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25. 세상을 이기는 사람
설교자 김기석
본문 요일5:1-5
설교일시 2006/06/18
오디오파일 s060618.mp3 [5790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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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이기는 사람
요일5:1-5
(2006/6/18)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낳아 주신 분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 그에게서 태어난 이도 사랑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면, 이것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고 있음을 압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분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은 다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 비상한 만남
어느 대학의 ‘해우소解憂所’ 벽에 스티커 한 장이 붙어 있었답니다. 그 스티커에는 “예수님이 좋은 걸 어떡해요!”라는 글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습니다. 아마 그 대학 기독학생회에서 붙인 것이었겠지요? 그런데 그 스티커 옆에 그보다 더 큰 낙서가 대거리하듯 쓰여 있었습니다. “뭘 어떡해, 그러면 너도 십자가에 달리렴!” 이 낙서는 분명 기독교에 대해 호의적인 사람의 글은 아닐 거고, 누군가 기독교를 야유하기 위해 장난 삼아 쓴 낙서였을 겁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낙서는 촌철살인처럼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꿰뚫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그분이 가신 길을 따르는 것일 테니 말입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만남이 있습니다. 하나는 일상적인 만남(meeting)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만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람만 만나는 게 아닙니다. 풍경도 만나고, 사건도 만납니다. 그런 만남들은 우리 삶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영향은 미미합니다. 다른 하나는 비상한 만남(encounter)입니다. 그것은 아무도 인위적으로 조작하거나 조장할 수 없는 만남입니다. 그것은 예기치 않은 시간에 찾아와 삶을 뒤흔들어놓습니다. 갈릴리에서 고기잡이하던 어부들은 어느 날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즉시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그 음성의 주인을 따라 나섰습니다. 다마스커스로 가던 청년 사울은 신비스런 빛 속에서 들려오는 음성과 만납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그 예기치 않은 물음과 만나 그는 삶의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박해하던 사람에서 박해받는 사람으로 말입니다.

• 聖之愛者
예수님과 참으로 만난 사람은 삶이 한번 뒤집어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바울 사도께서 세 번째 선교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고 두로에 머물 때의 일입니다. 유대로부터 온 예언자 아가보가 찾아와 바울의 앞날에 드리운 불길한 일들을 예고합니다. 유대인들의 모함으로 그가 박해를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지요. 교우들은 간곡한 말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바울 사도를 설득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들을 책망하면서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 예루살렘에서 결박을 당할 것뿐만 아니라, 죽을 것까지도 각오하고 있습니다”(행21:13) 하고 말합니다. 죽음조차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바울의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만난 사람들은 누구나 삶에 대한 뚜렷한 자세를 갖게 됩니다. 그들에게는 ‘적당히’와 ‘어영부영’이 없습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는 처세의 기술에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예’와 ‘아니오’가 분명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는 말은 그분이 나의 모든 죄를 다 사해주셨다는 확신과 더불어, 그분이야말로 우리가 성취해야 할 가장 아름다운 인간의 전형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관통하고 있는 생각 하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소명 의식입니다. ‘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주님은 늘 깨어 있었습니다. 매사에 하나님의 뜻을 여쭙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세상과 대결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웃들의 고통에 민감한 분이셨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마9:12)는 말은 주님의 삶의 방향성을 뚜렷하게 드러내주는 말입니다. 주님은 죄인과 의인, 이방인과 유대인, 여자와 남자, 속됨과 거룩함을 나누고, 그 나눔에 따라 사람들을 차별하는 세상을 전복시켜, 모든 사람이 사랑으로 서로 용납해야 하는 한 가족임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심판자가 아니라 따뜻한 품이 되어 사람들을 대하셨습니다.

맹자는 공자를 가리켜 ‘聖之時者’라 하였습니다(孟子, <萬章 下>). 이 말은 공자는 성인 가운데 時中의 도리를 지킨 분이라는 말입니다. ‘시중’이란 ‘수시처중隨時處中’이라는 말을 줄인 것인데, 때에 따라 가장 적절하게 처신했다는 말입니다. 어떤 틀에 매이지 않으면서도 삶의 핵심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 말을 조금 패러디해서 말하자면 예수님은 ‘聖之愛者’입니다. 늘 사랑을 따라 사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세상 사람들 앞에 드러내신 분입니다.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現-存在’(Dasein)이십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한 것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자녀임이 분명합니까?

•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예수님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삶은 하나님의 명에 대한 ‘아멘’이었습니다. 억지로 ‘아멘’ 한 것이 아니라 기쁘게 ‘아멘’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 대상을 기쁘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선생님을 좋아하는 학생이 그 선생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고 그 과목에 최선을 다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이 주신 계명은 다른 것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한 공동체가 반복적으로 강조해온 바입니다. 수난의 골짜기를 향하면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13:34)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의 제자임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징표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는 우리와 다른 하나님의 자녀들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철든 신앙인이라면 하나님의 마음 아파하시는 현실을 치유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인도네시아에서 지진 참사를 당한 이들을 위해 헌금을 했습니다. 교우들이 최선을 다했습니다. 청년회원들도 자체적으로 마련한 성금 20만원을 바쳤습니다. 여러분이 드린 헌금 477만원은 <개척자들>을 통해 인도네시아로 보냈습니다. <개척자들>을 이끌고 있는 송강호 대표는 시급히 필요한 의약품과 생필품을 사서 현지인들에게 전달하겠다고 말했습니다.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일에 주님의 손과 발이 되는 것이 우리 교회의 꿈입니다. 고통과 눈물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머물고, 그들과 함께 아파하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할 때 우리 생의 비애도 줄어들 것입니다. 사람은 남의 짐을 대신 져주기 위해 몸을 낮출 때 자기를 얽매고 있는 근심으로부터도 해방되는 법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조시마 장로의 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지옥이란 다름 아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데서 오는 괴로움이다.” 그렇습니다. 사랑할 수 없음이 지옥입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사랑에 무능한 사람이 되지 않을 때 우리는 천국에 속한 사람으로 살게 됩니다. 좋은 식당에 가면 웨이터들이 늘 손님들의 식탁을 주목하고 있다가 물잔에 물이 떨어지면 곧 다가와 물을 채워줍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돕기 위해 내 잔을 비워낼 때 하나님은 그것을 넉넉히 채워주십니다. 이런 은총을 경험한 이들은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하고 고백합니다. 주님의 사랑의 통로가 되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겁니다.

•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니다
흔히들 사는 게 힘들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다들 부루퉁한 얼굴을 하고 삽니다. 천진하고 해맑게 웃는 사람 만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 경쟁 의식을 부추기는 세상, 일등이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을러대는 세상에서 우리는 지쳤습니다. 군대에서 유격훈련 과정 중에 ‘참호 격투’라는 것을 했습니다. 미로처럼 파놓은 참호 속에 20여 명의 장정들이 웃통을 벗고 들어가서 상대의 깃발을 뺏을 때까지 격투를 계속하는 것입니다. 물론 주먹으로 때리면 안 됩니다. 질퍽질퍽한 참호 속에서 힘겨루기를 하면서 상대방을 참호 밖으로 들어내놓아야 합니다. 그 와중에 동작 빠른 사람이 상대의 깃발을 손에 넣으면 격투는 끝납니다. 참호 격투가 끝나면 가슴과 등에 오선지가 가득합니다. 감투정신을 북돋기 위한 훈련일 겁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삶이 참호 격투가 되었습니다. 약자가 설 땅이 없습니다. 그들은 참호 밖으로 내동댕이쳐지고 있습니다. 소수자의 인권을 존중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근간이지만,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는 그 토대를 뒤흔들고 있습니다. 꿩 잡는 게 매라는 사고가 암암리에 우리 의식을 지배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바울 사도의 충고를 듣습니다.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롬12:2).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은 이미 세상을 이긴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각박하다 해도 우리는 단호히 사랑을 택해야 합니다. 반칠환 시인의 짧은 시가 떠오르네요. 제목은 <뻐꾸기의 서원>입니다. “지빠귀를 밀어내지 않는다”. 이게 끝입니다. 이 시를 즐기기 위해서는 뻐꾸기의 탁란托卵 습성을 알아야 합니다. 뻐꾸기는 지빠귀 둥지에 알을 낳습니다. 지빠기는 자기 알과 뻐꾸기 알을 동시에 품습니다. 하지만 먼저 알에서 깨어난 뻐꾸기 새끼는 둥지 안에 있는 지빠귀 알을 둥지 밖으로 밀어냅니다. 그리고 지빠귀 어미가 물어다주는 먹이를 독차지합니다. 자기 몸집의 몇 배가 되는 뻐꾸기에게 먹이를 물어다주는 지빠귀 어미의 모습은 애처롭습니다. 어느 날 뻐꾸기는 진짜 어미의 울음소리를 듣고는 훌쩍 둥지를 떠나버립니다. 남겨진 자빠귀 어미가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이 안쓰럽습니다. 우리는 뻐꾸기처럼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렇다면 이제 우리도 뻐꾸기의 서원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웃들을 밀어내지 않는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계명을 지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계명이 바깥에 있으면 지키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타율적으로 우리를 규제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계명이 우리 속에 있으면 지키기 쉽습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뜻을 기쁘게 행하게 해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령의 불꽃을 꺼뜨리지 않는 것입니다. 레위기 법전은 제사장들이 번제단의 불을 꺼뜨리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레6:13). 순간순간마다 우리 삶을 하나님의 현존 앞에 세울 때 우리 영혼의 불은 타오를 것입니다. 우리 영혼에 신령한 불이 타오를 때 우리는 이웃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교우 여러분들의 가정과 우리 교회가 늘 사랑의 불꽃으로 환하게 빛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6년 06월 18일 13시 35분 28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