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5. 가시는 길을 따라 나서다
설교자 김기석
본문 막10:46-52
설교일시 2006/04/09
오디오파일 s060409.mp3 [5035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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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는 길을 따라 나서다
막10:46-52
(2006/4/9, 종려주일)

[그들은 여리고에 갔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큰 무리와 함께 여리고를 떠나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나사렛 사람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외치며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조용히 하라고 그를 꾸짖었으나, 그는 더욱더 큰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눈먼 사람을 부르며 말하기를 "용기를 내어 일어나시오. 예수께서 당신을 부르시오" 하였다. 그는 자기의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서 예수께로 왔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느냐?" 하시니, 그 눈먼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러자 그 눈먼 사람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가 가시는 길을 따라 나섰다.]

• 길은 삶의 은유
길은 삶의 은유로 자주 사용되고 있습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우리는 어딘가를 향하여 나아갑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갈 때도 있고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갈 때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누구도 어제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시간의 불가역성’이라고 하지요. 제 아무리 어제의 기억이 아름답다 해도 우리는 오늘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거꾸로도 말할 수 있습니다. 어제의 기억이 아무리 참담하다 해도 오늘은 새 삶의 가능성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한 길은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길’로 삼은 사람들입니다. 그 길이야말로 진리이고 생명임을 믿기에 우리는 그 길을 걷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을 잘 걷고 계신지요?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삶을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의 여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시고, 살아갈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가슴에 아름답고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열어주신 곳은 대개 갈릴리 마을에서였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은 ‘신앙의 중심’입니다. 세계의 배꼽, 정신의 뿌리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예루살렘 행은 영광을 위한 여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수난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생의 마침표를 찍기 위한 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게 마련이지만 죽기 위해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생명체는 살고자 하는 욕망(eros)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로 죽음의 충동(thanatos)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때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결국은 삶에 대한 사랑에서 발생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앞길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너무나 잘 아셨습니다. 영광의 면류관이 아니라 가시 면류관이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피할 생각이 없습니다. 정말로 잘 산다는 것은 죽을 자리에서 제대로 죽을 줄 아는 것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살리기 위해 당신 자신을 내놓으신 분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하는 주님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꽃밭에 들어가듯 흥겹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 길을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시도 때도 없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의 마음을 답답하게 한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을 떠날 날은 가까이 다가오는 데, 제자들은 여전히 주님의 핵심을 붙잡지 못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주님의 마음을 초조하게 했을 것입니다.

• 삼중적 치유
성경을 유의해서 보는 분들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 번이나 당신의 수난에 대해서 예고하셨음을 알 것입니다. 그런데 마가는 수난 예고의 전후에 제자들의 영적인 상태를 암시하는 사건들을 의도적으로 배치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수난 예고 직전에 나오는 벳새다의 맹인 이야기(막8:22-26)는 어쩌면 아직도 보아야 할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제자들의 이야기인지도 모릅니다. 두 번째 수난 예고 앞에는 귀신 들린 소년을 앞에 두고 쩔쩔매는 제자들의 모습(막9:14-29)이 나옵니다. 세 번째 수난 예고 뒤에는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께 나아와 주님이 영광의 자리에 오를 때 자기들을 하나는 오른쪽에 다른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두 제자들의 무감각과 무지와 무능력을 드러내는 대목입니다.

그런 직후에 등장하는 이야기가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마가는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눈먼 거지 바디매오의 이야기를 통해 들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여리고를 떠나실 때에, 바디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 가에 앉아 있다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는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사람들은 조용히 하라고 그를 꾸짖습니다. 하지만 그는 더욱 큰소리로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예수님은 가던 길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서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주님은 단도직입적으로 묻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느냐?” 바디매오의 대답도 즉각적입니다. “선생님,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마침내 주님의 선언이 떨어집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마가는 이후의 이야기를 간단하게 소개합니다. “그러자 그 눈먼 사람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가 가시는 길을 따라 나섰다.”

이 사건은 그 눈먼 사람에게 세 가지의 치유가 동시에 일어났음을 보여줍니다. 먼저 그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눈을 뜬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또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드러낸 능력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또한 길가에 앉아 사람들의 적선을 기다리던 그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일 겁니다. 주님을 따름으로 그는 마침내 역사의 주체가 되었습니다. 신세 한탄이나 하고 있었을 그가 예수님과 만나, 눈을 뜨고 마침내 세상을 변혁하려는 하나님의 꿈에 동참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 신앙을 배우고 싶다
오늘은 독일의 순교자인 디이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이 순교한 날입니다. 1945년 4월 9일 독일의 패망을 눈앞에 두고 그는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그를 기억하며 <<옥중 서간>>을 꺼내 읽다가 감동적인 대목과 만났습니다. 그는 미국에 머물 때 프랑스 출신의 젊은 목사와 나눈 대화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삶을 통해 정말로 이루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프랑스인 목사는 성인(聖人)이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의 말은 본회퍼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본회퍼는 자신은 신앙을 배우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한 후 그는 일상 속에서 경험하는 모든 일들이 신앙을 배우는 자리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본회퍼 목사에 의하면 신앙이란 우리의 의도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품에 자신을 던지는 모험입니다. 물론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야 합니다. 바디매오처럼 부르짖기도 해야 하고, 겉옷을 내던지고 달려가기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바를 명확하게 말씀드리기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벗어버려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안일한 평안이 아닐까요? 그것처럼 우리를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가는 길은 이웃들을 통한 길 말고는 없습니다. 생존의 위기에 처한 사람들의 어려움을 모른척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폭력 앞에 무방비로 노출된 채 살면서, 역사 속에서 마치 존재가 없는 사람들처럼 취급받는 이들 곁에 다가가 그들의 입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얼마나 바꿀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주님은 무능하고 무지한 제자들을 끝까지 믿어주시고 참아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 없이 구원의 일을 하기 원치 않으십니다. 이게 바로 은총입니다.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이기에 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기면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길에서 따르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그분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끼고, 그분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삼을 때 우리는 ‘그 길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주저 없이 그 길을 걷는 사람은 세상이 뒤흔들어 놓을 수 없는 자유와 평안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등불에 집착하는 사람은 밤하늘의 달빛과 별빛을 누릴 수 없습니다. 세상이 주는 잠시 동안의 기쁨을 추구하기보다는 영원한 기쁨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6년 04월 09일 12시 02분 50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