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30. 사람의 줄무늬
설교자 김기석
본문 갈6:1-5
설교일시 2006/07/23
오디오파일 s060723.mp3 [6542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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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줄무늬
갈6:1-5
(2006/7/23)

[형제자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어떤 죄에 빠진 일이 드러나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사람인 여러분은 온유한 마음으로 그런 사람을 바로잡아 주고, 자기 스스로를 살펴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은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면서 무엇이 된 것처럼 생각하면, 그는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각 사람은 자기 일을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자기에게는 자랑거리가 있더라도, 남에게까지 자랑할 것은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각각 자기 몫의 짐을 져야 합니다.]

• 어차피 살아야 할 인생이라면
긴 장마의 끝이 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해마다 태풍과 홍수로 큰 피해를 입는 이들을 볼 때마다, 참 가슴이 아픕니다. 특히 그런 홍수의 피해가 대개 가난한 저지대 사람들이나 농촌 산간 마을 주민들에게 집중되는 현실이 더욱 안타깝습니다. 어느 인터넷 신문은 홍수 피해를 다룬 기사 제목을 <여보, 다음엔 이층으로 이사 가요>로 뽑았습니다. 반(半) 지하에 살면서 해마다 비 피해를 입는 가난한 여인의 아픔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제목이었습니다. 급류에 휩쓸려 죽어간 중학생 남매의 장례식에서 할아버지는 가슴을 치며 “가슴이 아파, 가슴이 아파” 하며 우셨습니다. 누구라도 가슴을 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사람들은 “하늘도 무심하시지” 하고 탄식합니다. 그런 탄식 소리를 들을 때마다 저는 괜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무슬림들이 잘 사용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인샬라(In Shā'l Llāh)입니다. ‘신의 뜻이라면’이라는 뜻입니다. 잠시 동안 여행했던 이슬람 세계에서 제가 가장 많이 들었던 단어가 아닌가 싶습니다. 재해의 현장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에서, 친교의 식탁에서 그들은 일쑤 ‘인샬라’라고 말합니다. 어찌 보면 참 편리한 말이요, 인생관입니다. 하지만 이 말에서 우리는 얼핏 체념의 그림자를 봅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시편의 시인들도 “하나님, 언제까지…?”, “하나님, 어찌하여…?” 하며 탄식했던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지만 살아야 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런데 무고한 이들이 겪는 고통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라고 진지하게 물을 때 우리 삶은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그’의 아픔이 ‘나’의 아픔으로 여겨지고, 차마 그의 고통을 모른 체 할 수 없어(不忍人之心) 행동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걷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두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조차 우리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할 수 있는 한 정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논어(論語)의 첫 문장은 “學而時習之면 不亦說乎아”입니다. “배우고 그것을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않겠는가”. 인생의 과정이란 ‘배우고 익히는 과정’입니다. 배우고 익혀서 익숙해지면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예수적인 삶을 배우고 익히는 사람들을 일러 기독교인이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 삶은 다양한 관계로 형성됩니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사느냐가 결국은 우리 삶의 내용이 됩니다. 아름다운 삶이란 그런 관계 하나하나를 소중히 여기며 정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전적으로 선한 사람도 없고, 전적으로 악한 사람도 없습니다. 교회라는 작은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이지만, 여전히 죄의 습성을 온전히 벗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교회를 가리켜 ‘거룩한 창녀’(holy prostitute)라 한 것은 바로 이런 현실을 가리키는 말일 겁니다. 우리는 공동체를 어지럽히는 이들을 보면 눈살을 찌푸리거나, 마음으로 그를 경멸합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교회 공동체가 건강해지지는 않습니다.

• 온유한 마음으로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죄 지은 형제와 자매를 우리가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온유한 마음으로 그런 사람을 바로잡아주라.” 형제자매의 잘못을 보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눈을 질끈 감아주는 것이 꼭 사랑은 아닙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그가 돌이킬 수 있도록 시간과 기회를 주어야 하겠지만, 잘못을 저지르고도 깨닫지 못하는 경우에는 그를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잡아준다는 것은 비난이나 정죄가 아닙니다. 바울은 ‘바로잡아 주라’는 말 앞에 ‘온유한 마음으로’라는 전제를 달고 있습니다. 온유한 마음은 흙(humus, 腐植土)과 같은 마음입니다. 자기 속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스스로 더러워지지 않는 것이 흙입니다. 그런 마음이 아니고는 우리는 어떤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남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것은 남의 잘못을 드러냄으로써 은연중에 자기의 의로움을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마음입니다. 허영심입니다. 경멸하고 눈을 흘기는 것은 약자의 태도입니다. 정신적으로 강한 사람은 형제자매의 잘못을 진심으로 아파하고, 그를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교회는 의로운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욕심 많은 사람도 있고, 이기적인 사람도 있고, 공격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조화입니다. 그들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저는 신영복 선생님이 들려주는 붓글씨 이야기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예를 들어 붓으로 첫 획(劃)을 잘못 그었을 경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각도가 비뚤어졌다거나 생각보다 획이 굵게 그어졌다면, 그때부터 비상체제에 돌입하게 됩니다. 지우고 다시 쓸 수는 없으니까, 그 다음 획으로 첫 획의 잘못을 커버해야 합니다. 그래도 안 되면 그 다음 글자로 결함을 커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글자의 결함은 그 다음 글자, 또는 그 다음다음 글자를 통해 보완하게 됩니다. 한 행(行)의 결함은 그 옆에 있는 행으로써 보완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전체의 조화입니다. 나는 이것이 공동체의 구성원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형제자매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의 잘못을 커버하기 위해 우리가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도 전체의 틀 속에서 자기 몫을 충분히 해낼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한 획과 획이 서로 기대는 것, 모든 글자와 글자가 서로 돕는 상태, 방서(傍書)나 낙관(落款)까지도 전체의 균형에 참여하는 그런 한 폭의 글씨처럼, 교회는 그런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허영심에 가득 찬 사람, 자기 욕망을 하나님처럼 섬기며 사는 사람은 그럴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사람”만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남이 아닌 자기가 문제임을 아는 사람, 그래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만이 그런 조화를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

•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길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 남의 짐을 져 주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더 무겁고, 덜 무거운 차이는 있겠지만 무거운 짐을 지지 않은 사람은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짐이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뿐입니다. 이걸 받아들이고 살면 인생이 다소 가벼워집니다. 그걸 내 삶으로 수용하는 순간 짐은 놀랄 만큼 가벼워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 남의 짐을 져 주라는 명령 앞에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서로의 짐을 나누어지려 할 때 아름다운 관계가 형성됩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사람들의 어깨에 율법의 짐을 자꾸만 얹어 줍니다. 그 짐의 이름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의 짐을 벗겨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십니다. 달리 이야기하자면 나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불난 집에 부채질인가요?

하지만 인생의 짐에 짓눌려 기를 펴지 못하는 사람을 돕기 위해 몸을 낮추어본 사람은 압니다. 어느 순간 자기의 짐이 가벼워졌음을 말입니다. 이게 신앙의 신비이고 생명의 신비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해를 만나 울고 있습니다. 그들도 모두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입니다. 그들은 혼자서는 일어설 수 없는 절망의 나락에 빠져 있습니다. 누군가 곁에 다가가 지친 마음을 위로하고, 부축해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눈물의 땅, 고통의 땅, 바로 그곳이야말로 주님을 만나 뵐 장소입니다. 텅 빈 눈길로 하늘만 바라보는 저들 때문에 우리 주님은 지금 아파하십니다. 진흙더미에 덮인 집과 농토를 회복시키기 위해 주님은 땀 흘리고 계십니다. 주님은 지금 우리에게 나의 멍에를 메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부름을 외면하면 안 됩니다. 최선을 다해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을 북돋기 위해 땀 흘릴 때 우리 내면에는 예기치 않는 기쁨이 스며들게 됩니다. 그 기쁨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늘의 선물입니다.

•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참을 찾아 가는 사람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헛된 자기만족’입니다. ‘이만하면 됐지’ 하는 생각이 그를 넘어뜨립니다. 진정한 구도자였던 바울 사도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빌3:12) 바울 사도가 이러했는데 하물며 우리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자기 자신에게 속는 것이 남에게 속는 것보다 더 큰 문제입니다. 내 실력을 뻔히 알면서도 누군가의 칭찬 한 마디에 으쓱해지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자기의 영적인 빈곤을 모르지 않는데도, 누군가가 신령한 사람처럼 대접해주면 흐뭇해하는 게 우리들입니다. 이런 자기기만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갈라디아 교회 안에 있던 율법주의자들은 자기들이 마치 뭐라도 된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율법 조문을 지키는 것으로 그들은 남들보다 영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가 보기에 그것은 헛된 자부심이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거짓을 미워했습니다. 그것도 ‘비슷하지만 아닌 것’(似而非)을 ‘아예 아닌 것’(非)보다 더 미워했습니다. 그것만큼 공동체를 위태롭게 하는 것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되었습니다”(롬5:20). 누가 은혜를 체험합니까? 남의 잘못이나 지적하고, 자기의 의를 자랑하는 사람들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자기의 허물 때문에 아파하는 사람입니다. 스스로는 그 비참한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 하나님의 은총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돌아보는 사람은 남들 앞에 자기 선행을 선전하지 않습니다. 살다보면 내가 생각해도 기특한 일을 할 때도 있습니다. 무거운 리어카를 밀어줄 수도 있고, 다친 사람을 보살펴 줄 수도 있고,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을 대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다만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그것은 나의 공로가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이루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입니다”(빌2:13). 우리가 그것을 사람들 앞에 자랑스레 내놓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가로채는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런 헛된 자랑은 우리의 거짓된 자아(ego)를 강화시켜 참된 나(Self)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자선을 베풀 때에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마6:3) 하라고 하셨습니다. 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에게 빛과 온기를 전해줍니다. 하지만 자기의 공로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해는 그냥 존재함으로 우리에게 도움이 될 뿐입니다.

며칠 전 아름다운 원로 모임에 오신 김재광 권사님께 들은 이야기입니다. 비가 많이 내리던 어느 날 권사님은 과일을 사기 위해 버스를 타고 시장에 들렀습니다. 여러 가지 과일을 사서 배낭에 짊어지고 버스를 기다리는 데 다리가 너무 아팠습니다. 그래서 길옆에 있는 벤치에 무너지듯 앉았습니다. 잠시 후 어떤 젊은 아기 엄마가 다가와 물었습니다. “왜 여기 이렇게 앉아 계세요?” “다리가 너무 아파서요.” 그러자 아기 엄마는 “젖은 의자에 앉아 계시면 감기에 걸려요” 하면서 자기 가방에서 비닐을 꺼내 깔아주었습니다. 그 여인의 따뜻한 배려가 권사님의 가슴에 잔잔한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그 감동은 ‘나도 저렇게 살아야지’ 하는 자각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아기 엄마는 자기가 한 그 따뜻한 배려가 일으킨 이 놀라운 영적 사건을 알지 못할 겁니다. 우리의 존재가 이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티베트의 라다크인들의 속담 중에는 ‘호랑이의 줄무늬는 밖에 있고 사람의 줄무늬는 안에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외모나 그가 누리고 있는 객관적 삶의 조건이 아니라, 그가 어떠한 사람인가입니다. 일상의 삶을 살아가면서 여러분은 내면의 샘으로부터 무엇을 길어내고 있습니까? 불평과 미움과 허영심의 두레박을 버리고, 감사와 사랑과 소박함의 두레박으로 인생의 샘물을 길어 목마른 이들의 목을 축여주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6년 07월 23일 12시 14분 3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