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31. 사귐은 물처럼
설교자 김기석
본문 요일 1:1~4
설교일시 2006/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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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귐은 물처럼
요한1서 1:1-4
(2006/7/30)

[이 글은 생명의 말씀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태초로부터 계신 것이요, 우리가 들은 것이요, 우리가 우리의 눈으로 본 것이요, 우리가 자세히 살펴본 것이요, 우리가 손으로 만져 본 것입니다. 이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영원한 생명을 여러분에게 증언하고 선포합니다. 이 영원한 생명은 본래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우리와 서로 사귐을 가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또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쁨이 차고 넘치게 하려고 이 글을 써 보냅니다.]

• 태초부터 계신 말씀
요한은 자기 서신을 가리켜 ‘이 글은 생명의 말씀에 관한 것’이라고 분명하게 한정하여 말합니다. 요한은 태초부터 계신 그 말씀을 ‘우리가 들은 것이요, 우리가 눈으로 본 것이요, 우리가 지켜본 것이요, 우리가 손으로 만져본 것’이라고 말합니다. 달리 말해 성도들이 ‘그 말씀’을 오감(五感)을 통해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이쯤 되면 우리는 요한 공동체가 말하는 생명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저 이 글은 예수님에 관한 것이라고 하면 됐지 뭐 이렇게 복잡하게 말하나 싶지요? 문제는 사람들이 예수라는 존재의 깊이를 알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소설가 토마스 만은 “과거라는 우물로 두레박을 깊이 드리우면 드리울수록, 그래서 과거가 묻혀 있는 지하세계, 저승으로 한층 더 깊숙이 더듬어 갈수록, 인간의 기원과 역사, 풍속과 문화, 이 모든 것의 시원은 점점 더 알 수 없어진다”고 말했습니다(<<요셉과 그 형제들>> 1권, 22쪽). 예수라는 존재에 대해서 초대 교인들이 느꼈던 당혹감이 바로 이런 것이었을 겁니다. 주님은 매우 다정다감하게 사람들에게 다가가셨지만, 그분은 여전히 세상 사람들에게는 낯선 존재였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도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 폭력의 고리를 사랑으로 끊어버린 사람을 달리는 표현할 길이 없어 사람들은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태초부터 있는 말씀’이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뜨거운 피와 살을 가지고 사람들 곁에 머무시면서 우리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시고, 낙심한 이들의 손을 잡아주시고, 지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함께 울고 웃으셨던 참 사람 예수는 사라지고, 예수에 대한 토론만 남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과 우리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속되게 말해 ‘종자가 다르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말해야 우리의 나태한 모습을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와 성정이 같은 분이셨습니다. 때로는 속상해하고 안타까워하고 괴로워하고 눈물도 흘리고 기뻐하기도 하셨습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분이었기에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육체를 멸시하는 영지주의적인 이단들은 그런 예수님을 사람들에게서 빼앗아가려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거룩한 분이 더러운 육체를 입고 온다는 것, 영원한 존재가 유한한 존재 속으로 들어온다는 것을 그들은 납득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추상화시키려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지주의자들의 가르침에 솔깃했습니다. 요한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오셨음을 시인하는 영은 다 하나님에게서 난 영”이지만 “예수를 시인하지 않는 영은 다 하나님에게서 나지 않은 영”, 곧 “그리스도의 적대자의 영”(요일4:2-3)이라고 가르쳤던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 코이노니아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과의 친밀한 사귐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주님과 친하게 지내십니까? 속마음을 털어놓고, 길을 묻기도 하며, 힘겨울 때도 기대기도 하시는지요? 신학교에 다닐 때 우리는 교회의 네 가지 사명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말씀 선포(Kerygma)와 가르침(Didache), 사귐(koinonia), 섬김(diakonia)이 그것입니다. 오늘은 사귐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koinonia는 일차적으로 죄로 말미암아 깨졌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뜻합니다. ‘죄’는 분리하는 힘입니다. 죄가 들어오면 친밀하던 관계는 깨지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사랑’은 하나 되게 하는 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죄로 인하여 소외된 인간을 찾아오시어 용서하시고 당신과의 사귐 속으로 우리를 불러주시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란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의 회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사귐을 회복한 사람들은 죄로 인하여 멀어졌던 이웃들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게 됩니다. 이것이 koinonia의 이차적 의미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목적은 주님과 우리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우리가 이웃과 더불어 친밀한 사귐 속에서 살아가는데 있습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 혹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의 사귐이 아니라 이전에는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웠던 사람들을 친구로 만드는 것이 신앙의 보람입니다. 한 사람의 성숙의 정도는 그의 ‘친구 만들기 능력’과 관계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겁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친밀한 사귐을 유지하며 살 수 있을까요? 돈과 권력을 매개로 한 사귐은 돈과 권력이 사라지는 순간 깨지고 맙니다. 사상이나 이데올로기를 매개로 한 만남도 서로의 차이를 발견하는 순간 깨지고 맙니다. 주님과의 사귐은 주님 앞에 우리 마음을 온전히 내려놓을 때 시작됩니다. 이웃들과의 진정한 사귐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슬하에 모일 때 시작됩니다. 찬송가 493장은 주님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사람들의 현실을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산천도 초목도 새 것이 되었고/죄인도 원수도 친구로 변한다/새 생명 얻은 자 영생을 맛보니/주님을 모신 맘 새 하늘이로다.” 장영희 교수의 <<축복>>이라는 책을 읽다가 이런 구절과 만났습니다.

“무언가를 이해하려면 그것이 되어야 합니다. 나무를 이해하려면 나무가 되어야 하고 바위를 이해하려면 바위가 되어야 합니다. 상처받은 사람의 아픔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 저이는 참 아프겠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사람을 오래 바라보고 나도 상처받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그의 외면의 모습이 아니라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을 이보다 잘 그려낼 수는 없을 겁니다. 주님은 우리를 돕기 위해 인간이 되셨습니다.

• 벗, 서로 돕는 관계
자주 드리는 말씀이지만 예수님의 별명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였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의롭다 여기는 사람들이 붙인 경멸을 담은 호칭이었지만, 바로 그 별명이야말로 예수가 누구인지를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의인과 죄인을 가르고, 남자와 여자를 가르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르던 당시 사회에서 자유롭게 경계선을 넘어선 분이십니다. 경계선을 넘나드신 까닭은 기존 질서를 전복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법과 제도, 관습과 문화에 의해 질식당한 생명들에게 생기를 불어넣기 위해서였습니다. 경건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보다는 죄인과 세리들이 오히려 하나님 나라에 더 가깝다고 하셨고, 천대받던 사마리아 사람을 믿음의 본보기로 제시하시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일을 함께 행하는 이들을 가리켜 ‘내 친구’라 하셨습니다. 주님과의 친밀한 사귐, 혹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귐을 맛으로 표현한다면 뭐라 하면 좋을까요? 톡 쏘는 맛이나 짜릿한 맛은 아닐 겁니다. 오히려 담백한 맛이 아닐까요? 옛 사람은 ‘군자끼리의 만남은 마치 담담한 물맛과 같다’(君子之交淡如水)고 했습니다. 제가 오늘 설교 제목을 ‘사귐은 물처럼’이라고 정한 것은 바로 이 대목을 염두한 것입니다. 정해놓고 ‘아차’ 했습니다. 요즘 같은 장마철에 물의 덕성을 말하는 게 적절치 않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물은 만물 사이를 흘러가며 만물을 살게 합니다. 주님과 참으로 만난 사람은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됩니다. 주님 안에서의 만남도 역시 마찬가지로 서로에게 유익을 줍니다.

한자로 오른손 하나를 그린 것이 ‘오른쪽 右’ 자인데, 그 본래의 의미는 ‘돕는다’는 뜻이었습니다. 나중에 이 단어가 오른쪽을 나타내는 말로 쓰이자 ‘사람 人’ 자를 더해 ‘도울 佑’ 자를 만들었습니다. “하느님이 保佑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애국가 구절에서 ‘보우’란 보살피고 돕는다는 뜻입니다. ‘벗 友’ 자는 오른손 두개를 그린 것으로 ‘서로 돕는다’는 뜻입니다. 벗이란 적대감을 벗어던지고 서로 호의를 가지고 돕는 관계입니다. 주님은 늘 우리 곁에서 우리를 돕고 계십니다. 그런데 주님의 ‘친구’로서 우리는 주님을 돕고 있습니까? 다만 부끄러울 뿐입니다.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시작하면 됩니다. 신앙은 결단입니다.

• 기쁨: 사귐이 주는 선물
그런데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이, 그리고 이웃들과의 사귐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기쁨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기쁘십니까? 현대인들은 이전에 비해 매우 풍요롭게 살아갑니다. 소비는 놀랄 정도로 늘었고, 생활도 편리해졌습니다. 그러나 기쁨의 능력은 어떻습니까? 삶이 분주할수록 기쁨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행복하냐?’고 물으면 열이면 아홉은 뜨악한 표정을 짓습니다. 죽지 못해 산다는 표정이 역력합니다. 사실 도시인들은 다 고독합니다. 홍수에 마실 물 없다는 식으로 수많은 관계의 그물망 속에 살지만, 속내를 털어놓을만한 사람은 손에 꼽을 수도 없습니다. 삶의 질은 날이 갈수록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영국 레스터 대학의 애드리안 화이트 교수가 각 나라의 여러 가지 요소들을 고려해서 행복지도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우리나라는 178개국 중에서 102번째로 행복한 나라라고 발표했습니다. 다소 실망스럽긴 하지만 이게 우리의 적나라한 현실입니다.

행복과 기쁨은 누군가와 함께 함에서 옵니다. 누군가가 내 곁에 있다는 사실만큼 우리 마음을 든든하게 해주는 것은 없습니다. 임마누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임마누엘, 이 한마디가 우리 기쁨의 뿌리입니다. 주님과 함께 있는 사람은 늘 기뻐합니다. 기뻐할 수 없는 가운데도 기뻐합니다. 저는 정복순 권사님을 보면 마음이 참 좋습니다. 권사님은 늘 밝은 웃음과 유머로 주변을 따뜻하게 만드십니다. 연세가 많으신 데도 누군가를 위해 봉사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행복해 하십니다. 이번 유초등부 여름 성경학교에서도 자원봉사자로 수고하셨습니다. 기쁨의 집에 들어가고 싶으십니까?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이웃을 위해 ‘수고’와 ‘희생’을 아끼지 마십시오. 모처럼의 휴가를 수해 만난 이웃들을 돕기 위해 온전히 바치는 사람들은 자기 속에 있는 기쁨의 나무가 훌쩍 자란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팔레스타인과 레바논에서 고통 받고 있는 형제자매들을 위해 마음을 다해 기도하고, 전쟁을 막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을 때 우리는 살아 있음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절감하게 될 것입니다. 레바논의 기독교인들이 피난 중인 이슬람 신자들을 위해 교회와 학교를 열어 그들의 쉴 곳을 마련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귀한 손님으로 맞아들여 친구로 삼는 것이야말로 평화의 길입니다.

우리 교우들은 물처럼 담담한 듯싶어도 굽이굽이 돌아가는 인생길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 속에 있는 생명을 풍요롭게 만드는 살림의 명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참고)
영국 레스터 대학 애드리안 화이트 교수는 27일 178개 국가를 대상으로 건강(평균수명), 부(1인당 국내총생산(GDP)), 교육(중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 등 3가지 요소를 토대로 한 ‘행복지도’를 발표했다.

화이트 교수는 이 지도에서 ‘인구를 유지하고 에너지 소비(공해)를 감당하는 데 필요한 토지 면적’을 의미하는 ‘생태학적 발자국(ecological footprint)’ 이라는 개념을 중요하게 다뤘다. 이는 한 국가가 국민 건강과 생활 만족을 위해 자원을 얼마나 적절하게 쓰고 있는지를 가리킨다.

행복지도에 따르면 소득이 높고 평균수명이 길더라도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고 환경을 훼손한 국가는 순위가 낮았다. 또 국민이 자국 문화나 전통에 대해 얼마나 만족스러워하는지도 행복의 주요 요인으로 꼽혔다.

등 록 날 짜 2006년 07월 30일 12시 13분 08초