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23. 새 술에 취한 사람들
설교자 김기석
본문 행2:42-47
설교일시 2006/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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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술에 취한 사람들
행2:42-47
(2006/6/4, 성령강림절)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썼다. 모든 사람에게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사도들을 통하여 놀라운 일과 표징이 많이 일어났던 것이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대로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

• 불평 창고를 짓는 사람들
월드컵의 달이 되었습니다. 모두들 열광할 준비가 된 듯합니다. 거리에는 붉은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짝짝 짝 짝짝” 하는 응원 구호는 이제 전 세계적인 브랜드가 되었습니다. 외국인들 가운데는 2002년 월드컵을 “Be the Reds”라는 문구가 새겨진 붉은 옷을 입고 시청 앞을 가득 메운 사람들에 대한 정서적 충격으로 기억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어떤 외국 기자는 밤늦도록 응원을 하던 사람들이 너나할 것 없이 거리 청소를 하던 모습에 감동을 느꼈다고도 했습니다. 함께 텔레비전을 보던 지윤이는 “저 때만 그런데” 하고 혼잣소리를 했습니다. 그건 사실인 듯싶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자각이 그런 행동을 가능하게 했고, 그것이 우리의 일상적 문화로 발전하지는 못했습니다.

저는 월드컵이 사회적 축제이고, 사람들이 열광할만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문제는 그런 비일상적인 흥분 상태가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흥분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우리는 잿빛 일상과 마주해야 합니다. 저는 “연극이 끝나고 난 뒤, 혼자서 객석에 남아/조명이 꺼진 무대를 본 적이 있나요?” 하는 노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관객은 열띤 연기를 보고 때론 울고 웃으며/자신이 주인공이 된 듯 착각도 하지만/끝나면 모두들 떠나버리고 무대 위엔/정적만이 남아 있죠. 고독만이 흐르고 있죠.” 이게 일상입니다. 일상의 삶은 놀랄 것도 별로 없고, 신나게 웃을 일도 별로 없습니다. 어제 뭘 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바쁘게 돌아치기는 하는데, 정작 존재가 고양되는 느낌은 별로 없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무력감에 빠진 것처럼 보입니다. 어깨는 축 처지고 걸음걸이는 확고하지 못합니다. 행복한 얼굴들을 보기 어렵습니다. 우리 사회가 집단적으로 불행 바이러스에 감염된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대안동경對岸憧憬 속에서 살아갑니다. ‘지금 여기’보다는 ‘저 너머’ 어딘가에 더 나은 삶이 있을 것 같고, ‘오늘’보다는 과거가 혹은 미래가 더 낫다는 생각에 빠져 살아갑니다. 그것은 불행의 내면화이고, 기쁨의 거절입니다. ‘지금, 여기’에서의 삶에 충실하지 않고는 행복해질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물론 지고 가야 하는 인생의 짐이 무겁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고통이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경중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어려움이 없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어려움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어느 결에 불평 창고를 짓는 일에 전문가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 기운 찬 삶으로의 초대
성령강림절인 오늘 우리는 새로운 삶으로 초대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운 생동하는 삶, 기뻐하는 삶으로의 초대입니다. 하나님은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심으로써 사람이 생명체가 되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생명의 기운’은 ‘숨’, ‘기운’, ‘바람’으로도 번역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숨이 우리 속에 머물 때 사람은 기운 생동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숨이 우리 속에서 역사할 때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리고, 입이 열립니다. 새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은 어깨가 축 처진 사람들에게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고 했습니다. 작가인 에밀리 브론테는 자기는 평생토록 그 명령 하나만큼은 열심히 지켰노라고 말했습니다. 눈을 떠서 바라보면 세상은 하나님의 신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담이 짐승들의 이름을 지은 일을 아시지요? 우리는 쉽게 하나님이 아담에게 짐승들의 이름을 짓는 일을 맡기셨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만드신 각종 짐승들을 아담 앞으로 이끌어 오시고는 아담이 그것들을 무엇이라고 하는지를 지켜보셨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놀라고 기뻐하고 찬탄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놀라고 찬탄할 줄 모른다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숨이 우리 속에 세차게 머물 때 우리는 경탄할 줄 아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숨이 우리 속에서 살아 역사할 때 우리는 기운 찬 삶을 살게 됩니다. 암몬 사람 나하스가 길르앗 야베스를 포위하고, 그 주민들의 오른쪽 눈을 모조리 빼겠다고 위협했을 때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아무도 선뜻 나서 길르앗 야베스를 구하러 나서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울에게 하나님의 영이 세차게 내리자 그는 떨쳐 일어났습니다. ‘거룩한 분노’가 그를 사로잡았던 것입니다(삼상11:1-11 참조). 에스겔은 골짜기를 가득 메운 마른 뼈들 사이에 하나님의 생기가 불어오자, 그 뼈들이 맞춰지고, 그 위에 힘줄이 뻗치고, 살이 입히고, 살갗이 덮여 군대를 이루는 광경을 보았습니다(겔37:1-14 참조). 요엘 선지자는 주께서 심판하시는 날에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부어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너희의 아들딸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다.(욜2:28)

이것은 신비체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에 충만한 사람들의 기운 찬 삶에 대한 묘사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는 아들딸들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분명한 비전을 가지고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모습도 아름답습니다. 그들은 어떤 시련이 닥쳐와도 낙담하지 않습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어떻게든 살 수 있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숨을 받아들인 어르신들은 꿈을 꿉니다. 인생 이제 다 살았다고 주저앉지 않습니다. 살아있음을 경축할 줄 알게 됩니다. 철학자인 김상봉 선생은 제가 참 좋아하는 분입니다. 그는 아직 40대 후반의 나이이지만 요즘 피아노를 배우고 있습니다. 이제 겨우 바이엘을 치고 있지만 그에게는 꿈이 하나 있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베토벤의 교향곡을 연주하겠다는 꿈입니다.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릴지 모르지만 나는 그가 해낼 거라고 믿습니다. 꿈은 인생의 동력입니다. 성령에 충만한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도 낙담하지 않습니다.

•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예수의 사역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으로 살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 아픔을 알아차리고는 하나님이 마음 아파하시는 현실을 바꾸려고 애씁니다. 성령은 우리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을 하나로 이어줍니다. 그렇기에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삶은 ‘나 좋을 대로’일 수 없습니다. 악마의 시험을 이겨내신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을 입고 일상의 삶으로 복귀하셨습니다. 갈릴리 나사렛 회당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찾아 읽으셨습니다. “주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로 시작되는 대목이었습니다.

주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눈먼 사람들에게 다시 보게 함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눅4:18-19)

주님은 이 말씀을 읽으신 후에 “이 성경 말씀은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심으로써 이 말씀을 구현하는 것이 자신의 존재 이유임을 밝히셨습니다. 예수님에게 ‘나중에’라는 말은 없습니다. 구원과 해방의 사건은 지금 여기서 이루어져야 할 현실입니다.

독일 오페라의 명문 하노버 슈타츠오퍼(국립오페라극장) 오케스트라의 수석 지휘자는 36세의 한국인 구자범씨입니다.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나온 그는 음악을 통해서도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자 독일로 유학을 가서 지휘 공부를 했습니다. 몇 년만에 거장의 반열에 오른 그는 음악인이라면 새로운 세계, 좋은 세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1997년 북한 어린이들이 굶주려 죽어가고 있는 충격적인 모습이 독일에 알려지자 그는 담배를 끊고 주위의 친구들에게 수입의 10분의 1 보내기 운동을 벌였고, 자신은 5분의 1을 바쳤습니다. 비자 문제에 서울에 반년 간 머물 때는 미아리 철거민촌 야학교사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는 코카콜라를 끊었습니다. 미국으로부터 연주회 제의를 받았을 때도 ‘반전음악회’나 ‘평화음악회’ ‘전쟁 고아를 위한 자선 음악회’를 요구했습니다. 그런 그의 태도에 대해 전적으로 공감할 수 없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의 재능이 아름다운 세상을 열라고 주신 하나님의 선물임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길을 제대로 찾은 사람입니다.

• 삶의 축제화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삶을 축제로 만듭니다. 사도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골방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도 나누고 기도도 함께 했지만 그들은 무력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강림의 체험을 통해 그들은 두려움의 문빗장을 열고 세상으로 나왔습니다. 성도들은 역동적으로 모이기 시작했고, 모일 때마다 떡을 나누고 기도하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사도들을 통해 기사와 이적도 많이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그들 사이에 일으킨 가장 큰 기적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기적이었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필요한 것이 있으면 서로 나누었고, 부자들은 자기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한 가족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성령은 이처럼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줍니다.

그들은 서로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였고, 서로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일이 어렵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합니다. 그게 속 편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마음을 열고 다른 이를 맞아들이려다가 상처를 입은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경험이 누적될수록 우리는 이웃들을 향해 마음을 닫고, 더욱 방어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성령께서 임했을 때 그들은 그런 모든 차이를 뛰어넘어,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사랑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더 이상 관습, 신분, 남녀, 노소의 차별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삶의 축제로 부름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포도주가 술통 가득 넘쳐나는데
잔(盞)이 없구나.
우리에겐 아주 참 잘된 일이다.
아침마다 덕분에 달아오르고
저녁에도 벌겋게 달아오른다.
—루미, <잘된 일> 부분

여기서 ‘잔’은 사람들을 갈라놓는 일체의 것들을 말합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관습, 신분, 남녀, 노소, 종교 따위의 것이 그것입니다. 성령은 그런 차별을 넘어 우리가 서로 소통하는 기쁨을 창조합니다. 월드컵 경기에서 우리나라가 골을 넣으면 사람들은 서로 얼싸안으며 기뻐합니다. 옆 사람을 보면서 그의 종교가 뭔지, 직업이 뭔지를 따진 후 얼싸안지는 않습니다. 성령도 그렇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새 술에 취한 듯 기쁜 사람입니다. 또한 그는 다른 이들의 고통을 진심으로 아파합니다. 그래서 그의 곁에 머물면서 그에게 삶의 용기를 북돋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합니다. 이 마음으로 살 때 우리 삶은 축제가 됩니다. ‘나’에게 사로잡혀 있는 한 삶은 무겁게 마련입니다. ‘너’를 향해 나아갈 때 우리 삶은 가벼워집니다. 성령을 향해 마음을 여십시오. 그 능력으로 기운 찬 삶을 사십시오.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십시오. 삶을 축제로 바꾸는 연금술사들이 되십시오. 아멘.

등 록 날 짜 2006년 06월 04일 12시 33분 48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