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6.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설교자 김기석
본문 행2:22-24
설교일시 2006/04/16
오디오파일 s060416.mp3 [4121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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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행2:22-24
(2006/4/16, 부활절)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내 말을 들으십시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께서 능력과 기이한 일과 표적을 가지고 여러분에게 증언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여러분 가운데서 이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이 예수가 버림을 받으신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계획을 따라 미리 알고 계신 대로 된 일이지만, 여러분은 그를 무법자들의 손을 빌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서 살리셨습니다. 그가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 십자가와 장미꽃
때로는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때로는 황사 바람이 우리 시야를 가리지만 저만치서 주저주저하던 봄은 만개한 꽃과 함께 우리 곁에 다가왔습니다. 우리 마음도 절로 흥겹습니다. 이 아름다운 봄날 아침, 우리는 마음을 다해 주님의 부활하심을 기뻐하며 찬양합니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요제프 하이든의 <십자가 위의 일곱 말씀>(Die Sieben letzten Worte unseres Erlṏsers am Kreuze)을 들으면서 보냈던 고난주간이 지나고 마침내 부활의 아침을 맞이한 것입니다. 뭔가 홀가분해진 느낌입니다. 뭔가 벗어던진 듯한 느낌입니다. 그런데 제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어둠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부활하심을 마음껏 찬양하는 이 시간에도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여전히 죽음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갈수록 세상은 조금씩 자유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빛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믿고 싶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그렇지 못합니다. 분열과 대립과 두려움과 적대감이 날로 증대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희망의 조짐보다는 절망의 조짐이 많은 것 같습니다.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은 맘몬입니다. 경제 문제는 정치․사회․문화․종교 등 사회의 제반 문제들을 마치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습니다. 모든 문제는 경제 문제로 환원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사회를 암담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죽음의 세력에 대한 사망선고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죽음의 세력은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무력한 자들에게 행해지는 강자들의 테러와 폭력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동부 아프리카는 가뭄으로 타들어가고 있고, 자연의 신음소리는 높아만 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부활의 노래를 불러야 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다면 부활도 없습니다. 당연한 말이지요? 그렇지만 우리는 이 사실을 망각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부활은 좋아하지만 십자가는 싫어합니다. 아니, 상징물로서의 십자가는 좋아하지만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우리가 짊어져야 하는 십자가는 싫어합니다. 하지만 부활의 기쁨을 참으로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삼십 삼 세의 젊은 청년 예수가 그 뜨거운 피를 흘린 십자가를 장미꽃으로 감쌌습니다. 이제 그가 흘린 피가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 하나님의 긍정
지난해에 우리는 참 난감한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시청 앞에 모여 정치권이 추진하고 있던 사학법 개정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십자가를 메고 거리를 행진하는 퍼포먼스를 벌였습니다. 교계의 내로라하는 목사님들이 그 십자가를 멨습니다. 교인들은 눈물을 흘리며 그 뒤를 따랐습니다. 그런데 한 인터넷 신문에 사진 한 장이 실렸습니다. 저는 부끄러움과 참담함에 할 말을 잊었습니다. 그 십자가 밑에는 큼지막한 바퀴가 달려있었습니다. 연세가 많으신 목사님들이 담이라도 들까봐 주최 측은 세심한 배려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진 한 장은 한국 교회의 실상에 대한 통렬한 드러냄이요 고발이었습니다. 본회퍼 목사의 외침이 크게 들려옵니다.

죄 없이 희생당한 사람들의 외침이 하늘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외쳐야 할 곳에서 교회는 침묵을 지켰습니다. 교회는 올바른 시간에, 올바른 방법으로, 올바른 말씀을 찾지 못했습니다. 교회는 신앙의 쓰레기(변절)에 피 흘리기까지 저항하지 않았으며, 대중의 무신성에도 책임이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끄럽게 여겼고, 악한 목적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오용되는 것에 힘 있게 저항하지 못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오용했음을 고백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빙자한 폭력과 불의가 일어난 것을 방관했습니다.(<<그리스도교 윤리>>, 96-97)

부활은 ‘달걀’과 ‘백합’과 ‘칸타타’를 통해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선택하는 모험을 통해 경험됩니다. 십자가가 예수의 삶에 대한 세상의 부정(negation)이라면, 부활은 예수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긍정(affirmation)입니다. 갈등과 분열이 일상화된 세상에 화해의 복음을 전한 예수님, 폭력과 두려움이 가득 찬 세상에 평화를 가져가신 예수님,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 불의한 세상에 빛을 가져가신 예수님을 세상은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불의의 공모를 통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십자가는 예수의 삶의 마침표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였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사망의 고통 가운데 두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새로운 생명을 허락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있는 옛 삶으로의 복귀가 아니라, 더 큰 생명으로의 변화였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죽음의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의학의 발전으로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늘어나고 있지만, 죽음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초연한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소크라테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참여했다가 패주할 때 뛰어 달아나지 않았습니다. 독배를 마시는 순간에도 그는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는 잘 죽는 법을 아는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스토아 철학자인 에픽테토스도 생의 곤경 속에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부활신앙은 죽음을 다루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지금 여기에서 잘 사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부활은 에스겔의 골짜기에 불어왔던 하늘의 바람처럼 우리를 새로운 존재로 일어서게 하는 힘입니다. 죽음은 이미 극복되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확고히 머물기만 하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될 것임을 주님은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주님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 요지부동의 북극성처럼
인권 변호사이고 환경 운동가인 나이지리아의 오론토 더글라스(Oronto Douglas)는 자기가 환경운동에 투신하게 된 계기가 된 사건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신참내기 변호사인 그가 처음으로 맡은 사건은 나이지리아에서 잘 알려진 작가요 환경 운동가였던 켄 사로-위와(Ken Saro-Wiwa)를 변호하는 것이었습니다. 켄은 나이제르 삼각주에 살고 있던 오고니 부족들이 군부 독재자들과 공모한 미국의 거대한 석유 회사들에 의해 살 땅을 빼앗기고, 주변화 되어가고 있는 것을 보고는 그들을 일깨우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50만 명에 달하는 자기 부족이 먼저 변화되면 그 변화의 물결이 주변 지역으로도 퍼져갈 수 있다고 그는 확신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군부 독재자들은 그에게 살인죄를 뒤집어 씌웠습니다. 그렇지만 살인에 대한 어떠한 증거도 없었고, 누가 보더라도 그것은 조작된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군부 독재자들과 석유회사의 간부들은 오고니 부족의 문제를 푸는 길은 그 지도자를 없애는 길밖에는 없다는 데 동의하고 인민재판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즉시 켄과 그의 동료 8명을 처형했습니다. 1995년 10월 10일의 일이었습니다.

오론토 더글러스의 첫 번째 변론은 이렇게 허망하게 끝났습니다. 오고니 부족의 저항은 좌절한 것처럼 보였고, 군부 독재자들과 거대 석유 회사의 음모는 성취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오고니 족의 투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죽음은 사람들의 양심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 불꽃에 점화된 사람 가운데 하나가 오론토 더글러스입니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오고니 문제를 국제적인 문제로 만들었고, 세상 도처에 있는 양심 세력들과 연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뒤에 올 세대가 지금 자기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대면하지 않아도 될 수 있기를 소망했습니다. 켄 사로 위와와 그의 동료들에 대한 처형은 사람들로 하여금 환경 보호와 사회 정의, 평등과 평화적인 공존을 위한 투쟁은 다른 이들과의 연대를 통해 가능하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일깨우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 다릅니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합니다. 사람의 주도면밀한 계획이 하나님의 뜻을 좌절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깨달아 아는 것은…우리가 거친 들판을 유랑하며 길을 잃고 헤매다가 갑자기 요지부동의 북극성을 볼 때, 그때 우리에게 온다. 끝없는 불안의 한복판에서, 거절당함과 절망의 한복판에서, 영혼은 말로 표현 못할 울음을 터뜨린다.”(아브라함 요수아 헤셀,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 종로서적, 1996, 66쪽)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은 세상의 한복판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우리들 앞에 드러난 요지부동의 북극성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이들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따돌림을 당하고 손해를 감수해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은 오히려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 더욱 굳게 비끌어 매줍니다. 이 확신이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부활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용서와 화해와 정의와 평화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배우 김혜자 씨는 본질적인 것은 뒷전에 밀어두고 사람들이 온통 비본질적인 매달리는 세상을 이상한 세상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생각하는 본질적인 것은 “굶어 죽어가는 아이에게 음식을 먹여 살리는 것, 전쟁을 중단하는 것,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쏟는 것”입니다. 부활은 우리가 마땅히 걸었어야 했던 본래적인 삶의 길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두렵지 않습니다. 그 벅찬 초대에 감사함으로 응답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6년 04월 16일 12시 00분 0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