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20. 아름다운 인연
설교자 김기석
본문 말4:4-6
설교일시 2006/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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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인연
말4:4-6
(2006/5/14, 어버이 주일)

[너희는 율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여라. 그것은 내가 호렙 산에서 내 종 모세를 시켜서, 온 이스라엘이 지키도록 이른 것이다. 주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겠다.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고,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킬 것이다. 돌이키지 아니하면, 내가 가서 이 땅에 저주를 내리겠다."]

• 유혹이 달콤할수록
구약 성서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는 바벨론 포로생활 이후에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던 이스라엘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삶은 곤궁했고, 희망의 불빛조차 사위어들고 말았습니다. 희망을 잃는다는 것보다 더 비극적인 일은 없습니다. 희망이 있는한 사람은 살게 마련이지만, 그 희망을 상실하는 순간 사람들은 자포자기에 빠지게 됩니다. 성전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없지만 않았지만, 그 예배는 진정한 헌신도, 참회도, 은혜에 대한 감격도, 새로운 삶에 대한 결단도 없는 죽은 예배였습니다.

이때 말라기라는 예언자가 나타났습니다. 말라기(Malachi)란 ‘나의 사자’라는 뜻입니다. 그는 백성들의 불의와 잘못을 질타합니다. 그들의 그릇된 생각을 지적합니다. 정성이 없는 예배를 꾸짖고, 진정이 없는 제사장들의 태도를 고발합니다. 하지만 그는 상처입고 낙심한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도 전합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당신의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죄지은 백성들에게도 당신의 호흡을 불어넣으셔서, 그들이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비틀거리고 방황하고 되는 대로 살던 삶은 지나간 때로 족합니다. 여호와의 날이 임박했습니다. 바울 사도도 자기 시대를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라고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지금이 어느 때인지 압니다.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벌써 되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워졌습니다.(롬13:11)

이때야말로 가장 어지러운 때입니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무엇이 그른 것인지를 분간하기 어려운 때입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들 무렵에 날개를 편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눈을 똑바로 뜨고 삶의 원칙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살다보면 달콤한 유혹 앞에 마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깨끗하게 잘 살다가도 한 순간의 유혹에 넘어가 너절하게 인생을 마무리하는 사람들을 더러 보았습니다. 절 한 번만 하면 천하만국을 다 주겠다는 마귀의 유혹을 주님은 단호히 뿌리치셨습니다. 유혹이 달콤할수록 정신의 척추를 꼿꼿이 세우고 ‘아니오’ 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라기는 정신의 척추가 무너져 속절없이 휘둘리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례와 법도를 굳게 잡으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살 길이라는 것입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이미 살 길을 마련해놓으시고, 백성들의 응답을 기다리십니다.

• 法古創新의 지혜
말라기는 여호와의 날, 곧 심판의 날이 이르기 전에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보내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엘리야는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방자 하나님을 등지고 풍요의 신을 섬길 때 그들을 바른 길로 이끈 사람입니다. 그가 와서 할 일이 참 이상합니다. 뭔가 큰 일을 해야 마땅할 것 같은데, 그가 할 일이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는 것, 즉 불통의 상황을 소통의 상황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입니다. 믿음생활이란 비일상적인 어떤 큰 일이 아닙니다. 대수로울 것도 없는 일상의 삶에서 사람들이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존중하고, 조화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물론 그 바탕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하겠지요. 말라기가 활동하던 시대에도 세대 간의 갈등은 상당히 심각한 수준이었던 것 같습니다. 젊은 세대들은 밀물처럼 몰려오는 헬레니즘 문화에 깊이 경도되어 있었습니다. 새로운 것, 선진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발전으로 보였겠지요. 하지만 부모 세대는 과거의 전통적인 삶의 방식과 신앙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부모와 자식이 서로를 낯선 타자처럼 바라보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신앙인들이 해야 할 일은 다리 놓는 일입니다. 너와 나 사이에 무너진 다리를 놓아, 너는 나에게로 나는 너에게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몫입니다. 에베소서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들 사이에 놓인 분리의 담을 헐기 위해서였다고 말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피맺힌 사람들의 절규와 함성이 높아가고 있습니다. 무시당하고, 함부로 취급당한 데 대한 울분이 깊습니다. 불통의 상황입니다. 서로를 이해하려는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한 걸음씩 서로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위대한 사람이란 거창한 일을 한 사람이 아니라, 불통의 상황을 소통의 상황으로 바꾸어놓는 사람입니다. 타인을 인정할 줄 모르는 사람은 결코 큰 사람이 아닙니다. 소설가인 이윤기 선생은 자기의 단점을 솔직하게 말합니다.

“버려야 할 버릇이 어디 하나둘이겠습니까만, 나에게는 요즘 들어서 부쩍 고치려고 힘을 많이 기울이는 더러운 버릇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별로 존경하지 않으면서도, 나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은 은근히 깔보는 버릇입니다. 상대방을 존중하는 척하다가도 나이를 알게 되면 속으로, 응, 내가 입대하던 해에 너는 아무데서나 엉덩이를 까고 오줌을 누고 다녔겠구나, 혹은,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던 해에 태어난 녀석이 알면 얼마나 안다고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리느냐……이런 식입니다. 물론 욕먹을까봐 말은 그렇게 안하지요.”(<<어른의 학교>>, 민음사, 80쪽)

연암 박지원 선생의 문장론은 ‘法古創新’이란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옛것을 모범으로 삼되 변화를 주어 새롭게 만들 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인간관계에 적용해보면 젊은이들은 삶의 경험이 많은 어른들에게 여쭐 줄 알아야 경박함을 면할 수 있고, 어른들은 젊은이들을 통해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마음을 가져야 고루함을 면할 수 있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 사랑은 무능하지 않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소위 <탕자의 비유>는 우리에게 아주 아름다운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아들과 아들을 향해 달려가는 아버지의 모습이 그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근원적인 신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아버지는 아들을 떠나보냈지만 한번도 그를 마음속에서 지운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가슴 벅찬 만남의 바탕에는 신뢰와 사랑이 있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은 누구를 향하고 있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근원적인 관계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입니다. 그 관계가 풀리지 않는 한 다른 관계도 풀리기 어렵습니다. 부모의 마음이 자식에게로, 자식의 마음이 부모에게로 향하는 것이 새로운 세상의 출발점입니다. 십계명의 1계명부터 4계명까지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보여줍니다. 6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이웃들과 더불어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다섯 번째 계명이 들어있습니다. 다시 말해 부모 공경의 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접점이고, 둘을 이어주는 매개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부모를 공경함을 통해 하나님 공경에 이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웃 사랑이라는 열린 지평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부모를 생각할 때마다 죄인 아닌 자식이 없지만, 그런 자각이 뒤늦게야 온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겠습니다.

박노해 시인의 <거룩한 사랑>이라는 시는 어머니의 사랑이 얼마나 거룩한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시인은 어렸을 때의 추억을 떠올립니다. 서울에서 고학을 하던 그의 형은 방학이 되면 몸이 허약해져서 고향에 내려오곤 했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이 안쓰러워 애지중지 기르던 암탉을 잡으셨습니다. 성호를 그은 뒤 손수 닭 모가지를 비틀고, 칼에 피를 묻혀가면서 맛있는 닭죽을 끓여 객지에서 고생하고 돌아온 아들에게 먹이셨던 것이지요. 어린 시인은 어머니 치맛자락을 붙잡고 두려워 떨면서 그 살생을 지켜보곤 했습니다. 나중에 그들이 서울로 올라와 달동네 단칸방에 살 때 김치를 담가먹을 여유가 없었던 어머니는 막일을 마친 저녁 무렵 시장에 나가 잠깐 야채를 다듬어주고는 시래기를 얻어와 김치를 담고, 배춧국을 끓여 주셨습니다. 시인은 그런 어머니의 삶을 통해 눈물로 배운 것들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자기 손으로 피를 묻혀 보살펴야 한다는 걸

사랑은
가진 것이 없다고 무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사랑은
자신의 피와 능(能)과 눈물만큼 거룩한 거라는 걸

• 지구별 여행자들의 소명
살생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어머니는 핏기 없는 자식의 얼굴을 보고는 꺼림칙한 마음을 뒤로 하고 손에 피를 묻혀 자식을 먹입니다. 그렇기에 어머니의 손에 묻은 피는 거룩합니다. 어떻습니까?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비록 가진 것 아무 것도 없었지만 결코 무능하지 않았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하나로 병자들을 고쳤고, 귀신을 내쫓았고, 낙심한 사람들을 위로하셨고, 위선적인 세상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무능할 수 없습니다. 이웃들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는 사랑(compassion)은 기적을 일으킵니다. 사랑이 있으면 가진 것이 없어도 배고픈 사람을 먹일 수 있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돈이 없어도 낙심한 사람을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부모의 마음이 자식에게로, 자식의 마음이 부모에게로 돌이켜질 때, 나의 마음이 너에게로, 너의 마음이 나에게로 돌이켜질 때 세상은 따뜻한 곳이 됩니다. 그런데 그 첫 발걸음을 떼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선행적 사랑으로 구원을 경험한 우리가 먼저 다가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 아름다운 지구별을 여행하는 까닭은 사랑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인연을 맺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우리 마음공부를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소중한 이들입니다. 어버이 주일인 오늘 우리는 부모와 자식이 서로를 향해 마음을 열 때 주님의 평화가 깃들게 됨을 배웠습니다. 불통의 세상을 소통의 세상으로 바꾸기 위해 땀흘리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6년 05월 14일 12시 12분 38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