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2. 패거리주의를 넘어
설교자 김기석
본문 막9:33-41
설교일시 2006/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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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거리주의를 넘어
막9:33-41
(2006/3/19)

[그들은 가버나움으로 갔다. 예수께서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너희가 길에서 무슨 일로 다투었느냐?" 제자들은 잠잠하였다. 그들은 길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것으로 서로 다투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앉으신 뒤에, 열두 제자를 불러 놓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 그리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신 뒤에, 그를 껴안으시고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보다,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요한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우리는 그가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막지 말아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나서 쉬이 나를 욕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해서, 그 이름으로 너희에게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 철부지를 타이르듯
당신의 죽음을 제자들에게 예고하신 예수님은 시방 예루살렘을 향한 길 위에 있습니다. 헤르몬 산 아래에 있는 가이사랴 빌립보를 떠나 갈릴리 마을로 내려와, 갈릴리 선교의 전진 기지로 삼고 있던 어느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고요히 앉아 계시던 예수님이 제자들을 찬찬히 둘러보시며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길에서 무슨 일로 다투었느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예수님이 메시야 왕으로 우뚝 설 때 누가 높은 자리에 앉게 될 것인지를 놓고 언쟁을 벌였던 것입니다. 이미 두 차례나 당신의 예루살렘행이 영광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수난 당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그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기에 받아들이지 않는 겁니다. 영광에 정조준된 마음은 수난의 현실을 현실로 보지 못합니다. 누가 큰가를 놓고 따지고 있는 제자들은 마치 부모의 장례를 치르기도 전에 재산 다툼을 하는 철부지 형제들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철부지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그들을 타이르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 이것은 주님의 핵심적인 가르침입니다. 주님의 삶은 바로 이 말씀의 성육신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왜 이렇게도 중요한 가르침을 대중들을 향해 말하지 않고 가까운 제자들에게만 말씀하셨을까요? 주님은 세상의 변화는 내면 속에 뚜렷한 비전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을 통해 일어나는 것임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토인비는 그들을 가리켜 “창조적 소수”(creative minority)라고 말했습니다. 속에 꿈을 간직한 사람들이 변화를 두려워하는 견고한 현실의 벽 한 켠을 허물기 시작할 때 변화는 시작됩니다. 틈을 만드는 사람들, 틈을 만들어 현실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는 사람들, 그들은 늘 소수입니다. 주님은 그런 일을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 서열 의식을 버리라
예수 정신의 핵심은 모든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대하든 그를 섬김의 대상으로 본다면, 그것도 굴욕감이나 모멸감을 느끼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그럴 수 있다면 우리 삶은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의 주변도 변화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남보다 앞서기를 바랍니다. 목사님들이 젊은이들을 위해 기도를 해도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이런 기도는 ‘꼬리’로 살아가는 사람은 인생의 ‘실패자’이고 ‘머리’로 살아가는 사람은 인생의 ‘성공자’라는 가치평가가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런 구분을 하지 않으십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느냐이고,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몫을 충실히 살아가느냐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처럼 序列을 따지는 나라도 드물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만나서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서열관계를 확인하는 일입니다. 나이, 학번, 직급…요즘 백수건달 역할로 인기를 끌고 있는 개그맨이 있습니다. 그는 자기와 통화하고 있는 상대방이 자기보다 나이 어린 사람인 것을 확인하는 순간부터 말을 놓습니다. 그리고 아주 억지스러운 주장을 하다가 마침내 “대한민국에 안 되는 게 어딨니?” 하며 카메라를 응시합니다. 코메디는 현실의 재현(representation)은 아니지만 현실의 반영(reflection)입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그를 보면서 배꼽을 잡고 웃지만, 가슴 한 켠에 씁쓸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회의 여론 주도층(지도층이라는 말은 매우 듣기에 거북하다. 누가 누구를 지도한단 말인가)들의 행태를 보며 깊은 실망감을 느낍니다. 선거 때가 되면 그들은 국민의 公僕을 자처하고 몸을 낮추지만, 일단 원하는 자리에 앉게 되면 다른 사람이 됩니다. 국민을 깔보는 겁니다. 그들은 말로 행동으로 우리를 모욕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공직 사회가 정화되려면 ‘폭탄주 문화’라는 것이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자리에 참가한 사람의 취향이나 주량과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폭탄주는 폭력입니다. 그것은 사람들 사이를 끈끈하게 만드는 촉매가 아니라, 사람들의 서열관계를 마음 속에 각인시키는 도구일 뿐입니다. 그 술자리에 개인의 존엄은 없습니다. 조직에 대한 충성이 있을 뿐입니다. 이런 패거리주의에서는 자유로운 생각도, 새로운 삶을 향한 일탈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일사불란이란 말은 때로는 반문화적인 상황을 지칭합니다. 저는 폭탄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파악해서 낙천 낙선 운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민주사회의 공직자로서 부적당한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정말로 큰 사람은 뭇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섬기면서도 비굴해지지 않고, 모멸감을 느끼기보다는 기쁨을 느끼는 사람, 그가 큰 사람입니다.

• 작은 자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
예수님은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신 뒤에, 그를 껴안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보다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37)

여기서 어린이는 나이가 어리다는 사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이는 당시의 상황에서 볼 때 작은 자, 낮은 자, 종으로서 삶의 변두리로 밀려난 존재(marginal man)였습니다. 주님은 그런 이들을 마음을 다해 돌보는 것을 당신을 영접하는 행위로 여긴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은 이것을 선명하게 드러냈습니다.

“누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요일4:20)

지금 미국은 이민법을 개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1,200만 명에 이르는 소위 밀입국자들을 규제하기 위한 것입니다. 내세우는 명분은 멕시코나 다른 중남미 국가로부터 유입되는 밀입국자들이 미국의 안보에 위협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법안이 통과되는 순간 미국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 험하고 더러운 일을 해내는 사람들이 범죄자로 내몰리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없다면 미국 경제는 지탱하기 어려울 겁니다. 미국의 의도는 그런 이들을 일단 범법자로 만든 후에 아주 열악한 고용조건으로 그들을 재고용하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도덕적인 배려도 없습니다. 그런데 Los Angeles 교구의 Roger Mahony 추기경은 자기 교구민들에게 시민 불복종 운동을 전개할 것을 당부하면서 이렇게 권고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가운데 있는 낯선 이들이 설 땅을 마련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이들에게 영적인 그리고 목회적인 돌봄을 제공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이 마음이 있어야 우리는 그리스도의 벗이 될 수 있습니다. 사회적인 약자를 배려하고, 그들의 살 권리를 지켜주기 위해 땀 흘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딸이라 불리게 될 것입니다.

• 편협한 신앙을 꾸짖으심
본문은 새로운 상황으로 전개됩니다. 서열 논쟁의 한 가운데 서있던 요한이 주님께 새로운 논란거리를 내놓습니다.

“선생님,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우리는 그가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38)

귀신을 내쫓는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고대세계에서는 오늘의 정신 의학으로 충분히 치료할 수 있는 일까지도 귀신들림으로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좀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상 증세를 보인다고 해서 덮어놓고 축귀의식을 거행하다가 오히려 사람을 망가뜨리는 일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여하튼 귀신이 들렸다는 것은 그가 전인적인 존재로 살아갈 수 없는 상태에 있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사역 가운데 귀신을 내쫓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금이 가고, 조각난 삶을 회복시켜 통전적인 존재로 살도록 하는 것은 주님의 일이었고, 또한 우리에게도 위임된 일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있는 데, 우리와 함께 다니는 사람이 아니어서 못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요한을 가볍게 나무라시며 그의 활동을 금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조각난 삶이 회복되는 것이지, 그 일을 누가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중요한 것은 ‘생명의 회복’입니다. 요한과 제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런 행위의 주체가 누구냐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이상한 특권의식이 있습니다. 나는 80년대 중반 이후부터 급속하게 등장하기 시작한 시민운동이 일종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민운동가들은 경제발전과 생산성, 효율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정부나 기업이 외면하고 있는 일들을 기꺼이 감당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교회가 마땅히 감당해야 하는 일들을 그들이 대신 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이 하는 일을 귀히 여기고, 고맙게 여겨야 합니다. 교회에 속한 이들이 아니라고 해서 그들의 실천을 폄하하거나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패거리 의식에 사로잡힌 편협한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욕되게 합니다.

과거에 기독교는 계몽의 주체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계몽의 대상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제 다시 한번 그리스도께서 지향했던 삶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생명의 온전함을 위해 주님은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주님께 중요한 것은 당신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었고 사람들의 구원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사람이라 해도 그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면 그를 인정하고, 그에게서 배우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먼저 섬기려는 마음이 있는 곳에, 그리고 기꺼이 배우려는 마음이 있는 곳에 평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를 위해 부름받은 여러분, 주님은 지금 아픔과 눈물이 있는 현장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힘겹지만 그 현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길 때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우리 모두 생명을 살리고 평화를 일구는 그리스도의 선한 일군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6년 03월 19일 12시 13분 1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