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9. 그리스도의 사절
설교자 김기석
본문 고후5:17-21
설교일시 2006/05/07
오디오파일 s060507.mp3 [6157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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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사절
고후5:17-21
(2006/5/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과를 따지지 않으시고, 화해의 말씀을 우리에게 맡겨 주심으로써,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와 화해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시켜서 여러분에게 권면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죄를 모르신 분에게, 우리 대신에 죄를 씌우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입니다.]

• ‘사랑’ 교회
얼마 전에 파키스탄에서 온 유학생 하나를 만났습니다. 신학을 공부하는 그는 학교를 마친 후 자기 조국에 돌아가 고향 마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이슬람 국가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쉽진 않겠지만, 복음의 빚진 자된 자기의 소명이 거기에 있다고 그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카라치라는 곳에서 복음을 전하던 그의 장인이 얼마 전에 적당한 건물 하나를 임대해서 교회를 시작했는데, 그가 교회 이름을 지었습니다. <사랑교회>입니다. 짐작하시겠지만 그것은 우선 한글로 ‘사랑’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종족 간의 갈등이 끊이지 않는 그곳에서 예수님이 주신 새로운 계명인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가 되자는 염원이 담긴 이름입니다. 그런데 파키스탄의 공식 언어인 우르드어로 ‘사랑’은 무지개의 일곱 빛깔처럼 모든 아름다운 것이 부족함 없이 다 담겨 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뭔가 가슴이 뭉클해지는 이름입니다.

굳이 그 교회가 아니더라도 세상에 있는 어떤 교회도 ‘사랑’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삶과 가르침이라는 터 위에 세워진 교회는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 낮은 자리로 내려갈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초점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는 우리 주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내려오신 것처럼, 아픔의 자리/눈물의 자리를 향해 끝없이 자신을 낮추어 가는 것입니다. 아마도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도 대추리 농민들의 아픔을 달래주기 위해 그들 가운데 계실 것입니다. 수백억을 들여서 짓는 큰 건물이 주님의 영광일 수 없습니다. 저는 지난 번 성지순례 때 다마스커스에서 팔미라로 가는 광야 길에서 만난 아름다운 신전을 잊을 수 없습니다. 물론 그것은 무슬림들의 신전이었지만,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았습니다. <바그다드 까페>라는 조그마한 쉼터 곁에서 저는 넓적한 돌 몇 개가 원형으로 놓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가축을 돌보는 베두인 족들이 기도 시간이 되면 찾아와 함께 엎드리는 신전이었습니다.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 광야 한복판, 그곳에서 기도 시간이 되면 광야 이곳저곳에서 그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그들의 성소를 찾는 사람들의 마음을 생각하니, 저의 안일한 신앙생활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우리 교회에 가장 부족한 것은 겸비의 그리스도를 좇아 아픔의 자리에 화육해가는 노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공동체 속으로 부르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하나가 된다는 것은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도 둘이서는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란 ‘자기 초월의 능력’입니다. 나의 이익, 나의 편안함을 넘어서 우리 이웃들의 삶의 자리에 다가서는 것, 강도 만난 이웃에게 다가가 그를 돕는 것, 바로 그것이 질기디 질긴 ‘나’로부터 구원받는 거의 유일한 길이 아니겠습니까?

• 세상의 희망
둘째로 교회는 세상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맬 때 바른 생명의 길을 가리켜 보이는 등대의 구실을 해야 합니다. 그곳에 교회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사람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통일 이전의 동독 사람들이 어떤 박해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교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교회에 모여 박해받는 사람들을 위해 촛불을 밝히고 기도했습니다. 힘겹더라도 교회가 있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희망이었습니다. 교회는 그들에게 희망발전소였던 셈입니다.

군목으로 근무할 때의 일이 떠오릅니다. 어느 병사 하나가 군 생활에 적응을 못하여 자살을 생각했습니다. 초병 근무를 서면서 그는 어머니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리며 마지막으로 못난 자식을 용서해달라고 마음으로 빌고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곳에서 초라하지만 우뚝 서있는 십자가를 발견했습니다. 대대 교회의 십자가였던 것이지요. 그 십자가는 ‘내가 네 마음을 다 안다’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그 시간 하나님의 은혜의 품에 안겼습니다. 이후에 그는 모범적인 사병으로 근무를 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함석헌 선생님의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라는 시의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교회가 교회되지 못하는 현실에 낙심한 사람들이 우리 교회를 떠올리며 다시금 희망의 끈을 굳게 붙잡을 수 있다면 우리는 존재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직은 부끄럽지만, 우리가 꾸준히 주님의 마음을 향한 순례를 계속한다면 우리는 세상의 희망이 될 것입니다.

• 새로운 생명이 부화되려면
이런 교회를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변화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철저히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보람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영혼이 새로워지고, 인격이 새로워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온 우주를 새롭게 하시려는 주님의 경륜을 존재 전체로 깨닫고 그 일에 기꺼이 동참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 안에 굳게 머물러야 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미지근한(lukewarm) 신앙으로 인하여 책망을 받았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려면 철저히 해야 합니다. 달걀이 어미 닭의 품을 떠나서는 부화(孵化)될 수 없는 법입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는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품입니다. 말씀을 듣고, 깊이 묵상하여 내면화하고, 기도하면서 새로운 삶을 추구하지 않는 한 우리는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날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의 소원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빌3:10)

뚜렷한 염원을 가진 사람은 결국은 그 염원을 이루게 됩니다. 하나님은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우리의 염원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성령의 역사를 통해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깨달아진 말씀이 우리의 생명이 되게 하십니다.

• 하나님의 현존 체험
우리가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는 방식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직접적인 경험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현존 앞에 있다는 강렬한 체험이 그것입니다. 이사야가 성전에서 경험했던 것이 그것이고, 모세가 호렙산에서 경험했던 것이 그것이고, 사울이 다마스커스 가는 길에서 경험한 것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대개 삶의 총체적인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이런 체험을 근본체험이라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간접적인 체험입니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경험하는 것은 주로 여기에 속합니다. 사람들과 세상을 너그럽게 바라보는 마음이 찾아올 때, 특별한 일이 없는 데도 내면에 기쁨의 물결이 몰려 올 때, 내 사랑의 범위가 넓어질 때, 이웃들의 아픔이 나의 아픔으로 절절하게 다가올 때, 그때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현존 앞에 있는 때입니다.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할 때 우리 삶은 새로워집니다. 원망이 사라지고 남을 용서할 줄 알게 됩니다.

어느 사람이 스승을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제 삶은 부서진 유리와 같습니다. 저의 영혼은 악에 찌들었습니다. 제게도 무슨 희망이 있을까요?”
“예. 부서진 조각마다 다시 붙이고 얼룩진 데마다 깨끗이 지우는 그런 게 있지요.”
“뭔데요?”
“용서”.
“누구를 용서할까요?”
“누구나: 삶을, 하나님을, 이웃을 ― 특별히 자신을.”
“어떻게 그게 실행됩니까?”
“탓해야 할 이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이해함으로써. 아무도.”
(앤소니 드 멜로, <<일분 헛소리>>, 178쪽)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한 사람들, 그들은 탓하기를 그치고 용서하고 받아들이며 살아갑니다. 성경은 그런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새로운 피조물’이라 합니다. 과연 그가 주님 안에서 거듭난 사람인지를 알아차릴 수 있는 징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가 불화의 조장자가 아니라, 화해자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서로 등을 돌린 사람들이 돌이켜 마주보도록 하는 사람입니다. 만남의 다리를 끊고 사는 사람들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는 사람입니다. “영안이 열린 사람은 억지를 부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억지를 부리지 않으니 삶이 쉽습니다. 삶이 쉬우니 다른 이들을 돌아볼 여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들입니다. 우리가 변하면 우리의 주변도 변합니다. 내가 밝게 웃으면 주위 사람들의 마음도 밝아집니다. 내가 감사의 말을 하면 다른 이들의 가슴에도 꽃이 피어납니다. 교회는 바로 그런 삶을 연습하는 곳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진실한 사람 하나가 세상의 희망입니다. 숫자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의 희망이 되라고 부름 받았습니다. 이게 바로 우리 교회의 존재 이유입니다.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우리 교회가 더욱 더 낮은 곳을 향해 내려가고, 길 잃은 사람들의 등대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6년 05월 07일 12시 12분 07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