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4. 호모 심비우스
설교자 김기석
본문 창6:17-22
설교일시 2006/04/02
오디오파일 s060402.mp3 [7207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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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심비우스
창6:17-22
(2006/4/2)

[“내가 이제 땅 위에 홍수를 일으켜서, 하늘 아래에서 살아 숨쉬는 살과 피를 지닌 모든 것을 쓸어 없앨 터이니, 땅에 있는 것들은 모두 죽을 것이다. 그러나 너하고는, 내가 직접 언약을 세우겠다. 너는 아들들과 아내와 며느리들을 모두 데리고 방주로 들어가거라. 살과 피를 지닌 모든 짐승도 수컷과 암컷으로 한 쌍씩 방주로 데리고 들어가서, 너와 함께 살아 남게 하여라. 새도 그 종류대로, 집짐승도 그 종류대로, 땅에 기어다니는 온갖 길짐승도 그 종류대로, 모두 두 마리씩 너에게로 올 터이니, 살아 남게 하여라. 그리고 너는 먹을 수 있는 모든 먹거리를 가져다가 쌓아 두어라. 이것은, 너와 함께 있는 사람들과 짐승들의 먹거리가 될 것이다.” 노아는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다 하였다. 꼭 그대로 하였다.]

• 협동 공동체
하나님은 당신이 심혈을 기울여 만드신 아담의 울적한 표정을 보고 좀 근심이 되셨습니다. 모든 것이 조화로운 세상에 살면서도 아담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지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아담에게 그를 돕는 알맞은 짝을 만들어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후에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그곳을 살로 채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아담은 자기 앞에 있는 낯선 존재를 바라봅니다. 눈을 깜박이며 낯설지만 왠지 낯설지 않은 존재를 바라보던 아담이 돌연 시인이 됩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창2:23)

저는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성서 기자의 놀라운 상상력에 미소를 짓곤 합니다. 그리고 누가 믿건 말건 인간이 만든 최초의 문장이 뜨거운 ‘사랑 고백’이라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만드신 각종 짐승들을 아담에게 이끌어 오시면 아담은 그 동물들에게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이름을 붙인다(naming)는 것은 참 중요한 문화적 행위입니다. 새로운 별들을 발견한 사람은 그 별에 이름을 붙이는 권한을 부여받습니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그 대상과 어떤 형태로든 깊은 관계를 맺는다는 뜻입니다. 아이가 자라 처음으로 ‘엄마’라고 발음할 때 엄마는 큰 감동을 맛봅니다. 그러한 호명행위는 아이에게 엄마가 특별한 사람으로 인식되었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질투심 많은 아빠들은 아이에게 조기교육을 시키려 합니다. “‘아빠’, 해봐”. 사람은 호명행위를 통해 세상을 자기 세계 속에 통합시킵니다. 아담이 동물들에게 붙여주는 이름은 단어일 뿐, 문장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와가 그의 앞에 나타나는 순간 그는 시인으로 진화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하와를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한 그 참 뜻은 무엇일까요? 인간이란 서로에게 귀속되어 있음을 느끼는 존재라는 말로 이해합니다. 사람이 사람다울 때는 언제입니까?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관심을 가지고, 감정을 함께 나눌 때입니다. 그의 절실한 요구에 응답하는 때입니다. 예수님은 사랑해야 할 ‘이웃이 누구냐?’는 바리새인의 질문을 수정하십니다.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어떻게 해야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의 이웃이 되어줄까?’라는 것입니다. 하와는 아담의 사랑 고백을 듣고 살아있음의 기쁨을 느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공동체 속으로 부르셨습니다. ‘인간’이란 말은 ‘사람과 사람 사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공동체에 속한 사람입니다. 인간 공동체에 꼭 필요한 것은 구성원들 각자가 서로에게 ‘너와 함께 있어 기쁘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입니다. 바로 이게 ‘살 맛’ 아니겠습니까? 아담의 고백은 하와에게 살아있음의 보람을 느끼게 해줍니다.

• 똑똑한 인간의 끔찍한 어리석음
그런데 죄가 세상에 들어오면서 이 조화롭던 공동체는 깨지고 말았습니다. 사랑의 언어는 책임 전가의 언어로 바뀌었습니다. 에덴 동산 바깥으로 내쫓긴 아담과 하와는 이마에 땀을 흘리며 밭을 갈아야 먹고 살 수 있었고, 하와는 출산의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그래도 서로 의지하며 공동체를 유지해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에덴 이후의 첫 사람 가인은 형제 살해자가 되었습니다.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물음에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한 가인의 말은 아름다운 살림 공동체의 파괴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성경은 가인이 도시를 만드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것이 사람들이 모둠살이를 시작했다는 말임을 모르지 않지만, 가인이 도시 건설자라는 말이 우리에게 암시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도시란 경쟁이 지배하는 곳입니다. 제한된 재화를 서로 많이 차지하기 위해 사람들은 서로에게 늑대가 되어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잘 살기 위해서라고 말하면서 자연 조건을 자기의 편리를 위해 고치고, 다른 사람들을 이용합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만나는 이웃들이 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인 것을 잊고 살아갑니다. 똑똑해지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 똑똑함이 하나님의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수원에 있는 권선 고등학교 미술 선생님인 임종길씨는 우리에게 소나무 숲 한 가운데서 자라고 있는 커다란 참나무 한 그루가 어치(산까치)가 심은 것인 줄 아냐고 우리에게 묻습니다. 겨울에 먹으려고 나뭇잎 밑에 숨겨두었던 도토리를 똑똑치 못한 어치는 다 찾아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잊혀진 도토리가 녹색 잎으로 싹을 틔워 나무가 된다는 것이지요. 그는 똑똑한 인간의 무지를 이렇게 드러냅니다.

우리 세상 각박하다해도
그래도 살만한 것이
똑똑하지 못한
더 많은 사람들 때문이라고
꿈에라도 생각하겠습니까.

서로 경쟁하다 보니 이웃은 하나님께서 함께 도우며 살라고 주신 소중한 선물이 아니라, 잠재적인 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도시는 보이지 않는 전선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늘 긴장할 수밖에 없고, 성공에 대한 선망 때문에 우리는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때로는 우울증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 방주: 작지만 온전한 세계
성경의 가르침을 조금만 더 따라가 볼까요? 가인의 후예들은 점점 더 본래의 모습에서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사랑의 공동체는 사라지고 힘이 정의가 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돈 많고 권세 있는 사람들은 약한 자들을 괴롭히고 함부로 대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저마다 자기들의 마음에 드는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창6:2)는 말은 권세있는 자들의 횡포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임을 보시고서,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그래서 홍수를 보내셔서 세상에 살아 숨쉬는 것들의 생명을 거두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지만 씨앗은 남겨두셔야 했기에 노아와 그의 가족들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명하시고는 그의 가족은 물론이고 세상에 혈육이 있는 모든 생물 암수 한 쌍씩을 방주에 데리고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 어느 것도 쓸모 없다 하여 배제되지 않습니다. 방주는 그렇기에 ‘작은 세계’입니다. 하지만 그곳은 온전한 세계입니다. 방주는 약한 것과 강한 것이 공존하는 곳, 작은 것과 큰 것이 공존하는 곳, 추한 것과 아름다운 것이 공존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남겨놓으신 세계의 뿌리에 놓인 것은 바로 공존의 원리입니다.

세상에는 참 다양한 생명들이 살고 있습니다. 생명의 근본 원리는 공생입니다. 지렁이는 미물이지만 흙을 비옥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도와줍니다. 땅은 각종 식물을 냄으로써 우리에게 먹을거리를 제공하고, 산소를 공급해줍니다. 미생물들은 땅 위에서 죽어간 온갖 동물과 식물을 분해하여 흙에 양분을 공급합니다. 하늘은 하늘을 먹고 산다(以天食天)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 낟알 하나까지도 다 하늘로부터 오는 선물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온갖 피조물들을 통해 창조를 계속해나가고 계십니다(creatio continua). 그러니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하나님의 질서를 훼손하는 행위입니다. 생물학자들은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라고 말합니다. 자기 번식을 목표로 하는 유전자는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자기의 이기심을 극복하고 다른 이들과 공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라는 말입니다. 사람의 사람됨은 욕망을 절제하면서 다른 이를 위해 무엇이든 남겨두려 할 때 발현됩니다.

•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
그런데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가장 값진 선물은 연약한 이들 속에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헨리 나웬 신부는 ‘라르슈 공동체’에서 중증 장애인들을 돌보면서 이전에는 결코 알 수 없었던 아름다움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의 일상은 옷입히기, 목욕시키기, 밥먹이기, 집안청소, 장보기, 식사준비, 잠자리 준비하기 등등이었습니다. 때로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초조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일을 통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효용이나 빠름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배려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누군가의 몸에 손을 대고, 그를 돌보기 위해 시간을 바치면서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약자들의 몸 속에 인간이 찾아낼 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을 숨겨놓으셨던 것입니다.

후배 목사 한 분은 장모님을 모시고 삽니다. 그러다보니 홀로 계신 어머니를 모시고 살기 어려운 형편입니다. 어찌할까 궁리하다가 한 가지 방법을 찾게 되었습니다. 부모 없이 어렵게 살고 있는 청년을 막내 동생으로 맞아들인 것입니다. 초등학교를 나오고는 돈벌이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그 외로운 청년은 늙기는 했지만 어머니라 부를 수 있는 분을 만나게 된 것이지요. 어머니는 말 벗이 생겨 좋고, 그는 어머니와 오빠의 도움으로 소원이었던 공부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치 앞 못 보는 사람과 걷지 못하는 사람이 서로의 눈과 발이 되어주었다는 옛 이야기처럼 그들은 서로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것입니다. 사람은 누군가를 돌보고 있을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그 대상이 사람일 수도 있고, 동물이나 식물일 수도 있습니다. 방주 안에 숨쉬는 모든 생물들을 암수 한 쌍씩 이끌어 생명을 보존케 하라시는 주님의 명령은 오늘 우리에게도 주어진 명령입니다. 헨리 뉴엔 신부는 자신에게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나는 오늘 평안을 베풀었는가? 누군가의 얼굴에 미소가 찾아들게 했는가? 치유의 말을 했는가? 분노와 원망을 버렸는가? 용서했는가? 사랑했는가? 이것이 정말 중요한 질문들이다. 내가 지금 뿌리는 한 조각 사랑이 여기 이 세상에서와 오는 내생에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는 것을 나는 믿어야 한다.”(<<안식의 여정>>, 101쪽)

공생은 거룩합니다. 오늘 우리 생의 보람은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설 땅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깃들도록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아 이런 삶의 목표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살게 하시려 당신의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그런데 생명을 바치심으로 오히려 영원한 생명을 얻으셨습니다. 주님이 앞서 걸으신 이 길을 걷는 사람들, 공생의 삶을 택하는 사람들, 호모 심비우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새로운 이름입니다. 이 이름에 부끄러움이 없는 생을 택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6년 04월 02일 12시 10분 14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