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26. 신성한 땅은 어디인가?
설교자 김기석
본문 겔37:20-28
설교일시 2006/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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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땅은 어디인가?
겔37:20-28
(2006/6/25)

[또 너는, 글 쓴 두 막대기를 그들이 보는 앞에서 네 손에 들고, 그들에게 말해 주어라.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가 살고 있는 그 여러 민족 속에서 내가 그들을 데리고 나오며, 사방에서 그들을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겠다. 그들의 땅 이스라엘의 산 위에서 내가 그들을 한 백성으로 만들고, 한 임금이 그들을 다스리게 하며 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않고, 두 나라로 갈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다시는 우상과 역겨운 것과 온갖 범죄로 자기들을 더럽히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범죄한 그 모든 곳에서, 내가 그들을 구해 내어 깨끗이 씻어 주면,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내 종 다윗이 그들을 다스리는 왕이 되어, 그들 모두를 거느리는 한 목자가 될 것이다. 그들은 내 규례를 지키며 살고, 내 율례를 지켜 실천할 것이다. 그 때에는 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들의 조상이 살던 땅에서 그들이 살게 될 것이다. 그 땅에서 그들과, 그 자자손손이 영원히 거기에서 살 것이며,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영원한 왕이 될 것이다. 내가 그들과 평화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다. 내가 그들을 튼튼히 세우며, 번성하게 하며, 내 성소를 그들 한가운데 세워서 영원히 이어지게 하겠다. 내가 살 집이 그들 가운데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 성소가 영원히 그들 한가운데 있을 그 때에야 비로소 세계 만민이, 내가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는 주인 줄 알 것이다.]

• 월드컵 열기에 묻힌 분단 현실
월드컵으로 말미암아 잠 못 이루는 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축구가 대체 무엇이길래 이렇게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광장으로 텔레비전 앞으로 사람들을 이끌어내는지 모르겠습니다. 22명의 강철 같은 체력을 가진 남성들이 풀밭 위에서 거친 숨을 내뿜으며 승리를 위해 내달리는 모습에서 사람들은 어떤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러 가지 사회적 제약 속에 살면서 잃어버렸던 어떤 원시적 본능 같은 것이 그들의 몸짓을 통해 해방됨을 경험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렇게 열광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나라 국가대표팀의 별명이 ‘태극 전사’라지요?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그들은 선수(選手)가 아니라 전사(戰士)들입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전투를 벌이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나는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대한민국’을 외쳐대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머쓱함을 느낍니다. 맹목적 애국주의라고 매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나라가 국민들의 자긍심에 상처를 입히는 현실을 생각해보면, 그들은 ‘대한민국’이라는 구호를 통해 스스로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올해 6월은 이렇게 뜨겁게 지나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열기 속에서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의제(議題, agenda)들이 묻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KTX 여승무원들의 눈물겨운 투쟁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졌고, 효순이 미선이의 죽음도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있고, 이라크에서 죽어간 김선일 씨의 죽음도 잊혀졌습니다. 호국영령들을 추모하는 현충일도 잊혀졌고, 북한의 미사일 시험 발사를 둘러싼 이해당사국간의 긴박한 힘겨루기도 역사 속의 한 에피소드로 축소되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은 6.25 전란이 발발한지 56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 끔찍한 전쟁의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강토에는 여전히 철조망이 드리워있고, 이산가족들의 한도 풀리지 않았습니다. 언제까지나 이런 분단의 세월이 계속되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 하나님과 디아볼로스
여기 한 사람의 예언자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막대기 두 개를 마련해서 사람들 앞에 섰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 막대기에 각각 글씨를 씁니다. 하나에는 “유다 및, 그와 연합한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쓰고, 다른 하나에는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 및 그와 연합한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고 썼습니다. 하나님은 그 두 막대기를 서로 연결시켜 하나가 되게 하라고 하십니다. 일종의 퍼포먼스인 셈입니다. 사람들이 예언자의 그런 행동에 대해 설명을 요구했을 때 예언자는 비로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하나님은 이곳저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내어 그들이 꿈에도 그리던 고토로 데려가 그들을 한 민족으로 만들고, 한 임금이 다스리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다시는 그들이 두 나라로 갈라져 다투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도 덧붙이십니다. 이 말을 뒤집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현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포로생활을 하면서도 출신 지역이 어디냐에 따라 사분오열되어 있었습니다. 낯선 땅에서는 같은 말을 사용하는 사람만 만나도 반가운 법인데, 그들은 그렇지 않았나 봅니다. 남 왕국 출신인지 북 왕국 출신인지에 따라 바라보는 눈길이 달랐습니다. 조상도 같고 신앙도 같고 언어도 같은 사람들이건만, 오랜 분단의 세월은 그들의 마음속에도 경계선을 만들어냈던 것입니다. 뿌리로 돌아가면 문제는 의외로 쉽게 풀립니다. 문제는 그들이 뿌리로 거슬러 갈 힘을 잃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하나 되게 하는 님’이십니다. 미움과 갈등은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사랑은 하나로 만듭니다. 죄가 소외시키는 힘이라면 구원은 받아들임이요 품어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고백하는 까닭은 나뉜 것을 하나 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부모의 마음을 자식에게로 자식의 마음을 부모에게로 돌이키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등을 돌리고 살던 부부가 서로를 마주보며 기뻐하게 만드십니다. 하나님은 까칠한 눈길로 서로를 바라보던 이들이 따뜻한 눈길로 서로를 응시하게 만드십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너와 나를 가르고, 지역과 피부색, 종교에 따라 사람들을 나누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가장 잘 믿는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허위의식일 뿐입니다.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서로에게 타향이 되게 합니다. 사탄이 다니는 통로는 ‘틈’(間)입니다. 협동과 이해가 깨진 틈으로 다니는 것이 사탄입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사탄은 틈을 넓히는 자입니다. 사탄을 뜻하는 그리스어 ‘diabolos’란 ‘둘로 쪼갠다’, ‘이간질한다’는 뜻의 ‘diaballein’에서 온 말입니다. 사탄의 계략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 멜렉과 나시
하나님은 분단의식이 극복된 새 나라를 다스릴 통치자를 ‘내 종 다윗’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를 가리켜 “그들 모두를 다스리는 한 목자”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보아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왕을 뜻하는 히브리어는 ‘멜렉’(melek)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멜렉이라는 단어에서 몰렉(molek)이라는 단어를 연상하게 됩니다. 몰렉은 인신제물을 요구하는 신입니다. 달리 말해 그는 사람들의 살과 피를 먹고 배불리는 끔찍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왕에게서 몰렉의 모습을 봅니다. 왕은 백성들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빼앗고, 억압합니다. 정현종 선생의 시 <나쁜 운명>은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많습니다.

이 세상은
나쁜 사람들이 지배하게 되어 있다.
(그야 불문가지)
‘좋은’ 사람들은 ‘지배’하고 싶어하지 않고
‘지배’할 줄 모르며 그리하여
‘지배’하지 않으니까.
따라서 ‘지배자’나 ‘지배행위’가 있는 한 이 세상의 불행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정현종, <나쁜 운명>)

‘좋은’ 사람은 지배할 줄 모르고, ‘지배’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예수님도 그런 뜻에서 제자들에게 ‘스승’, ‘아버지’, ‘지도자’라는 말을 들으려고 하지 말라(마23:8-10)고 하셨습니다.

새로운 나라의 통치자를 가리키는 말로 에스겔이 사용한 단어는 ‘나시’(nasi)입니다. 이 단어는 평등 공동체에서 책임을 맡은 일꾼이라는 뉘앙스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내 종 다윗’이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이것이 경칭임은 분명하지만, ‘종’이라는 표현은 왕이 해야 할 중요한 일은 지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백성들을 돌보고 섬기는 직책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 새롭게 탄생하는 백성
새로운 나라는 새롭게 탄생하는 백성이 있을 때 가능해집니다. 새롭게 탄생하는 백성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 살기로 마음을 정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내 규례를 지키며 살고, 내 율례를 지켜 실천할 것이다.” 나는 수졸(守拙)이라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조촐함을 지킨다는 뜻일 텐데, 사람의 병통은 욕심이 과한 데 있습니다. 내게 이득이 된다면 남을 속이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게 사람입니다. 현대인들은 자기 삶의 자리를 조촐하게 지켜가는 사람을 보고 비웃습니다. 자기 삶의 원칙을 지키려면 ‘저거 바보 아냐?’ 하는 손가락질과 ‘정말 잘났어!’ 하는 비아냥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번만 눈 꼭 감으면 큰 이익이 있어도 그는 눈을 감을 수 없습니다. 자신만은 차마 속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해서만 무언가 할 수 있습니다.”(고후13:8)라고 말합니다. 진리를 거스르는 일에는 무능하지만, 진리를 위하는 일에는 결코 무능하지 않은 백성, 그들이 새로운 나라의 백성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그 나라의 백성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있는 곳 그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샬롬의 나라입니다. 샬롬이란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상태입니다. 깨어진 것도 없고, 잃어버린 것도 없는 온전함의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법도를 따라 살아가는 새 백성 가운데 당신의 ‘살 집’을 마련하시겠다고 말하십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살 공간을 마련하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 온 세상이 다 하나님의 것인데, 어디인들 하나님이 머무실 곳이 없겠습니까만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이 머무실 성소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머무실만한 성스러운 땅은 어디입니까? 솔로몬의 성전에 대한 유대인들의 전래 이야기는 매우 흥미로운 점을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 신성하게 된 땅
솔로몬은 여기저기에 많은 궁궐과 성을 지었지만 아직 성전을 짓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성전을 지을만한 땅을 찾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해보았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그날 밤에도 솔로몬은 ‘성전을 짓기에 가장 알맞은 장소가 어딘지 어떻게 하면 알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잠을 이루질 못했습니다. 그래서 슬그머니 궁궐을 빠져 나와 언덕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좋은 생각이 날지도 몰랐으니까요. 어느 덧 그는 모리아 산에 이르게 되었고, 거기에 있는 커다란 올리브 나무에 기대 눈을 감았습니다. 그동안 보았던 아름다운 땅을 머리 속에 떠올리고 있는데,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는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무슨 일이 벌어지나 보고 있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어떤 사람이 나타나더니 이쪽 밭에서 저쪽 밭으로 밀 짚단을 옮겨놓고 있었습니다. 저 도둑을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 고민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 하나가 나타나더니 저쪽 밭에서 이쪽 밭으로 밀 짚단을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도둑놈이 다른 도둑놈의 것을 훔치는 격이었습니다. 솔로몬은 다음 날 아침 그 밭의 주인들을 불렀습니다. 그들은 친형제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왕은 먼저 동생을 불러내 어찌된 일인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형님과 저는 아버지로부터 똑같은 재산을 상속받았는데 형님은 아내와 세 명의 자식도 있고 저는 혼자 몸입니다. 그러니 형님은 저보다 식량이 더 많이 필요한데도 저한테서는 단 한 톨도 가져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밤중에 밀 짚단을 옮겼던 것입니다.” 왕은 동생을 내보내고 형을 불렀습니다. 형의 말은 이랬습니다. “나는 가족들이 여럿 있기에 농사를 짓는 데 큰 어려움이 없지만 동생은 혼자 몸이라 농사를 지으려면 많은 사람을 고용해야 하니 곡식이 많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통 나의 도움을 받으려고 하지를 않아서 할 수 없이 그렇게 했습니다.” 놀라운 우애였습니다. 왕은 두 형제를 함께 불러 그들을 껴안고는 말했습니다. “그 밭을 나에게 팔지 않겠느냐. 너희들이 이미 돈독한 형제애로 그 땅을 신성하게 했기 때문에 나는 거기에다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싶구나. 그보다 더 가치 있는 곳은 없을 것이며, 그보다 더 건전한 초석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전해주는 유대인들은 성전이 서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과 우애, 그리고 서로에 대한 배려가 있는 곳, 그곳이야말로 신성한 땅입니다. 바로 그런 삶의 자리야말로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분단의 땅, 인류 역사의 모순이 집약된 이 한반도에서 우리가 서로에게 잘못한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청할 때, 그래서 남과 북이 서로를 부둥켜안을 때 우리의 강토는 하나님이 머무실 성스러운 땅으로 바뀔 것입니다. 이런 화해와 상생의 길은 저절로 열리는 게 아닙니다. 힘들더라도 먼저 다가서고, 먼저 손을 내미는 노력을 통해 길은 열릴 것입니다. 미사일이나 핵무기는 해결책이 아닙니다. 새로운 문제의 시작일 뿐입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의 피가 뿌려진 땅을 거룩한 땅으로 바꿀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이들의 의무입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화해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남과 북을 묶어 한 나라를 이루려고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꿈에 동참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브니엘의 아침 해가 솟아오를 때 야곱과 에서가 서로를 부둥켜안았던 것처럼 우리 민족도 서로에 대한 의구심 없이 진심으로 부둥켜안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6년 06월 25일 12시 15분 54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