시면, 그 말씀이 순식간에 퍼져 나간다. 양털 같은 눈을 내리시며, 재를 뿌리듯 서리도 내리시며, 빵 부스러기같이 우박을 쏟으시는데, 누가 감히 그 추위 앞에 버티어 설 수 있겠느냐? 그러나 주님은 말씀을 보내셔서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시니,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되어 흐른다. 주님은 말씀을 야곱에게 전하시고, 주님의 규례와 법도를 이스라엘에게 알려 주신다. 어느 다른 민족에게도 그와 같이 하신 일이 없으시니, 그들은 아무도 그 법도를 알지 못한다.]

• 봄 소식
기독교환경운동연대에서 만든 달력을 보면 3월은 ‘물오름달’입니다. 겨우내 숨죽인 채 겨우 연명만 하고 있던 식물들이 바야흐로 기지개를 켜며 깨어나는 달이라는 것이지요. 화재로 말미암아 잿더미로 변했던 동해의 낙산사 근처, 시커먼 그루터기 사이로 봄의 전령인 복수초(福壽草)가 눈 속에서 노랗게 피어났답니다. 화마가 할퀴고 간 자리에 피어난 복수초 꽃을 보며 생명의 장엄함에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남녘에서는 산수유 노란꽃이 이미 만발했답니다. 봄 기운이 바야흐로 대지를 깨우고 있습니다. 이맘 때쯤 산에 한번 올라보십시오. 눈석임물이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를 따라 생명이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지난 성지 순례 여정 가운데 들른 레바논의 베이루트에는 천둥을 동반한 비가 간헐적으로 내렸습니다. 세찬 비바람 때문에 순례 일정에 차질을 빚지나 않나 염려하며 차에 오르니 가이드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오늘은 참 복받은 날입니다.”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자 그 목사님은 비가 많지 않은 중동 지방에서는 비 오는 날이 복된 날이기에 사람들은 기쁘게 비를 맞고 다닌다고 했습니다. 신명기 기자는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신11:14)이라고 말합니다. 적당한 때에 내리는 ‘이른 비’와 ‘늦은 비’는 그들에게 여호와의 은총인 것입니다. 비가 뭐냐 물으면 물리학자는 “대기 중의 수증기가 높은 곳에서 찬 기운을 만나 엉겨 맺혀서 땅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대답은 비에 대한 사람들의 정서적 반응까지 다 표현한 것은 아닙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이들에게 비는 하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비가 오네’ 하지 않고 ‘비가 오시네’ 했습니다.

• 연한 몸들에 입맞추라
오늘 본문에서 시인은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은 하늘을 구름으로 덮으시고 땅에 내릴 비를 준비하시어 산에 풀이 돋게 하시고, 들짐승과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신다.”(8-9)

여기서 우리가 유의할 것이 있습니다. 자연 그 자체가 하나님은 아닙니다. 자연에 숨결을 불어넣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을 통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또한 말씀을 통해 세상을 유지해가십니다. 시인은 “주님이 이 땅에 명령만 내리시면, 그 말씀이 순식간에 퍼져 나간다”고 고백합니다. 말씀은 하나님과 세상을 이어주는 다리입니다. 시편 19편의 시인은 “낮은 낮에게 말씀을 전해 주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알려 준다. 그 이야기 그 말소리, 비록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그 소리 온 누리에 울려 퍼지고, 그 말씀 세상 끝까지 번져 간다”(2-4)고 노래했습니다. 때때로 서리가 내리고 우박이 쏟아지고 혹독한 추위가 찾아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때가 이르면 “주님은 말씀을 보내셔서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시니,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되어 흐르게” 하십니다. 봄은 바야흐로 주님의 은총이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때입니다.

그런데 春來不似春이라는 말처럼 봄이 되어도 봄의 환희와 생명을 노래할 수 없는 시간이 조만간 도래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자꾸만 듭니다. 불과 30-40년 전만 해도 우리는 금수강산을 자랑했습니다. 하지만 개발 열풍으로 지금 우리 산하는 잔인할 정도로 유린당했습니다. 일제가 우리의 명산 곳곳에 말뚝을 박아 기운을 억누르려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분노하는 사람들도, 지금 우리가 자행하는 이 무분별한 개발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피조물들의 신음소리는 날로 높아가고, 자연재해의 규모가 점점 커가고 있는 데도 우리는 돌이킬 줄을 모릅니다. 땅에 금을 긋고, 생명의 흐름을 차단하고, 수없는 무고한 생명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개발, 그것이 결국은 우리 생명을 해치는 일임을 왜 모르는 것입니까?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생명의 파괴자로 살고 있거나, 아니면 파괴의 방조자로 살고 있습니다. 미군 기지가 들어설 평택의 대추리에서 농성하고 있는 문정현 신부는 “평화란 저 황새울 들녘이 푸른 생명으로 출렁이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생명’이라고 고백하면서 우리는 ‘죽임’을 살고 있습니다. 이 죄를 어찌 해야 합니까? 우리 시대의 한 시인은 묵시록적인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시간이 봄이라고 규정한 계절에 나무들이 더 이상 잎 틔우지 않고 꽃들이 피지 않는다면? 앙상한 나뭇가지를 부딪치며 여전히 겨울나무 그대로인 채 지상의 나무들이 인간의 마을을 싸늘히 내려다본다면?”

그는 “봄이 와 가장 여린 속살을 내보이며 올해도 꽃이 피고 연둣빛 새잎들이 나풀거리기 시작한다면, 이것은 당연히 올 봄이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지 않을 수도 있었던 봄이 오는 것”이라면서 그 연하디 연한 몸들에 입 맞추고 감사해야 할 일이라고 말합니다.

• 주님이 좋아하시는 사람
히브리의 시인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가르쳐줍니다.

“주님은 힘센 준마를 좋아하지 않으시고, 빨리 달리는 힘센 다리를 가진 사람도 반기지 아니하신다.”(10)

힘센 준마는 전쟁을 연상시킵니다. 빨리 달리는 힘센 다리를 가진 사람도 역시 평화의 일꾼은 아닐 터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남보다 더 큰 힘을 갖기 원하고, 남보다 앞서 달리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세상은 전쟁터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살벌한 생각이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그러니 마음 편할 날이 없습니다. 소득이 높아갈수록 영혼은 빈곤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생명은 소명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일을 위해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소명을 잃은 채 세상의 논리에 밀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은 현대인을 가리켜 “메시지를 잃어버린 메신저”라고 말했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그런 우리의 모습을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내 마음 다 팔았고나!
다 팔아먹었고나!
아버지가 집에서 나올 때
채곡채곡 넣어주시며
잃지 말고 닦아 내어
님 보거든 드리라
일러주시던 그 마음
이 세상 길거리에서
다 팔아먹었고나!

쥐엄 나무 열매로 주린 배를 채우던 탕자는 문득 제 정신이 들었습니다. 자기가 서있는 자리가 어딘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영어 성경은 이 대목을 “He came to his senses"(JB), 혹은 "He came to himself"(NRSV)라고 옮겨놓고 있습니다.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를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 그것은 하나님 앞입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사람은 능력있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주님의 한결 같은 사랑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사람보다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동물 이야기>라는 책에 보면, 사랑하는 애완견의 죽음을 놓고 슬퍼하는 어른들에게 한 어린이가 ‘왜 동물은 사람보다 일찍 죽는가?’에 대한 해답을 이렇게 내놓고 있습니다.

“전 왜 동물의 수명이 인간보다 짧은지를 알아요. 모든 사람은 어떤 삶이 훌륭한 것인지를 배우러 태어나는 거예요. 상대방을 사랑하는 친절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요. 그런데 동물들은 이미 그 방법을 알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오래 머무를 필요가 없는 거예요.”

설마 이 아이의 이야기를 논리적인 정합성이 있는지를 따져 물으실 분은 없으시겠지요?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가진 어떤 존재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 무례한 말과 행동으로 내상을 입히지 않는 것, 다른 이의 살 권리를 존중하고 남의 몫을 가로채지 않는 것…. 이 마음으로 산다면 우리는 많은 것을 소유하지 않아도 이미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삶에서 거치장스러운 과잉을 덜어낼 때 잃어버렸던 우리의 참 모습이 밝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라야 우리는 이웃들과 사심없이 교류하고 함께 웃고, 좋은 것을 나누는 행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 영원한 캣쳐
믿음은 온전한 내맡김입니다. 헨리 뉴엔 신부는 서커스에서 공중 그네를 타는 로드레이 가족과 깊은 친분을 맺었습니다. 헨리는 그 가족을 통해 공중그네를 타는 이들이 꼭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나는 사람’은 절대 ‘잡는 사람’의 손을 잡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완전히 믿고 기다려야만 합니다.” 영적으로 비상하고 싶었던 헨리는 그 말을 통해 깊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영혼의 비상이란 영원한 캣쳐(eternal catcher)와의 관계 속에서 그 사랑의 손에 더욱 자신을 내어 맡김으로만 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영원한 캐쳐는 물론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가 삶으로 주님의 영광을 구하고, 온 힘을 다해 주님을 찬양하면, 평안과 기쁨이 우리 삶에 깃들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부족하나마 저를 통해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말을 건네고 계십니다. 추위로 꽁꽁 얼어붙은 세상에 말씀을 보내셔서 녹이시는 하나님이 살아계십니다.․ 봄을 뜻하는 영어 단어 ‘spring’에는 ‘도약’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생명이 솟구쳐 일어서는 것을 연상하면 되겠습니다. 동시에 그 단어에는 ‘샘, 원천’의 뜻도 있습니다. 봄은 생명의 원천이신 주님께로 돌아서는 계절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에 온전히 귀의할 때 우리는 ‘봄의 사람’이 됩니다. 사람들과 피조 세계에 생명의 꿈을 가져가는 사람말입니다. 결국엔 마음에 허망함만을 안겨주는 것들에 집착하지 말고, 우리 영혼을 자유로 이끄시는 주님의 뜻을 온 힘을 다해 받드십시오. 영원한 캣쳐이신 주님이 우리를 잡아주실 것입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6년 03월 12일 12시 08분 3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