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24. 세상을 살리는 생명 밥상
설교자 양재성
본문 요6:50-59
설교일시 2006/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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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리는 생명밥상.
요한복음 6/5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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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5일은 세계 환경의 날입니다. 기독교 환경운동연대의 전신인 한국공해문제연구소(소장/최완택목사)는 84년부터 6월 첫째주일을 환경주일로 정하여 지켜왔습니다. 92년 한국교회협의회 산하에 환경위원회를 설치하고 환경주일을 지킬 것을 결의하였고 환경주일 예배 자료집을 만들어 개 교회에 보급하여 왔습니다. 하지만 감리교회는 6월 첫 주일이 평신도주일이기에 둘째주일을 환경선교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오늘은 감리교회 환경선교주일입니다.
어느새 환경문제는 지구생존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평화를 교회운동의 중심에 두어온 청파교회가 교회 설립 100주년을 앞두고 다른 한 중심점인 생명을 선교의 중심에 두고 선교 2세기를 열어가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 교회를 향한 각별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설립 100년 되는 2008년엔 교회 지붕에 태양광 발전기를 설치하기로 결의하였고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녹색교회를 표방하게 되어 환경선교 전도사인 저에겐 더 없이 귀한 선물이 되었습니다.

생명과 평화
사실 생명과 평화는 동전의 앞뒷면과도 같으며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중심축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연속선에 교회가 존재하기 때문에 교회가 생명을 살리고 평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일에 매진하는 것은 교회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일이며 교회 근본정신을 세우는 일입니다.
이제 청파교회는 그저 하나의 교회로 머물러 있을 수 없는 시대적 요청을 받고 있습니다. 청파교회는 오고 오는 세대의 이상적 좌표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참 교회가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그 중심에 이 교회가 있습니다. 개인적 안위와 평안을 얻는 신앙적 삶을 넘어서서 교회 공동체를 바르게 세우고 이를 통하여 지역사회, 더 나아가서 세상을 살리고 우주를 구원하는 일에 동참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합시다. 아멘.

생명밥상
저는 오늘 여러분들과 밥상에 대하여 아니 생명밥상에 대하여 생각하고자 합니다. 여러분, 밥 잘 먹고 사시죠? 매일 먹는 밥상인지라 별 생각 없이 밥상을 대할 때가 많습니다. 밥은 그저 생존을 위한 도구로만 인식되고 있습니다. 흔히들 먹기 위해 사는 것인지, 아니면 살기 위해 먹는 것인지 물을 때가 있습니다. 이는 대답하기 당혹스러운 질문입니다. 굳이 선을 그어 분류해보면 살기 위해 먹는다는 것은 존재론적인 답이고, 먹기 위해 산다는 것은 현실적인 답입니다. 하지만 어떤 방식이든 밥은 우리의 생존과 직결됩니다. 결국 밥이 생명인 셈입니다. 건강한 밥상은 건강한 삶을, 오염된 밥상은 오염된 삶을 만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선조들은 주방에서 식구들의 밥을 짓는 사람을 살림꾼으로 그 일을 살림살이라고 하여 소중히 여겼던 것입니다.
모세의 출애굽 공동체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은총인 만나를 먹는 밥상 공동체였고 예수의 공동체도 늘 밥을 나누어 먹는 밥상 공동체였습니다. 예수님의 일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늘 식탁을 차리는 것이었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밥을 함께 나누는 성찬공동체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밥이라고 말씀하심으로 모든 밥상을 거룩하게 하신 것입니다. 일찍이 시인 김지하는 밥은 하늘이며 혼자서 차지할 수 없다고 말함으로 밥의 의미를 말했습니다.

천국의 밥상
흔히 천국을 다녀오신 분들이 천국의 밥상을 소개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지옥엔 큰 솥과 사람의 팔보다 더 큰 숟가락이 있는데 혼자서는 그 죽을 도저히 떠먹을 수 없어 자기만 먹으려고 애쓰다가 굶주린다는 것이고 천국에도 이와 똑같은 상황인데 천국에 있는 사람들은 환한 얼굴에 건강해 보였다는 것입니다. 물으니 천국엔 서로를 떠 먹여주었기 때문이랍니다.
시편 23편에 보니,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잘 따라 살면 하늘나라에 가서 하나님께 상을 받는데 그 상은 밥상입니다. 실제 상은 밥상에서 유래한 것이라지요? 무슨 일을 잘 해낸 사람을 위해 한 상 차려주는 것이 상입니다.

무너지는 밥상
우리의 주식은 무엇일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쌀이라고 답합니다. 하지만 쌀보다 더 중요한 주식은 공기와 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밥상은 우리 몸을 위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천지자연이 다 밥상입니다. 오늘날 대기오염은 물론 수질오염과 먹을거리 오염 등으로 우리의 밥상이 심각하게 오염되고 있습니다. 밥상의 오염은 곧바로 지구 생태계 파괴와 몸의 질병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지구 생존은 물론 우리의 생존과 직결됩니다.
산업화로 인한 대기오염, 합성세제와 농약살포로 인한 수질오염, 토양오염은 식품 첨가물과 함께 먹을거리의 오염을 불러왔고 인스턴트식품과 청량음료는 경제성과 상술로 인하여 독이 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즐겨먹는 과자엔 보기 좋고 맛을 내기 위해 아이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식품첨가물이 수십에서 수백 종이 들어가 있어 질병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과자만 먹이지 않아도 아토피를 70% 이상 치료할 수 있다는 보고가 나오고 있습니다. 여기에 유럽에서는 시판이 금지된 유전자조작식품이 유통되고 가축은 항생제와 성장촉진제를 사료와 함께 먹고 있습니다. 밥상의 회복 없이는 몸의 회복도 생태계의 회복도 불가능합니다. 이제 성서에서 생명밥상의 의미를 찾아보고 생명밥상의 회복을 위한 대안을 모색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처음 밥상(숨과 채식)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더니 생명체가 되었습니다. 공기, 바람, 숨은 인간이 먹은 최초의 음식입니다. 그 숨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숨을 불어 넣고 계십니다.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숨을 먹이십니다. 공기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놀라운 은총의 선물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시작입니다.
한 처음에 물이 있었고 그 물 위로 성령이 운행하더니 우주가 생겨났습니다. 에덴은 네 개의 강이 흘러 아름다운 동산을 이루었습니다. 물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물은 창조의 기본 재료였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마르지 않는 샘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물은 몸을 살릴 뿐만 아니라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처음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식탁은 채식밥상이었습니다. 창세기 1장 29절은 “푸른 채소를 너희에게 준다.”고 말씀하셨고 노아 홍수 이전에 고기를 먹었다는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채식이 인류에게 주어진 최초의 밥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 육식은 채식에 비해 고비용이 듭니다. 우리나라 식량 자급률은 23%입니다. 하지만 채식으로 바꾸면 당장 70%가 넘습니다. 가축에게 먹일 사료 수입이 그 만큼 많기 때문입니다. 세계적으로 하루에 4만 명이 굶어서 죽어 가는데 가축 사료로 들어가는 곡물을 굶주리는 이웃에게 주면 굶주림은 금방 해결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채식은 우리가 회복해야 할 생명밥상의 원형입니다.

환경파괴의 주범(공업화, 육식)
하나님은 노아 홍수 이후에 처음으로 육식을 허락하십니다. 창세기 9장 1-8절에 하나님은 단서를 달기는 하였지만 동물을 인간의 먹을거리로 주십니다. 육식을 허락한 최초의 말씀입니다. 그때부터 인간은 육식을 합니다. 하지만 단서는 피 채로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피에 생명을 두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생명을 먹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기를 먹되 생명을 함부로 유린하지 말고 겸허한 마음으로 대하란 말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밥상은 하나님의 선물인 셈입니다. 하지만 육식은 더 맛스러운 것을 찾는 인간의 구미를 자극하기 위해 더 고급화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생태계에 부담을 주며 곡물을 집어 삼킵니다. 지구 한 쪽의 굶주림을 외면한 채, 질 좋은 식사를 하는 것은 범죄행위나 진배없습니다.
풍요와 편리를 추구하는 삶은 산업사회를 이루었고 그 결과 엄청난 공해물질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코를 들 수 없을 정도로 대기는 오염되었습니다. 대기오염은 지구 온난화를 불러왔고 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는 지구 생태계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기후변화로 인한 지구위기가 핵전쟁과 버금갈 것이란 말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세계 최대 다국적 석유 회사인 셸은 태양광 발전기 사업으로 전환하고 있습니다. 셸이 두려워한 것은 석유고갈보다도 지구 온난화였습니다. 그들의 선택은 적중하고 있습니다. 유럽연합은 2050년까지 에너지 사용을 현재의 절반으로 줄이고 나머지 에너지의 60%-90%를 재생가능에너지로 바꾸는 시나리오를 작성하고 추진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선조들의 밥상
복음이 정치적 도구로 전락하는 것을 보면서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사막을 찾은 영성 수도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식탁은 아주 단순하고 소박할 뿐만 아니라 초라했습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영성 수도사들은 하루에 두 끼의 식사를 하였습니다. 식사는 저린 과일 한 쪽과 시커먼 빵 한 조각, 그리고 물 한 모금이 전부였습니다. 그것마저도 떨어지면 무기한 금식에 들어갔고 지나가는 행인들이 들러 먹을 것을 나누어 주고 가면 그것으로 연명하였습니다.
6세기 기독교 영성의 큰 산맥을 형성했던 베네딕트 수도원에서는 밥상에 대한 철저한 자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 우리는 생존을 위해 지구 생명을 쪼갤 수밖에 없는데 이를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가지고 하면 성스러운 일이요, 무지와 탐욕으로 하면 하나님에 대한 목독행위다. ”
예수님은 이미 태어나실 때부터 짐승의 먹이통으로 오셨습니다. 이는 예수님 자신이 이 세상의 밥으로 오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하복음 6장은 그것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밥이다. 나를 먹는 자는 살고 나를 먹지 않는 자는 죽는다고 선언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의 밥상에 대한 선언입니다. 이 말씀으로 모든 밥상은 거룩하며 거룩해야 한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보여주신 성만찬은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실제로 모든 밥상은 성만찬입니다. 밥상에 올라와 있는 생명체들이 어떻게 여기에까지 왔는지를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돌과 쇳덩어리가 밥이 아닙니다. 자동차와 휴대폰을 씹어서 먹을 수 없습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살아 있었던 것들이 기꺼이 우리의 밥이 되어 밥상에 차려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밥상은 제사상과도 같습니다. 그러기에 밥을 먹는 행위는 예배드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찬식과 말씀의 전례
개신교엔 두 가지 대표적인 전례가 있습니다. 성찬의 전례와 말씀의 전례가 그것입니다. 말씀의 전례는 후대에 시작된 것이고 초대교회엔 성찬의 전례가 중심이었습니다. 당시 성찬은 지금 같은 성찬식이 아니었습니다. 함께 밥을 나누어 먹는 행위였습니다. 어디서 모이든지 함께 떡을 떼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만 드리고 가는 사람들은 예배를 반만 드리는 가는 것입니다. 점심식사까지 함께 먹고 가야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밥상을 거룩하게 한 성만찬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 당신을 가르쳐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며 물이라고 하신 것과 당신을 먹고 마시는 자가 영생을 얻을 것이란 말씀은 영적이면서 생명밥상에 관련된 말씀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성만찬의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주장하는 떡과 물, 즉 살과 피는 예수의 가르침과 삶, 죽으심과 부활을 포함하고 있는 광의의 밥상입니다.
하지만 이 선언으로 우리는 모든 밥상이 이미 하나님의 살과 피로 만들어진 생명밥상임을 깨닫게 됩니다.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밥상은 생명들로 꾸며진 것이니, 하나님의 생명이 밥상을 이룬 것입니다. 그러니 누구도 밥상을 함부로 대하지 못합니다. 베네딕트 수도사들처럼 다만 생명에 대한 겸허함과 감사함으로 대하면 이는 성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탐욕과 무지로 대하면 하나님에 대한 모독행위입니다. 이미 밥상은 제사행위인 것입니다. 예배입니다. 제물인 밥은 먹는 이에게 먹혀 살과 피가 됩니다. 그러기에 먹는 이는 먹히는 것들의 몫까지 살아야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을 자신의 것으로 주장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은총으로 살고 다만 은총으로 내어주어야 합니다. 모든 생명은 밥을 먹고 기꺼이 밥이 됩니다. 하지만 밥을 먹으면서도 밥되기를 거절하는 존재는 인간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주님이 기꺼이 인류의 밥이 되어 주었듯이 밥이 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여러분들이 있어 희망은 남아 있습니다.
다시 말해 기독교의 핵심은 밥되는 삶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짚어보면 예수님의 삶이 철저히 밥되는 삶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짐승의 먹이통에 누우셨습니다. 먹이통엔 밥이 있는 것이니 주님은 밥이셨습니다. 인류의 밥으로 오신 것을 은유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밥이 되셨습니다. “너 내 밥이야.” 이 말이 기독교인이 들어야 할 가장 아름다운 말입니다. 만만하게 사십시오. 가난한 이웃의 밥이 되려면 말입니다. 누군가의 밥이 되는 삶이 최고의 삶입니다.

성만찬 식탁의 생태학적 의미
성만찬은 우리 생명밥상의 원형을 생각하게 합니다.
1, 성만찬은 식탁의 주인은 하나님이고 우린 초대된 귀한 손님임을 보여줍니다.
밥은 하늘에서 내려왔습니다. 하늘이 식탁을 만듭니다. 사실 모든 밥상은 하늘이 만듭니다. 주님의 살과 피로 만들어진 밥상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생명을 받쳐 이룬 밥상입니다. 이 밥상이 만들어지기까지 우주가 역사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에 의해 식탁에 초대된 손님들입니다. 어찌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감사한 마음으로 밥상을 대하고 천천히 씹어서 먹는 일은 신앙행위입니다.

2, 성만찬에서 밥은 공평하게 나누어집니다.
성만찬 식탁 위에 올려진 모든 음식은 공평하게 나누어집니다. 적게 있으면 적게 나뉘고, 많이 있으면 많은 대로 공평하게 나뉘어 집니다. 출애굽 당시 광야의 식탁은 평등했고 비축이 불가능했습니다. 오병이어 식탁공동체의 사건 속에서 우리는 나눈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윤리 도덕적인 의무가 아니라 그것 자체로 하나님을 알고 전체를 지각하는 신앙 행위이자 예배 행위가 됨을 볼 수 있습니다.

3, 성만찬의 식탁은 사귐을 동반하였습니다.
얼마 전 부천에 있는 제일교회에 다녀왔습니다. 점심을 함께 하면서 목사님은 참 좋아하셨습니다. 당초 다른 분들과 일명 사회 신분이 높으신 분들과 식사하기로 하였지만 양목사가 와서 다른 일정을 버리고 함께 하게 되었다며 양목사 보니 참 좋고 함께 식사하니 밥맛이 좋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식탁은 밥만 먹는 것이 아니지요, 상대방의 사랑과 관심과 마음을 함께 먹는 것이랍니다. 사실 원수 같은 사람들과 식사하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4, 성만찬은 단순 소박한 음식상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밥상은 너무나 풍성해졌습니다. 많이 먹어서 문제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한 쪽에서는 굶어서 죽어가고 있는 데도 말입니다. 우리의 밥상을 간소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생명밥상 빈 그릇 운동 전개
저희 단체의 올 해 주력사업이 생명밥상 빈그릇 운동입니다. 생명밥상 빈 그릇 운동은 건강하고 안전한 먹을거리로 밥상을 차려 공손히 먹고 음식을 남겨 버리지 않음으로 내 몸과 마음, 하나님의 창조세상을 살리는 운동입니다. 이 운동은 크게 다섯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 생명의 양식인 주님을 섬기는 신앙운동입니다.
- 자신의 몸과 마음을 돌보는 건강운동입니다.
-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살리는 살림운동입니다.
- 절제로 청빈을 실천하는 경제운동입니다.
- 사랑을 나누는 나눔 운동입니다.
나누는 것만이 남는다고 합니다. 나눌 때 비로소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 됩니다.

생명밥상 수칙
기독교 환경운동연대에서는 생명밥상 빈그릇 수칙을 만들었습니다. 참조하시면 실천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 국내산, 유기농산물을 애용합시다.
@ 제철음식을 먹읍시다.
@ 가공식품을 삼갑시다.
@ 육식보다 곡식과 채소를 즐깁시다.
@ 계획구매하며 오래보관하지 맙시다.
@ 먹을 만큼만 조리합시다.
@ 반찬 수를 줄여 간소한 상을 차립시다.
@ 생명주심에 감사하며 천천히 먹읍시다.
@ 내 몸과 이웃을 생각하며 소식합시다.
@ 밥 한 톨에 담긴 의미를 생각하고 그릇을 깨끗이 비웁시다.
@ 외식을 줄이고, 가정에서 가족과 함께 식사합시다.

순환의 단절(밥과 똥)
결론적으로 말하면 가장 심각한 것은 하나님의 순환 고리가 깨어졌다는 것입니다. 자정능력을 상실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밥을 먹고 똥을 누며 그 똥을 밥 삼아 먹는 자기 있고 또한 밥을 똥으로 내어놓곤 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밥은 똥이 되었고 똥이 밥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쉽게 편리와 타협하였습니다. 밥은 독이 되고 마찬가지로 똥도 독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결론 삼아 김경재교수의 밥에 대한 글 한 토막을 읽겠습니다.

밥 한 그릇의 의미
밥 한 그릇의 의미를 아는 자는 하나님을 안다.
밥 한 그릇을 아무 깊은 뜻 없이 먹는 자는
하나님도 그렇게 아무 뜻 없이 게걸스럽게 먹게 되어
하나님의 거룩함을 범하고 자기 생명을 상하게 한다.
밥 한 그릇 앞에서 감사할 줄 모르고 옷깃을 여밀 줄 모르면
지존자 하나님 앞에서도 감사할 줄 모르고 경외하는 마음을 익히지 못한다.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 하셨다.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다른 생명체를 먹음으로써만 존재한다.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자기보다 더 낮은 혹은 더 높은 생명에게 밥이 되어 줌으로써
그 존재 의미를 완성한다.
시베리아의 흰곰은 에스키모인의 늙은 어미를 먹고,
에스키모인은 자기 어미를 먹은 그 흰곰을 잡아먹는다.
이것은 생명의 준엄한 철칙이어서
이에 앙탈하거나 저항하는 자는 스스로 생명줄에서 끊긴다.
그러므로 밥 먹는 식탁은 하늘제사 드리는 제단,
숟가락과 젓가락을 잡고 놀리는 내 몸짓은 야훼의 제단 앞에서
소제와 번제물로 제물을 드리는 제사장의 몸짓.
한 알의 알곡, 천지 기운 영글어 뭉친 정기,
한 알의 과일과 한 잎의 푸성귀는
천지조화 빚어 만든 광야의 기적,
한 마리 생선과 육류 고기 한 점은
바다와 대지의 생명 기(氣)를 몽땅 그려 놓은 것.
그것들 속에 영글어 뭉친 정(精)은 기(氣)가 되고
기(氣)는 영혼의 항아리 안에서 발효되어
사상이 되고 기도가 되고 노래가 된다.
그래서 밥 한 그릇을 먹음은
하나님의 손수 지으신 농사양식을 먹음이요
그래서 사랑의 몸으로 구현해 내자는 것이다.
그래서 식사시간은 하늘 제사 드리는 시간이요,
기쁨과 찬양의 시간이다.
(김경재, '그리스도인의 영성훈련' 중에서)

나가기
세상은 인간의 편리와 풍요로운 삶으로 인하여 죽임당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구원할 사람들은 여러분뿐입니다.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웨슬리 목사의 선행은총과 성화의 삶을 거울삼아 새 길을 걸어갑시다. 주님은 이 교회를 통하여 여러분을 부르십니다. 그간 이 시대에 이 교회를 쓰시려고 훈련하시고 기도하게 한 것입니다.
생명밥상 빈그릇 운동에 참여합시다. 아주 작은 것부터 실천합시다.
오늘 우리는 생명밥상 빈그릇 운동에 참여하는 서명을 하게 됩니다. 이 작은 실천이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회복하고 지구 생태계를 살리는 운동가로 여러분을 자라게 할 것입니다. 밥 되신 주님의 뒤를 따라 밥 되는 삶을 실천합시다. 이 길이 우리가 걸아가야 할 진정한 길입니다.
세상을 살리는 길이 세상의 밥이 되는 길에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기꺼이 밥이 되는 삶이야 말고 우리 기독교인이 걸어가야 할 참된 길입니다. 세상의 밥이 됩시다. 생명밥상이 됩시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6년 06월 11일 12시 31분 57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