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28. 믿음과 연민
설교자 김기석
본문 유다서1:20-25
설교일시 2006/7/9
오디오파일 s060709.mp3 [6713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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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연민
유다1:20-25
(2006/7/9)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가장 거룩한 여러분의 믿음을 터로 삼아서 자기를 건축하고, 성령으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면서 자기를 지키고, 영생으로 인도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기다리십시오. 의심을 하는 사람들을 동정하십시오. 또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을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해 주십시오. 또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을 두려운 마음으로 동정하되, 그 살에 닿아서 더럽혀진 속옷까지도 미워하십시오. 여러분을 넘어지지 않게 지켜 주시고, 여러분을 흠이 없는 사람으로 자기의 영광 앞에 기쁘게 나서게 하실 능력을 가지신 분, 곧 우리의 구주이시며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께 영광과 위엄과 주권과 권세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 전에와 이제와 영원까지 있기를 빕니다. 아멘.]

• 진리의 맛은 담담하다
예수님의 동생 유다의 이름으로 명명되는 유다서는 설교자들이 무의식적으로 기피하는 책입니다. 유다라는 이름이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을 연상시키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이 책은 매우 중요한 책입니다. 초대 교회는 여러 가지 이단적인 가르침 때문에 홍역을 앓고 있었습니다. 특히 영지주의(Gnosticism)가 문제가 되었는데, 영지주의자들은 인간의 영이 육체보다 존재론적으로 더 귀한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영의 문제가 해결되면 육의 문제에 굳이 매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지요. 물론 그들 가운데는 정말 고결한 영혼들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영지주의는 평범한 사람들로 하여금 방종한 삶을 거리낌없이 행하게 만들었습니다. 유다서의 저자는 그들을 가리켜 교회 안에서 사도들의 가르침과 권위를 업신여기는 사람들이고, 교우들 사이의 진정한 사귐을 가로막는 암초와 같은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을 특징짓는 말은 ‘불평’, ‘욕심’, ‘허풍’, '아첨‘ 등입니다. 그들은 자기 본능을 따라 살면서 교회 공동체를 파괴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그들을 추종하는 까닭은 뭘까요? 그들의 가르침이 색다른 이야기처럼 들렸기 때문일 겁니다. 어쩌면 그들의 가르침이 인간의 숨겨진 욕망을 해방시키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반복되는 일상을 진부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뭔가 짜릿한 것을 구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진리는 평범하거나 심지어는 진부해 보이기까지 하다는 사실입니다.

옛 사람이 말한 것처럼 “진리는 담담하여 색다른 맛이 없습니다(淡乎其無味)”. 우리는 늘 가까이에서 대하는 사람들은 귀한 줄 모르고, 멀리 있는 사람만 바라봅니다. 가끔 먹는 것을 귀하다 하고 매일 먹는 것은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지각 없는 자들은 “훔쳐서 먹는 물이 더 달고, 몰래 먹는 빵이 더 맛있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죽음의 그늘이 바로 그 곳에 드리워져 있다는 것을 모른다”(잠9:17-18a)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가장 요긴한 것들은 거저 주어진 것들입니다. 공기나 물과 같은 것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그것은 어렵지도 않고, 신비한 것도 아닙니다. 들을 마음만 있으면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팔린 정신은 눈 앞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색다른 가르침에 현혹됩니다.

• 삶의 토대
유다는 우리에게 우리 영혼을 도둑질하려는 자들에게 넘어가지 말라면서, 멋진 인생을 살기 위한 몇 가지 조언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거룩한 믿음을 터로 삼아서 자기를 건축”해야 합니다. 여기서 거룩한 믿음이란 사도들이 전하여 준 믿음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과 부활의 권능이 그 믿음의 기초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모험이고 결단입니다. 부름 받았을 때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갈릴리의 어부들은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버려야 할 것을 버릴 때, 삶이 단순해지고 내적인 힘이 생깁니다. 우리가 이리도 무기력하게 사는 까닭은 영혼의 지향점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선하심과 위대하심에 대한 전적인 신뢰입니다. 그 믿음 위에 우리 인생의 집을 지으면 우리는 여간한 시련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실패란 없으니 말입니다.

둘째는 성령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를 하나님께 비끄러매는 행위입니다. 즉 참다운 기도란 하나님의 뜻이 내 몸과 마음을 통해 실현되기를 소망하며 나 자신을 주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령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표현이 아니라 진실과 진정입니다. 유대교의 어느 랍비는 히브리어 알파벳을 쓴 종이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 내가 마땅히 드려야 할 기도를 당신의 은총 속에서 들어주십시오” 하고 기도했습니다. 성령으로 기도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 물결에 떠밀려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문다는 것은 그분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이고,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유지한다는 뜻입니다. 언젠가 의붓아들 의식에 대해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마치 의붓아버지를 대하는 것처럼 서먹서먹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참으로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면 우리 삶의 빛깔은 무지개빛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예수적인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상처입은 이들을 위로하고, 병든 이들을 고치고, 낙심한 이들에게 희망을 일깨우고, 배고픈 이들을 먹이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향해 나아갈 때 우리는 중심이신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게 됩니다.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때는 누군가를 돌보고 있을 때입니다.

• 책임과 연민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기에 공동체를 이룹니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행복해야 합니다. 주님은 산상수훈을 통해 “남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하나님도 그들을 불쌍히 여기실 것이다”(마5: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뜻으로 본 한국 역사>>에서 “눈에 눈물이 어리면 그 렌즈를 통해 하늘나라가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고난만이 인간을 하나님께로 이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말을 우리가 이웃들을 위해 눈물을 흘릴 때 비로소 하늘 나라를 보게 된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유다는 성도들에게 믿음 가운데 확고히 서지 못한 사람들, 베드로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들뜬 영혼’(굳세지 못한 영혼, 벧후2:14)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 지옥 불의 가장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을 불에서 끌어내라고 말합니다. 그냥 놔두면 그들은 스스로 파멸할 수 밖에 없습니다.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현혹되어 하나님을 등지고 있는 사람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것은 우리의 마땅한 책임입니다. 하지만 가인의 후예인 우리 마음 속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소리가 있습니다. “내가 내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나 혼자 살기도 바쁜 데, 어떻게 남을 돌보라는 겁니까?” 바로 이 마음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경쟁과 갈등이 일상화된 세상 말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자비의 사회화’입니다. 자비는 자애로움과 큰 슬픔을 뜻합니다. 자비는 개인적인 덕성이기도 하지만 우리 사회 전체가 추구해야 할 가치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그런 자비의 마음을 익히는 도량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서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이 연약한 이들에 대해서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누군가 믿음의 길에서 벗어날 때 그것을 아파하는 연민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판단하고 비난하고 따돌리고 외면하기보다는 흔들리는 그의 마음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기도를 드리다 보면 어느 순간 내 마음이 연민의 마음으로 가득 찰 때가 있습니다. 내가 싫어했던 사람도 품을 수 있을 것 같고, 밉살스럽게 굴던 사람들도 넉넉히 품을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됩니다. 그런 너그러움이 밀물처럼 다가올 때 나는 존재의 고양감을 느낍니다. 문제는 그것이 지속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앞에 자꾸 엎드려야 합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널리 알려진 신영복 선생님은 감옥 안에서 천사를 보았다고 말합니다. 비좁은 감방에서 여름을 나기란 보통 고역이 아닙니다. 어느 날 무더위 때문에 녹초가 되어 선잠이 들었는데,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더랍니다. 웬 바람인가 싶어 눈을 떠보니 어느 복역수 하나가 잠들어 있는 동료들을 위해 부채질을 하고 있었답니다. 신영복 선생은 서슴없이 그를 천사라고 부릅니다. 원망하고 미워하고 짜증내면 뭐합니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야말로 천국에 속한 마음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지옥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아비르 카심 함자라는 이름을 들어보셨습니까? 그는 마흐무디야에서 살던 열 다섯 살짜리 이라크 소녀입니다. 내가 조금 전 ‘살던’이라고 말한 까닭은 그 아이가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아비르는 매우 아름다운 소녀였습니다. 아비르는 바깥에 나갈 때마다 미군들의 검문소를 지나쳐야 했습니다. 미군들은 아비르에게 추파를 던졌습니다. 두려웠습니다. 어느 날 저녁 미군 101 공수 사단에 속해 있던 스티브 그린 이등병이 동료 두 명과 함께 아비르의 집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술을 마신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아비르의 아버지와 5살 난 동생을 살해하고는 아비르와 어머니를 강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에 총을 쏘아 다 살해했습니다. 끔찍한 사건입니다. 스티브 그린이 악마였기에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요? 아닙니다. 전쟁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타자에 대한 두려움과 적개심이 그런 폭력을 낳게 만들었습니다. 생명에 대한 존중이 사라진 곳, 그곳이 지옥이 아니라면 어디가 지옥이겠습니까? 우리는 사랑으로 돌보라고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그 일에 투신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 내 잔이 넘치나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지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힘만 믿고 의지하면 절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희망은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희망은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공급되는 것입니다. <성서 조선>이라는 개인 잡지를 내셨던 김교신 선생님이 어느 날 하나님 앞에 푸념을 늘어놓았습니다.

<제소: 하나님 아버지 당신은 나를 속이셨습니다. 나의 어리석은 것을 기화로 하여 당신은 온갖 감언이설로 또는 위협과 책망으로 나를 몰아내어 십수 년간 이런 잡지를 발간케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잡지를 정말 읽는 이가 누가 있습니까? 한 사람, 단 한 사람이나 어디 있었습니까? 당신은 아실 테니 있었거든 있었다 하십시오. 어떤 이는 비웃습니다. “네가 그 비용을 모아두었다면 자녀 교육에는 염려 없을뿐더러 노후의 안정을 이미 얻었으리라”고. 그러나 아무것도 되지 못했건 말건 진정한 독자 한 사람만 있었다면 나는 당신을 원망치 않겠습니다…….
심문/ 그래 네가 손해 본 것은 얼마나 되느냐? 계산해 오라.
답신/ 내 것 손해 본 것은 한푼도 없습니다. 당신이 주신 것으로 출판하고 먹고 입고 남은 부스러기가 열두 광주리올시다.
심문/ 그럼 또 무슨 말이냐.
답신/…….> (김교신, <<조와弔蛙>>, 동문선, 191-2쪽)

가만히 돌아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참으로 큽니다. 우리가 누리는 것 가운데 받지 않은 것이 무엇입니까?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것이 삶에 눈 뜬 이들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품은 뜻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된다면 하나님의 한없는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기초 위에 인생의 집을 세우고, 성령으로 기도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면서 자기를 지키고, 들뜬 영혼들을 불쌍히 여겨 그들을 지옥불로부터 건져내려는 마음이 있는 곳에서 사랑의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주님의 위엄이 드러날 것입니다. 이 멋진 초대에 기꺼이 응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6년 07월 09일 15시 19분 59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