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21. 그대 진정 사람이라면
설교자 김기석
본문 롬8:14-17
설교일시 2006/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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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진정 사람이라면
롬8:14-17
(2006/5/21)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또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녀로 삼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영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바로 그 때에 그 성령이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십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려고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신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입니다.]

• 내가 깊은 곳에서
여기 한 사람이 있습니다. 신실하고 경건하게 살아왔지만 여름날 먹장구름이 낮게 드리운 하늘처럼 마음은 답답하기만 합니다. 자기의 진정이 다른 이의 가슴에 가 닿지 않고, 아무리 다가가도 그만큼 멀어지는 신기루처럼 하나님은 좀처럼 그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무력감과 자책감으로 그의 영혼은 종작이 없었고, 그는 영적 파산을 눈앞에 둔 듯 했습니다. 그날 새벽 5시, 그는 늘 그랬던 것처럼 성경을 펼쳐 들었습니다. “그분은 그 영광과 덕으로, 귀중하고 아주 위대한 약속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은 이 약속들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세상에서 정욕 때문에 부패하는 사람이 아니라 신적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벧후1:4) 아침 식사 후에 집에서 나오기 전에 읽은 말씀은 “너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다”는 마가복음 12장 34절이었습니다. 낮에 세인트 폴 교회(St. Paul Church)에 가서 시편 130편에 곡조를 붙인 찬송을 불렀습니다. 우리 찬송가 479장을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내가 깊은 곳에서 주를 불러 아뢰니
주여 나의 간구를 들어주심 바라고
보좌 앞에 나가니 은혜 내려주소서

주가 나를 살피면 누가 능히 서리요
오직 주만 모든 죄 용서하여 주시니
주님 앞에 떨면서 용서하심 빕니다.

저녁에 그는 다소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런던 시내에 있는 올더스게이트(Aldersgate) 거리에 있는 모라비안 교도들의 집회소에 갔습니다. 저녁 8시 45분 경 어느 사람이 루터가 쓴 로마서 서문을 읽으면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마음에 일으키시는 변화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것은 아주 낯선 체험이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구원을 받기 위해 그리스도를,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믿는다고 느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께서 자신의 모든 죄를 씻으시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는 그때까지 그를 악의적으로 이용했던 사람들과 그를 박해했던 사람들을 위해 있는 힘을 다하여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생전 처음 자기가 마음으로 느낀 것을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터놓고 간증을 했습니다.

한밤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자 여러 가지 시험이 그에게 다가왔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기쁨이 왜 없느냐는 물음이 속에서 들려왔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았고, 결국은 시험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순간 그의 마음은 오로지 주님만을 지켜보고 있었고, 그의 입에는 “예수, 나의 주님”이라는 말만이 가득 했습니다. 그런데 악한 원수가 그의 마음에 두려움을 넣어주었습니다. “네가 정말 믿는다면 보다 뚜렷한 변화는 왜 없느냐?” 그러자 그의 속에서 이런 대답이 흘러나왔습니다. “그것은 내가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것은 안다. 나는 현재 하나님 안에서 평화를 누리고 있다. 오늘은 내가 죄를 짓지 않는다. 예수 나의 주님은 내일 염려를 하지 말라고 내게 명령하셨다. 이것은 분명히 안다.”(웨슬리의 <<일기>> 중에서)

• 그대 진정 사람이라면
아시겠지만 지금까지 말한 ‘그’는 감리교회를 시작한 존 웨슬리 목사(John Wesley, 1703.6.17―1791.3.2)입니다. 소개해드린 이야기는 그가 남긴 1738년 5월 24일과 25일자 일기의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마음이 이상스럽게 뜨거워진’ 바로 그 체험을 우리는 웨슬리의 회심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회심(回心)이란 마음이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간 것을 뜻합니다. 회심 사건은 그러니까 일종의 전환점(turning point)입니다. 그 전환점은 저절로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치열함이 없이는 전환의 사건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대개 밋밋하게 살다가 생을 마칩니다. 곡절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우리 생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진리를 찾는 사람, 진리를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건 사람이라야 절망도 경험하고 깨달음의 기쁨도 경험하는 것입니다. 13세기 아프가니스탄의 신비가인 루미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대 진정 사람이라면
모든 것을 사랑에 걸어라.

아니거든 이 무리를
떠나라.

반쪽 마음 가지고는
어전(御前)에 들지 못한다.
신(神)을 찾겠다고 나선 몸이
언제까지 지저분한 주막(酒幕)에 머물러
그렇게 노닥거리고 있을 참인가?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하나님을 목말라 사모하는 사람이라야 전환점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이 방향전환의 사건은 병아리가 알을 깨치고 나오는 사건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어미 닭이 속에 생명을 간직한 알을 품으면 알 속의 생명이 자라게 마련입니다. 때가 되면 병아리는 알속에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가 없어서 혼신의 힘을 다하여 껍질을 깨려 합니다. 하지만 홀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때 어미 닭이 밖에서 알을 쪼아줍니다. 줄탁동기(口卒啄同期)의 사건이란 이런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속에서 나오려는 힘과 밖에서 쪼아주는 일이 딱 맞아야 생명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 자녀로 삼으시는 영
1738년 5월 24일 저녁 존 웨슬리 목사가 체험했던 것은 바로 이런 줄탁동기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날 웨슬리 목사가 경험한 것은 대체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그를 온통 사로잡았던 것은 자신을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날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은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함으로 받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에 오롯이 마음을 연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의 말씀이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또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녀로 삼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영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15)

로마서 8장 15절은 일종의 해방 선언입니다. 8.15 해방. 우연의 일치이지만 참 재미 있지요? 처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도덕적인 사람일 수는 있지만 자유인은 아닙니다. 바울은 그것을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으로 설명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영은 ‘자녀로 삼으시는 영’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것은 홍길동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이면서도 하나님을 의붓아버지처럼 여기는 이들이 많습니다. 시인 황지우는 의붓아버지를 ‘낯설고 억압적인 타자’를 상징하는 말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의식을 옥죄는 ‘이데올로기’, ‘돈’, ‘권력’은 모두 의붓아버지인 셈입니다. 심지어는 ‘종교’조차 의붓아버지가 되어 사람들을 하나님의 눈치나 보는 천덕꾸러기로 만들고 있습니다. 웨슬리 목사는 올더스게이트의 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받아들여진 것을 구원이라 생각합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이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신 더 깊은 뜻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함으로써 세상을 은혜스럽게 재창조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우리 안에서 일어난 사랑의 기적을 우리 삶과 역사의 모든 분야로 확장시켜 나가는 것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입니다. 불의와 싸우고, 갈등을 해소하고, 사회적 약자들이 안심하며 살만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마땅한 책임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사회적 聖化’라 합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려고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신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입니다.(17)

우리가 하나님이 자녀라는 말은 사람들과 세상을 돌보고, 보살피고, 북돋는 일에 주체적으로 동참하는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소외된 사람들, 신음하는 피조물이 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현실이라면, 자녀인 우리는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그들을 먹이고 입히고 보살피고 일으켜 세우는 것이 마땅합니다. 힘겹다고, 바쁘다고, 내 사정이 더 급하다고 그런 일들을 외면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공동상속자로서의 자격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빈민 구제에 힘쓰는 웨슬리 목사에게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돌볼 필요가 뭐가 있겠냐면서 그들은 결국 지옥에 떨어질 사람이 아니냐고 물었을 때, 웨슬리는 “그들이 구원받고 안 받고는 하나님께서 정하실 문제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이들을 먹이고 입히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 가슴에 불을 간직한 사람
올더스게이트의 회심 체험과 이후의 성령 확증 체험은 웨슬리 목사의 가슴에 불을 질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그 가슴에 하늘의 불이 지펴진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세상에다가 불을 지르러 왔다.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바랄 것이 무엇이 더 있겠느냐?”(눅12:49)고 탄식하셨습니다. 가슴에 불을 간직한 사람은 이르는 곳 어디에서나 다른 이들의 가슴에 불을 지릅니다. 잠든 영혼을 깨우고, 냉랭한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줍니다. 햇볕은 악인과 선인을 가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사랑 밖에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죄인도 원수도 무신론자도 타종교인들도 다 주님의 사랑의 대상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에게 ‘죄인의 친구’라는 경멸적인 칭호를 붙였지만, 그것은 오히려 그의 본질을 드러내는 영광스러운 호칭입니다.

웨슬리를 통해 우리는 새로운 비전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새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꿈에 동참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교회의 울타리를 넘지 못한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품어주고, 돌보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지, 판단하고 배제하라고 부름받은 것이 아닙니다. 시인 정현종은 ‘누군가를 끌어안을 때 팔이 한없이 늘어나는 사람’의 아름다움을 노래했습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 그런 사람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체성을 잃어버린 한국의 감리교회가 맛잃은 소금처럼 땅에 버려지는 모습을 보면 참담합니다. 우리의 올더스게이트는 어디입니까?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을 이들은 누구입니까? 주님이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이 부름에 응답하여 척박한 역사를 새롭게 하는 일에 주체적으로 동참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6년 05월 21일 12시 01분 19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