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29. 복을 짓는 마음
설교자 김기석
본문 창13:8-18
설교일시 2006/07/16
오디오파일 s060716.mp3 [5917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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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을 짓는 마음
창13:8-18
(2006/7/16)

[아브람이 롯에게 말하였다. "너와 나 사이에, 그리고 너의 목자들과 나의 목자들 사이에, 어떠한 다툼도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한 핏줄이 아니냐! 네가 보는 앞에 땅이 얼마든지 있으니, 따로 떨어져 살자.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롯이 멀리 바라보니, 요단 온 들판이, 소알에 이르기까지, 물이 넉넉한 것이 마치 주의 동산과도 같고, 이집트 땅과도 같았다. 아직 주께서 소돔과 고모라를멸망시키시기 전이었다. 롯은 요단의 온 들판을 가지기로 하고, 동쪽으로 떠났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따로 떨어져서 살게 되었다.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서 살고, 롯은 평지의 여러 성읍을 돌아다니면서 살다가, 소돔 가까이에 이르러서 자리를 잡았다. 소돔 사람들은 악하였으며, 주를 거슬러서, 온갖 죄를 짓고 있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나간 뒤에,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 있는 곳에서 눈을 크게 뜨고, 북쪽과 남쪽, 동쪽과 서쪽을 보아라. 네 눈에 보이는 이 모든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아주 주겠다. 내가 너의 자손을, 땅의 먼지처럼, 셀 수 없이 많아지게 하겠다. 누구든지 땅의 먼지를 셀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너의 자손을 셀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 땅을 너에게 주니, 너는 가서, 길이로도 걸어 보고, 너비로도 걸어 보아라." 아브람은 장막을 거두어서, 헤브론의 마므레, 곧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거기에서 살았다. 거기에서도 그는 주께 제단을 쌓아서 바쳤다.]

• 별 것 아닌 데서
시흥시 도창동에 있는 도창교회는 매년 9월 둘째 주일을 ‘포도 감사 주일’로 지킨답니다. 포도밭이 밀집되어 있는 그 지역의 특색을 반영하는 예배입니다. 그 날이 오면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주민들도 수확한 포도를 10kg 들이 상자에 담아 교회로 가져온답니다. 대략 90 상자 정도를 거두게 되는데, 그 포도는 예배 후에 지역 내에 있는 사회복지 시설에 가져다 줍니다. 참 멋진 나눔입니다. 그런 아름다운 전통이 벌써 몇 년째 계속되면서 보람을 느낀 지역민들은 수확철이 되면 목사님께 포도 감사 주일이 언제냐고 먼저 물어온답니다. 그런데 유독 한 농가에서만은 그 일에 동참하지 않는답니다. 그는 마을에서도 평판이 그다지 좋지 않는 사람인 모양입니다. 그분을 만나보지도 않은 사람이 그에게 ‘인색’의 찌지를 붙이는 것은 적절치 않지만, 저는 그 이야기를 듣다가 “그 사람 복 받겠네” 하고 말했습니다. 물론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세상에는 복 받을만하게 사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삶을 통해 복을 짓기도 하고, 복을 까부르기도 합니다.

음식 솜씨는 상차림에서 나타나지만 그 사람의 사람됨은 설거지에서 나타난다고 합니다. 신발 벗어놓는 모습을 보면 그 신발 주인의 내면의 풍경이 떠오릅니다. 경북 봉화에 사시던 전우익 선생은 당신을 찾아오는 도시 사람들이 물 쓰는 모습을 보면서 혀를 찹니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쓰는 데 어떤 이는 물을 헤프게 쓰고 빈 양동이인 채로 그냥 가버립니다. 어떤 이는 물을 아껴쓸 뿐만 아니라 양동이에 우물물을 가득 길어다 놓고 떠납니다. 별것 아닌 것 같은데서 사람의 됨됨이가 드러납니다. 오늘은 아브라함 이야기를 통해서 복받는 마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 화여, 복이 네게 기대어 있구나
기근을 피해 애굽에 내려갔던 아브람은 큰 부자가 되어 벧엘 인근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아브람이 처음으로 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던 곳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곤란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조카인 롯도 역시 재산이 늘어서, 삼촌과 조카가 함께 거주하기에는 그 땅이 비좁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가나안 사람들이 추수를 끝낸 여름 들판에서 방목을 하는 유목민들이었는데, 풀밭을 확보하고 가축에게 먹일 물을 확보하는 것은 각 집단의 생존이 걸려 있는 문제였기에 목자들 간에 다툼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아브람은 해결책을 모색합니다. 문제가 있는 것을 없는 양 덮어두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시간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갈등도 있지만, 시간이 갈수록 악화될 수 있는 갈등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당사자들이 힘들더라도 문제에 직면해야 합니다. 그래야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아브람은 목자들 사이의 다툼이 자칫하면 숙질叔姪간의 갈등으로 비화될 수 있음을 알았기에 조카 롯을 부릅니다. 그리고 ‘혈육 간에는 다투면 안 된다’는 대전제 아래, 둘 사이의 갈등을 피하는 길은 서로 독립된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브람은 롯에게 우선 선택권을 줍니다.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우리는 이 말을 두고 아브라함의 인간됨을 찬미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가속을 책임진 사람이 취해야 할 책임성을 드러낸 것으로 보아야 할 겁니다. 평화로운 헤어짐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 몫을 먼저 챙기면 안 됩니다.

롯은 삼촌의 말이 합당하다고 여겨 여기저기를 둘러봅니다. 요단 온 들판이, 소알에 이르기까지 물이 넉넉하여 마침 주님의 동산같아 보였고, 이집트 땅과도 같아 보였습니다. 그는 주저없이 그곳을 택합니다. ‘형님 먼저, 아우 먼저’ 식의 미담을 기대하는 우리에게 롯의 선택은 매우 유감스럽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요단 들을 바라보는 롯의 시선을 선악과를 바라보는 하와의 시선에 빗대어 말하기도 합니다. 비슷한 맥락일까요? 성서 기자는 롯의 선택이 그다지 현명한 것이 아니었음을 넌지시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직 주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기 전이었다”는 말이 그것입니다. 참 알 수 없는 게 인생입니다. 그래서 노자는 “화여, 복이 너에게 기대어 있구나. 복이여, 화가 네 속에 엎드려 있구나. 누가 그 끝을 알리요?”(禍兮여 福所倚요 福兮여 禍所伏이니 孰知其極이리요, 道德經 58章) 하고 탄식했습니다. 복과 화가 뿌리부터 뒤엉켜 있는 것이라면 복을 구하는 것도 화를 피하는 것도 어찌 보면 부질없는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 기득권의 포기, 평화의 시작
롯이 떠난 후에 하나님은 아브람을 불러 “너 있는 곳에서 눈을 크게 뜨고, 북쪽과 남쪽, 동쪽과 서쪽을 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눈길이 닿는 모든 땅을 그와 그 후손에게 주겠다 약속하십니다. 요단 평지를 바라보는 롯의 눈길과,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 사방을 두루 둘러보는 아브람의 눈길은 같은 듯싶지만 다른 눈길입니다. 하나는 이익에 발밭은 이의 눈길이고 다른 하나는 감사에 찬 눈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후손들도 땅의 먼지처럼 셀 수 없이 많아지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람에게 남겨진 땅은 척박했을지 몰라도 그는 박복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가 살아가는 인생길을 비추는 빛이 되었을 것입니다. 약속은 희망이고, 희망이 있는 한 사람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내가 이 땅을 너에게 주니, 너는 가서, 길이로도 걸어 보고, 너비로도 걸어 보아라” 하십니다. 아브람은 장막을 거두어서, 헤브론에서 북쪽으로 약 3km 떨어진 마므레, 곧 상수리 숲 근처에 터를 잡고 살았습니다. 마므레는 오랜 동안 그 지역민들의 성소였습니다. 아브람은 거기서도 주님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아브람은 주님께 제단을 쌓아 바침으로써 그 땅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확증한 것입니다. 헤브론의 현재 지명은 엘 칼릴(El-kahlil)인데 그 뜻은 ‘하나님의 친구의 도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친구’란 아랍인들이 아브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습니까? 외람되지만 우리도 ‘하나님의 벗들’로 인정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저는 성경에 등장하는 이 아름다운 숙질 관계를 보면서 오늘의 세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생존권을 둘러싼 갈등은 사람들의 모듬살이가 시작된 이래로 계속되어온 인류의 어둔 면입니다. 아브람은 그런 갈등을 해결하는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선택권을 롯에게 넘겨준 것이 그의 후덕한 성품 때문이든 한 가문의 어른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이든 그는 자기의 기득권을 포기함으로써 평화를 만들어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참 중대한 교훈을 얻습니다. 평화는 힘 있는 사람의 양보가 선행될 때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만약 힘 없는 사람이 힘 있는 사람의 강요에 의해 자기 권리를 포기해야 한다면, 원한 감정이 남게 마련이고 그런 감정은 언제라도 폭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선한 삶 자체가 이미 복
지금 우리 사회는 한미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앞둔 날선 공방으로 시끄럽습니다. 지금 국민들이 분노하고 있는 것은 국민적인 공론화 과정 없이 관료적 편의주의에 기대어 정부가 비밀리에 이 일을 추진했다는 사실입니다. 정부는 부랴부랴 FTA 체결을 통해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선진국의 시스템을 우리 경제에 접목시킴으로써 사회 발전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건 그야말로 장밋빛 전망일 뿐입니다. FTA 체결은 오히려 우리 삶의 질을 떨어뜨릴 가능성이 많습니다. 세상은 약육강식의 정글이 될 것이고, 양극화는 심화되어 중산층 이하의 삶은 거덜나고 말 것입니다. 미국은 한미 FTA 체결을 위한 4대 선결 과제를 제시했습니다. 그게 참 기가 막힙니다. 첫째는 의약품 가격 인하 정책을 중지하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동차 배출 가스 기준을 강화한 조치를 취소하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광우병 파동으로 중단된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재개하라는 것입니다. 넷째는 스크린 쿼터를 축소하라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가 그렇지 못한 나라에게 요구하고 있는 이것이 정당합니까?

저는 요즘 마음이 참 뒤숭숭합니다. 지난 2월에 다녀온 레바논에 또다른 전투가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침공과 내전으로 폐허로 변한 도로변의 건물들을 바라보면서 ‘평화를 위한 기도’를 올린 것이 엊그제같건만, 헤즈볼라의 본거지를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이스라엘은 전투기를 보내 베이루트 공항을 폭격했고, 성경에서 시돈으로 일컬어지는 사이다(Saida)에 로켓포를 발사해 많은 사상자를 냈습니다. 그들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태복수법을 들먹입니다만, 사실 이스라엘이 기대고 있는 것은 ‘라멕의 노래’입니다. 가인의 후손인 라멕은 자기 아내 아다와 씰라 앞에서 자랑스레 말했습니다.

“나에게 상처를 입힌 남자를 내가 죽였다. 나를 상하게 한 젊은 남자를 내가 죽였다. 가인을 해친 벌이 일곱 갑절이면, 라멕을 해치는 벌은 일흔일곱 갑절이다.”(창4:23-24)

죄 없으신 주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신 것은 바로 이런 폭력의 악순환을 깨뜨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희생과 봉사와 사랑으로 점철된 예수님의 삶을 치밀하게 보여줍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처형 사건은 더욱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인간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박해하는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하늘 아버지께 비는 그 모습을 보고 백부장은 그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힘으로 누군가를 제압함으로 얻어지는 평화는 없습니다. 서로 용서하고, 차이를 용납하고, 조화를 이루기 위해 조금씩 양보하는 것이 평화의 길입니다. 그것이 복을 받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게 말처럼 쉽지 않은 것은 내가 손해 보는 것 같은 마음이 들기 때문입니다. 이해득실을 따지는 마음으로는 용서하거나 양보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상인 근성을 버릴 때 우리는 영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은 삼촌으로서의 기득권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롯에게 선택권을 넘겨주었습니다. 롯이 좋아보이는 요르단 평지를 택했을 때에도 그는 노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힘 있는 이가 양보할 때 상처가 없습니다. 상대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삼을 줄 아는 넉넉한 마음이 우리에게 있을 때 우리는 이미 복 받은 사람입니다. 복은 우리의 선한 행실에 대한 보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선한 삶을 택할 수 있을 때 그것이 곧 복입니다. 그런 삶을 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신다면 그것은 보상이 아니라 선물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평화의 조짐보다 불화의 조짐이 심화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정죄하고 미워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불화의 한복판에서 평화의 길을 선택하는 것은 믿음의 용기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믿음의 용기를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6년 07월 16일 12시 03분 3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